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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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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5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404쪽 | 152*224*30mm
ISBN13 9791156122500
ISBN10 115612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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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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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발명품 중 하나인 종이는 1~2세기경 발명되어 중국과 연결된 한반도에 가장 빨리, 대략 3세기 전후에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종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고, 고구려 승려 담징이 일본으로 건너가 제지 기술을 전파한 것이 610년이다
--- p.15

닥나무를 통해 발휘한 기지는 도침과 종이 재활용이라는 부가가치가 큰 과학기술을 탄생시켰다. 완성된 종이를 다듬이질하는 도침은 제지 공정 중 한반도에서만 거의 유일하게 보이는 마무리 공정이다. 도침 공정을 거친 한반도 종이는 광택, 밀도, 강도, 먹물의 스밈 등 여러 면에서 모두 강점을 가져 중국 문인들의 상찬을 받았고, 한반도 종이를 중국 왕조의 조공 품목으로 만들었다. 또한 도침 기술은 물걸레로 닦을 수 있는 장판지와 같은 다양한 생활 제품에 응용되어 종이로 만든 생활 제품이 19세기 말 수출품 중 하나로 자리 잡는 데도 기여했다
--- p.31

제지는 관영 수공업 체제를 수립할 때 중앙과 지방을 통틀어 가장 많은 수의 장인이 등록된 분야였고, 다른 관영 작업장이 폐지된 후에도 서울의 조지서는 자기를 생산하는 분원과 함께 명맥을 이어갔다. …… 사찰 제지업은 조선 초기의 불교 탄압 과정에서 경제적 기반을 잃은 사찰의 자구책으로 생겨났다
--- p.36

성현成俔(1439~1504)은 “세종이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하여 표전지表箋紙와 자문지咨文紙를 제작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고, 또 서적을 찍는 여러 가지 종이를 만드니 그 품종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고정지蒿精紙, 유엽지柳葉紙, 유목지柳木紙, 의이지薏苡紙, 마골지麻骨紙, 순왜지純倭紙는 그 정묘함이 지극하여 찍어낸 서적도 역시 좋았다. 지금은 다만 고정지와 유목지뿐이요, 자문지, 표전지도 또한 옛날같이 정묘하지 못하다”고 기록했다
--- p.45

외교에 쓰이는 표전지와 자문지를 비롯하여 조정에서 쓰는 종이나 과거시험을 보고 시험 결과를 알리기 위해 쓴 모든 문서지는 거의 순수한 닥종이였다. …… 16세기 이후로는 다른 재료를 섞은 책지에도 닥의 비중은 점점 높아진다. 1454년 문서용으로도 잡초지를 쓰도록 하는 규정이 내려지자 양반들의 저항은 심했다
--- p.46

프랑스 서지학자 모리스 쿠랑은 …… 총 3,821종의 한국 책에 대한 서지를 작성했고, …… 고려의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처럼 천 년이 넘은 책의 종이가 색 변화나 부식 없이 깨끗한 옷감처럼 보이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그의 감탄이다
--- p.54

방각본 책지를 만들던 안성의 기좌리와 같은 곳도 조선 후기에 개조차 돈을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의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었다. 도침은 어느 자료로 보아도 조선 후기 가장 높은 공임工賃을 받은 특수 기술이었다
--- p.58

중국에서는 9세기 무렵 나무껍질이 아닌 대나무로 종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대나무 종이는 중국 제지의 중심이 되었다. …… 일본의 장인들은 담징이 가져왔거나 한반도에서 종이를 만든 ‘저’에 머물지 않았다. 하지만 한반도 장인들은 계속 닥나무라는 원료에 천착했다
--- p.61

유일한 “천하제일”은 아니지만, 한반도 종이는 그 독특한 품질로 분명히 구분되며 “고려지”라는 통칭 외에 중국 문인들 사이에 많은 별칭을 낳았다. 흰 빛깔, 윤기, 강도, 보존성을 강조하는 ‘경광지鏡光紙’, ‘경면지鏡面紙’, ‘백면지白綿紙’ 그리고 그 흰빛을 만든 재료가 비단고치(견繭)라는 오해를 담은 ‘견지繭紙’ 등이다. 이 명성은 송대에 생겼지만, …… 명·청시대에 더욱 커지고 다양해졌다
--- p.63

