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당시 창원군)은 30~40여 개 농촌마을만 있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 아스팔트 대로와 거대한 쇳덩이들이 들어섰다. 산업단지라는 국가의 ‘인위(人爲)’는 이곳 주민의 삶과 기억에도 크고 작은 발자취를 남기며 지역의 정체성을 흔들었다. 창원에서 현재를 사는 이들 대부분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다.
--- p.15 「고향에서 밀려난 사람들」중에서
창원산단의 탄생은 지역이 스스로 축적한 역량과 공단 유치 노력, 외국 기업의 판단, 이 모두를 고려한 정부 판단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최 박사는 시야를 좀 더 넓혀보길 주문했다.
--- p.27 「‘위대한 결단’ 아닌 복합 상호작용의 결과」중에서
중·고등학교가 없어 삼귀국민학교(귀곡 소재) 졸업생은 모두 마산으로 진학했다. 귀현 출신 고영조 시인은 “당시 중학교 등록금이 180원이었고, 웅남호 뱃삯은 1원 정도 했다”라며 “하도 배가 고프다 보니, 표를 부둣가에서 파는 빵하고 바꿔 먹고는 배 뒤에 몰래 밧줄을 내려 매달려가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 p.36 「‘섬 아닌 섬’」중에서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대규모 염전이 자리 잡았다. 나락모티 인근 창곡리(현 창곡산단)·덕정리(지금의 대원동) 사람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1945년 9월 9일 미국 해군이 찍은 항공사진을 보면, 광복 즈음 이곳에 넓은 염전이 펼쳐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p.62 「멱감고 게 줍던 모래톱의 추억」중에서
“상남역이 있는 곳은 면 소재지라 붐볐습니다. 역 남쪽으로 우체국·파출소·양복집·가구점에다 상남초등학교도 있었고, 상남극장이라고 극장도 있는 곳이었지요. 홍등가도 있었던 기억입니다.”
--- p.72 「사람 모여든 ‘핫스팟’」중에서
말뚝이 박힌 곳마다 어김없이 중장비가 들이닥쳤다. 대대로 부쳐 먹던 논마지기든 선조가 잠든 선영(先塋)이든 가리지 않았다. 농민들이 잃은 땅은 삶 그 자체였다. 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이주단지로 떠나면서 겪은 고통은 눈부신 도시 발전의 그림자로 남았다. “딱 우리 집 복판에 말뚝을 박더니…. 왜 그러는지 자세히 가르쳐주지도 않아요. 너희는 알 필요 없다고…. 제일 좋은 논도 평당 1300원, 밭은 200~300원. 그냥 강제수용이에요.”
--- p.84 「창원대로에 얽힌 이야기」중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이 논밭만 내주고 재산만 잃었을까. 도 작가는 부모님 이야기를 털어놨다. “농사꾼이던 아버지는 대원동으로 이사 가고 나서도 한동안 연덕 남은 땅에서 배추를 키워 리어카에 싣고 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셨고,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 p.102 「‘지금’이 앗아간 ‘그때’의 풍요」중에서
고 시인은 “초가집들은 힘이 없으니까 불도저가 밀어버리면 금세 붉은 바퀴 자국만 남았는데, 내게는 그 모습이 꼭 우리 영혼이 흘린 피 같았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우리 고모는 막내 사촌을 업고 불도저에 뛰어들었고, 또 어떤 사람은 운전수에게 똥물을 뿌렸다”라며 “지금 같았으면, 화염병이라도 던졌겠지만 그 당시 할 수 있는 저항의 전부였었다”라고 말했다.
--- p.115 「‘뿌리뽑힘’의 기억」중에서
당시 택지 안에 네 가구까지만 짓도록 허용됐는데, 원주민들이 임대를 내려고 지하에도 옥상에도 막 방을 지었거든요. 지금은 벌금 때리고 원상복구 명령 내리는데 옛날에는 바로 행동으로 해버렸던 겁니다. 밤에 다 지어 놓고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으면 못 부쉈기 때문에, 밤에 시멘트 바르고 나면 이불부터 갖다놨지요.”
--- p.131 「공장노동자 월세 받기 ‘특공작전’」중에서
윤 시인은 “1·2·3차에 걸쳐 차례로 토지를 수용하고 이주가 진행됐는데, 그때마다 서울에서 내려온 투기꾼들이 빗자루로 토지를 쓸어담듯 했다”라며 “보상받은 이주민의 30~40%는 투기꾼에게 넘겼을 것으로 추정한다”라고 말했다.
--- p.148 「정착 못 하고 투기꾼에 집터 넘긴 사정」중에서
“당시 중앙동 1번지, 지금 이마트 창원점 옆에 있는 곳이에요. 지도를 보면 주변 다른 곳이 전부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구획이 돼 있는데, 거기만 대각선으로 건물이 서 있어요. 어딘지 정확하진 않은데, 거기 사람들은 이미 이주를 와서 정착한 상태였죠. 그런데 그때 또 시에서 나가라 하는 상황이 된 거라.”