닥 껍질을 분해하는 공정에서 한반도 장인들은 …… 이 섬유를 완전히 분해시킨 것이 아니라 돌 위에 놓고 쳐서 적절히 빻는 쪽을 택했다. …… 백추지라는 이름의 추?가 바로 이 과정을 이르는 표현이다. …… 종이 이름에 글자를 만들어 넣을 정도로 자랑스러워한 이 공정은 …… 닥 섬유의 가느다란 가닥들을 길쭉하게 남기는 최적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 p.68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1533)에서는 품질 관리를 위한 처벌 규정이 추가되었다. 표지表紙와 자문지咨文紙 제조에 태만하여 나쁜 종이를 제조한 장인의 경우 곤장 80대로 처벌하고, 잘못을 거듭하면 매번 10대씩 추가하되 최대 100대 밑으로 처벌하라는 규정이다
--- p.79

《경국대전》 편찬 시점에 조지서는 경관직 종6품 아문으로 종6품 사지司紙 1명, 별제別提 4명에 일을 총괄하는 겸직 제조提調 2명을 두었다. 소속 장인의 수는 총 91명으로 도구를 만드는 목장木匠 2명, 발틀을 만드는 염장簾匠 8명, 지장紙匠 81명이었다. 그 외 차비노差備奴 90명, 근수노根隨奴 5명도 배정되었다. 닥을 준비하고 심부름을 할 인력으로 추정된다
--- p.83

장인들은 모두 장적에 등록되어 1년 중 정해진 기간 동안 입역하고 나머지 기간은 장세匠稅를 내고 자체 생산할 수 있었다. 경공장 지장의 경우는 상의원의 능라장綾羅匠과 함께 3교대로 입역했다. 다른 모든 분야는 2교대로 1년의 절반만 자유로웠으니 지장과 능라장을 우대한 것이다. 1445년 폐지되기는 했지만 지장은 지장전紙匠田이라는 토지와 입역 시 농사를 도울 봉족奉足도 지급 받았다. 공천公賤에 속했던 다른 장인들은 받지 못한 혜택이었다
--- p.84

1425년에는 “종이를 발명”한 나라인 중국의 황제가 조선 왕 세종에게 ‘종이 만드는 방법을 적은 글’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중국에서 ‘고려지’를 만들어보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세종은 전주의 지장을 불러들여 이에 응했지만, 이후로도 조선 종이에 대한 요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 p.89

15세기에 양반들의 닥종이 사용이 금지되고, 닥이 아닌 새로운 재료에 대한 조정의 관심이 증가했던 것은 백성들의 유교적 덕목을 기르기 위한 《삼강행실도》를 비롯해 불경까지, 다양한 편찬 및 간행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닥이 심각하게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각 관청의 문서 용지 수요도 계속 증가했다. 1605년에 공납 수량을 재조정했음에도 1617년에 이미 1년 치 공납 분으로는 반년도 대지 못한다는 호소가 제기되었다(90

세종은 《자치통감》 인쇄에 필요한 600만 장 중 100만 장을 조지서에 배정했다. …… 단순히 종이 600만 장을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지침을 내렸다. 지장이 아닌 승려에게 옷과 음식을 주고 종이를 뜨게 하라는 것이었고, 닥을 구매하고 다른 재료를 섞을 방안도 덧붙였다. 이 600만 장의 종이 제작은 2년 후에 마무리되었다
--- p.91

1516년 한 현의 공물貢物 주인이 세금으로 거둔 포 1필로 책지 25권을 바꾸어 교서관에 납부하려 했는데, 교서관에서 책지가 “좁고 색이 나쁘다”며 받기를 거부했다. 이런 경우를 점퇴點退라고 불렀다
--- p.92

관의 주문에 따른 생산은 조지서에서, 시전 상인을 비롯한 민간의 주문에 따른 생산은 조지서 밖의 지장촌이라 불리는 곳에서 이루어졌다. 지방의 관영 지소가 철폐되고 조지서 인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새로운 민관 결합의 제지 체제가 조지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간 것이다
--- p.99

청은 점차 방물을 줄여주며 정해진 규칙을 넘는 요구는 삼갔다. 정해진 종이 방물方物은 1회 22만 장까지였다. 하지만 매년 1회의 정기 방문 외에 별사가 방문했을 때도 종이는 빠지지 않았다. 종이 관련 방물은 전체 방물 예산의 3분의 1 정도였다
--- p.102

관청의 종이 품질이 나빠졌다는 불평이 가장 컸던 때는 앞서 보았듯 방납 문제가 심각했던 17세기 초 광해군 연간이었다. 조지서가 파괴되고 조지서 장인들이 흩어지기 시작하는 17세기 중반에는 도리어 종이가 과하게 두껍고 좋다는 불평이 관민 양쪽에서 커졌다
--- p.105

과거시험에 너무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지 말라는 명은 1649년 처음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유생들이 여전히 두껍고 좋은 종이를 고집하자 1651년에는 이 규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시권의 견양지를 만들어 각 도에 보내고, 그보다 두꺼운 종이는 시험관이 답인踏印을 찍어주지 않아 제출할 수 없도록 금령을 강화했다
--- p.107

1702년에는 왕이 장원급제 답안을 살펴보다 시권이 너무 두꺼운 것을 발견해 자격을 박탈했고, 그 시권을 답인한 담당자까지 죄를 물었다. 이 규정은 1706년의 《전록통고典錄通考》에도 실렸다
--- p.108

1753년 영조에게 고했던 지장의 말은 달랐다. 그에 따르면 정해진 종이를 지전에서 구해야 하는 것을 어긴 것은 지장들이 아니라 각 아문, 관가 및 이름난 집안의 사람들이었다. …… 이들은 조지서에 와서 품질을 검사한다며 시권을 가져가고는 돈도 주지 않았고, 값을 요구하면 질질 끌다가 시가의 절반도 안 되는 돈을 주었다. 심지어 지장을 데려가 가두고 시지를 만들도록 감독하며 때리기까지 하여 지극히 원통하다고 했다
--- p.111

1808년 편찬된 업무 지침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초주지는 권당 쌀 1석이었던 반면 상품 도련지는 권당 4석으로 값이 네 배였고, 하품 도련지도 2석 10두였다. 《만기요람》 기준으로 1석을 4냥으로 계산하면 상품 도련지 1권은 16냥이다. 종이 스무 장에 16냥인 것이다. 서울에 500냥 내외의 집이 있던 점을 생각하면 매우 높은 값이다
--- p.123

도침에 대한 높은 공임은 《육전조례六典條例》에도 정식화되어 있었다. 병조 예산 아래 마련된 도침군의 급료는 15냥으로 장인들이 받는 급료 중 가장 높았고, 서원書員의 급료보다 높았다
--- p.123

휴지休紙는 한 번 쓰고 난 문서를 지칭했는데, ‘쉬는 종이’라는 명칭은 쉬고 난 다음의 삶을 전제한 것이다. …… 그 일부 혹은 전부는 장인을 통해 환지還紙, ‘돌아온 종이’가 되었다. 점차 휴지는 환지만이 아니라, 옷으로, 삿갓으로, 군인들의 밥그릇과 방석으로, 여행용 물병과 가방으로, 새색시의 요강으로도 다른 삶을 살았다
--- p.127

군기감이 종이 갑옷 제작용으로 휴지, 그중에서도 특히 시험장에서 낙방한 이들의 답안지인 낙폭지落幅紙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은 쇠 공물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군기감에서는 두꺼운 종이로 만든 갑옷이 쇠사슬로 만든 갑옷, 쇄자갑鎖子甲보다 가볍고 화살과 창을 막는 데도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며 1424년 지갑 제작을 위한 재료로 휴지, 표지, 송진, 실 등을 공급받았다
--- p.130

닥종이 대신 고절지를 만들고 면화도 키울 수 없었던 북방의 백성들은 낙폭지 외투를 진정으로 반겼다. …… 낙폭지를 넣은 유지의?紙衣를 봉화를 지키는 봉수군에게도 내려주도록 법이 추가되자, 이 유지의를 중간에 착복해 봉수군이 받지 못하는 일까지 지속적으로 보고되었다. …… 결국 1729년에 백성들이 강력하게 원하는 만큼 낙폭지를 넉넉히 보내도록 결정되었다
--- p.147

호조의 새 휴지는 세초 뒤에 남는 휴지와 연분재상年分災傷 혹은 재실災實 장계狀啓였다. 세초는 원래 《실록》 편찬 과정에서 일어나는 협상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고, 연분재상 혹은 재실 장계는 재해 상황을 반영해 그해 세율을 확정하기 위해 각 지방에서 올리는 문서였다
--- p.149