--- p.154 「자리 잡을 만하니 다시 나가라」중에서
“봉림동 이주단지는 40여 개 원주민 자연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향우회도 연덕·창곡·월림 등 다 따로 조직돼 있어. 마을 규모가 작았어도 완암처럼 아직까지 활발하게 모이는 곳이 있고, 동네가 컸어도 단합이 잘 안되는 곳이 있지. 아이들도 향우회에 가입시키고 다른 마을 사람 자녀들과 같이 명절에 공도 차고 했는데, 직접 겪은 추억이 없다 보니 나이를 먹으면서 관심이 옅어져 안타깝기도 해….”
--- p.167 「옛터 유적비에서 추억 더듬어」중에서
“삼원회관이 있는 상남동은 시에서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집결하는 곳인데 제대로 된 문화공간이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삼원회관을 원주민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창원의 역사와 개발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또 새로운 문화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이 되게끔 꾸려나가고 싶습니다.”
--- p.175 「원주민 염원 담은 보금자리 돌려드리고파」중에서
“석재상을 수소문하다 보니 큰 산 밑에 자연석을 무더기로 모아놓은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강원도까지 가서 찾는 중에 마음에 드는 돌이 딱 하나 있었는데, 63빌딩 표지석으로 세우려고 구두 계약된 돌이라고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창원기계공단 설립 과정에서 희생된 원주민들 사정, 유허비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한 끝에 마침내 돌을 구할 수 있었죠.”
--- p.180 「종 보고 돌 찾으러 방방곡곡에」중에서
학교 동기 900여 명 중 함께 입사한 사람만 120명이다. 이는 당시 삼성중공업이 창원기계공고와 결연하고 유능한 학생을 미리 선점했기 때문이었다. 실습 장비를 대주거나 졸업 전에 일본어 교육을 하는 등 신경을 쏟다가, 우수한 학생들을 우선 추천받았다. 김 시인은 “다니다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학교로 돌아와도 좋다는 조건으로 왔다”라며 “당시 공고 졸업생들이 잘 팔리던 때라 실제로 2번이든 3번이든 학교에서 취직시켜준 사례가 많았다”라고 말했다.
--- p.195 「첫 발을 디디다」중에서
“월급 많지 숙소 있지, 처음엔 너무 좋았는데 어느 순간 안 되겠는 거야. 하나둘 공부를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동기 98명 중 60명 이상이 전문대나 4년제 대학에 갔어요. 회사(대림자동차)에서 난리가 났죠. 저녁에 잔업을 좀 시켜야 하는데 말이야. 공장장이 학교 보내지 마라고 하게 되죠. 그래도 매주 토요일 되면 ‘과장님 조퇴 좀 시켜주세요’ 하고 안 해주면 월담을 하는 거죠. 그렇게 다음 주 월요일 시말서 쓰고…. 저는 한 40장쯤 썼을 거예요.”
--- p.204 「공장 불이 꺼지면 독서등이 켜지고」중에서
“‘집들이 선물 받은 화장지를 다 쓰면 떠난다’고 농담할 정도로 이사를 자주 했는데, 첫 입주 2년 뒤 17평으로 옮길 때만큼 감동적이었던 적이 없어요. 처음에는 ‘누가 저길 들어가나’ 하는 이야기도 돌았지만 형편 어려운 사람 처지에서는 반송아파트 말고 딱히 갈 곳도 없었죠. 타지에서 창원에 와 정착한 사람 중 절반은 다 반송아파트를 거쳐 갔다고 봐도 될 겁니다.”
--- p.209 「10평 공간, 내 집 마련의 꿈」중에서
이주단지로 쫓겨간 창원 원주민들과의 이질성은 더욱 짙어졌다. 생업을 잃고 기술도 없었던 원주민 대부분은 아파트가 늘어나도 겨우 지어 올린 이주단지 주택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용도 제한으로 묶여 상업 활동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들이 떠올리는 창원공단, 그리고 신도시는 자신들의 희생으로 쌓아 올린 성이었다.
--- p.213 「아파트 밖 원주민의 기억」중에서
“아주머니께 ‘이번 주 8명’이라고 말씀드리면 동경전자·동경실리콘·한국TC전자 등 회사 작업반장 전화번호를 주거든요. 그러면 대표들끼리 말을 맞춰서 지금 양덕파출소 옆에 있던 삼일다방, 금강다방에서 다 같이 놀고 그랬죠. 휴일에는 밀양 삼랑진 낙동강변 나들이도 갔고, 멀리는 하동 송림 같은 곳으로 1박 2일 단체여행도 떠났습니다.”
--- p.221 「분식집 아주머니가 양쪽 연결」중에서
‘창원공단의 기억’을 묻어두거나 추억거리로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의 기록으로 승화한 문학가들이 있었다. 공단 조성과 발전 과정에서 겪은 개인적이고도 특별한 경험들은 문학의 형태로 방출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들이었다. 원주민·기능공들의 기억이 풍화하는 동안에도 이들의 노력은 역사로 남았다.
--- p.228 「다시 묻는 ‘산단은 무엇인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