이들이 서위의 애매한 진술을 조선 종이에 대한 권위 있는 비판인 양 서로 인용하는 모습은 이들에게 기대되는 학문적 엄정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이들이 내세운 원칙과 실제 지식 활동에 모순이 있거나, 이들이 주장한 ‘실사구시’의 핵심이 우리가 떠올리는 것과 다른 강조점을 가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 p.220

황해도와 같은 북부 지역 수령들은 닥이 자라지 않아 서울에서 사서 내는 비용 부담이 버겁다며 호소해왔고, 강원도조차 비슷한 호소를 했으며, 경기도는 서울 근처라 신역이 많은데 닥 공물에 따르는 역까지 더할 수는 없다고 호소했다. 닥 공물에 따르는 노역을 피하기 위해 닥밭을 태워버릴 정도로 심했던 백성의 반발은 충청도 같은 삼남 지역의 닥 공물도 위협했다
--- p.252

각종 승역 중 가장 심각한 침탈로 이야기되는 것이 지역紙役(종이 사역)이었다. …… 현종 대 전라도의 경우 “큰 사찰은 1년에 80여 권, 작은 사찰은 60여 권에 달하는 지물을 바치게 하자, 승려는 도망하고 뭇 사찰은 조용해졌다”고 한다
--- p.276

지방 군영과 감영에는 별도로 수십 석의 공사지가미公事紙價米가 책정되어 시가를 주고 종이를 구매하도록 되어 있고, 연분지처럼 더 고가인 종이 마련에는 재원이 별도로 책정되었다. 절에서 수세하는 경우 대부분 급가給價이지만 무가無價 항목도 종이별 분량이 정식화되어 있었다. 부세 문란이 심각했던 19세기에 이 합의와 어긋난 요구가 있긴 했지만, 승려들은 절 비우기, 격쟁, 상소 등 다양한 수단으로 저항했다
--- p.280

함경도에서는 수수 농사조차 힘들 듯한 산속에 종이와 미투리를 팔아 생활하는 장인마을이나 암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오랜 숙련이 필요한 제지 기술은 ‘거사’ 등으로 사찰과 관계를 맺는 동안 배워야 했고, …… 서로 오래 협력하며 실험해야 했을 것이다
--- p.287

송상과 사찰 제지 장인의 관계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 하지만 거래 목록이 있는 대부분의 개시에 종이는 빠지지 않았고, 개항기까지도 이는 변함이 없었다. 이들 사이의 직접적 관계가 사료에 등장한 것은 18세기 후반 지계 공인들의 호소에 의해서였다. 송상이 책문후시에서 거래하기 위해 사찰의 방물지 물량을 빼내 가서 자신들이 종이를 살 수 없으니 종이 밀무역을 금해달라는 청이었다
--- p.295

사찰에서 만든 고급 종이를 놓고 경쟁하며 종이를 구걸한 쪽은 조정을 뒤에 업은 공인과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송상이었고, 황해도로 제지 승려를 따라간 것도 공인들이었다. 공인들은 승려들이 흩어져서 종이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급작스럽게 삼남까지 먼 길을 오가며 납기를 맞춰야 했기 때문에 마음대로 부릴 수 없었고, ‘승려’들은 강압을 시도하는 상대를 피해 함께 절을 비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지의 총체적 이동, 전파 전략이 이토록 진화된 시점에서는, 돈이나 권력으로 큰소리를 칠 수 없었다
--- p.298

종이의 소비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던 18세기 말 종이가 귀해지기는커녕 종이의 고급화와 낭비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탄식이다. 방납의 폐해로 사찰이 문을 닫고 과거 시험지 한 장의 가격이 쌀 한 가마 값이 될 정도로 품귀 현상이 일어났던 17세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 p.304

조선 제지산업이 조선 후기에서 개항기까지 호황이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조선을 지배한 일본 식민지 당국도 이 상황을 빨리 알아차렸다. “한국지韓國紙의 중국으로의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규격을 정하고 품질을 개량하며 자금 대출 지원까지 하겠다는 계획이 1913년에 발표되었고, 요양 지역 조사가 이어졌다
--- p.309

닥종이가 기계식 펄프 종이로 대체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빠른 속도로 많은 양의 결과물을 생산하는 것이 중시된 기준에 따른 결과였다. 기계식 종이는 매끈한 촉감과 광택, 인쇄나 글쓰기, 제본을 견딜 강도의 기준은 맞추었지만, 수명은 아직도 시험 중이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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