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는 경계하면서 스스럼없이 악수한다. 속으론 으르렁거리면서도 손잡고 눈웃음치는 것이 남자들의 속물근성이다. 준혜를 향한 감정은 공통분모일지라도 호인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이 진분수인가 생각해 보았다. 준정분의 준혜. 주일분의 준혜. 명확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자연수인가? 음수? 양수? 정수? 답은? 두 사람 다 자신이 없다. 오리무중이다. 웃음 제작공장. 그 사람은 아니지만, 찰나를 잘 이용한 사람이군. 준혜의 삼 년이 이 사람에 의해 웃음이 만들어졌나? 그 양이 적지만. 남자인 자기가 봐도 좋은 얼굴이다. 부모의 축복 중 최대의 것. 도시인답게 세련되고. 자신의 촌스러운 모습이 부끄럽다. 어차피 난 촌놈이야. 고향은 논밭도 적고 바다만 넓은 작은 바닷가. 이름난 항구도 아니다. 외국의 배도 드나들지 않고 작은 고기잡이배가 시계추처럼 드나드는 가난한 어촌. 세련이라는 말은 삼천리보다 먼 이야기. 그러나 준혜는 당신의 것도 아닌 듯 싶소이다. 추측이 바램에 의한 강박관념일지 모르지만.
같은 형제이지만 생각하는 것이 전혀 달라서 생활하는 것도 다르다. 그녀는 언니로서의 권위를 부리진 않았다. 동생의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간섭은 오히려 혜연을 날뛰게 하므로 무심히 지냈다. 무심함은 겉에 보이는 형식일 뿐 실제 생각은 항상 위태롭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핏줄이 주는 당연한 흐름이다. 농번기 휴가를 맞아 집에서 지내지 않고 혜연을 찾아갔다. 아예 살림을 차렸군. 혜연의 방에 걸린 남자의 옷을 보며 생각했다. 둘째 딸, 그 자리가 얼마나 서러운지 언니는 모르지. 질렸어. 어려서부터 항상 헌 것이었어. 언니의 헌 물건, 언니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랬던 때도 있었어. 헌 옷이 입기 싫어서. 네가 먼저 태어나지 그랬니. 그러나 이것은 운명인걸. 손이 귀한 집의 둘째 딸. 준혜도 혜연의 서러움을 느낄 수 있었으나 그녀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새 옷이 좋았지만, 혜연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마냥 즐거워하지 못했다. 사춘기를 맞이해서 혜연은 준혜가 질릴 정도로 반항했다.
겨울비가 으스스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날. 추워진 몸을 이끌고 혜연이 돌아왔다. 근영은 좁은 방에 버티고 있는 혜연의 그림을 보며 홀짝홀짝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연탄불이 꺼진 방은 춥다. 비에 젖은 혜연의 몸이 견디기에 한기뿐인 방이 송구하다. 반가움과 놀람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서둘러 연기를 마시며 연탄을 피웠다. 매운 연기가 코, 입으로 들어오는데도 매운 줄 모르겠다. 얼마 만인가?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 일주일 훨씬 지났다. 어디에 있었느냐는 물음 따위는 의미 없는 말장난이기에 혜연의 젖은 몸이 말라주기를 기다렸다. 돌아온 사실만 감사하고 싶다. 그동안의 행적이 내게 무슨 이득이 되리오. 알아서 병이 되는 일을 알려는 바보는 되지 말자. 혜연은 보채지 않으면 자기 쪽에서 토해내는 버릇이 있으니 기다리기로 했다. 침묵에 지독히 약한 혜연의 성격을 근영은 알았다. 가만 두면 스스로 터지는.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뱉어버리는 위험하고 가여운 인내를.
혜연은 추운 거리를 헤맸다. 아이를 찾을 길이 없다. 거짓말을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 설상가상 기준이조차 달라고 하니 어쩌란 말인가? 언니 탓이다. 언니의 남자, 언니 탓, 그 자식, 그녀는 서둘러 빨간 불빛이 돌고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골목 끝에서 헌병들에게 동운의 거처를 손으로 가리켰다. 헌병들과 같이 들어설 배짱은 없다. 남의 눈에 뜨일세라 바쁘게 돌아섰다. 골목 어귀에서 동운과 마주쳤다. 비밀이란 없는 것이야. 혜연은 포기하고 웃고 동운의 눈이 불안하게 웃음을 잡았다. 혜연은 동운을 따라 갈 수 없어 천천히 걸었다. 동운의 집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헌병 두 사람에게 붙들린 채 준정이 나타났다. 혜연은 눈을 감았고 동운은 늦었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준정의 새 거처를 정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혜연은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혜연을 본 준정이 의외로 빙그레 웃었다. 혜연은 고개를 떨구고 동운은 묵묵히 그녀의 목덜미를 응시했다. 목선이 고운 편이구나.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되는구나. 혜연이 잠깐 비틀거렸고 동운이 얼른 부축했다. 이렇게 꼬이는구나.
나는 왜 이럴까. 언니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었을까. 좋아하진 않았지만 미워하지 않았어. 아이의 일부터. 기준은 좋은 녀석이었어. 하지만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녀석이 두려웠어. 언니를 불행하게 한 것은 고의가 아니야. 엄마, 전혀 고의가 아녜요. 혜연인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 아이를 찾을 수 없고, 누구에게 용서를 받을 수 없는 행동이 눈물을 만들었다. 준정이 의례적으로라도 반가워할 줄 알았다. 내가 고발한 것을 알고 있구나. 박 교수를 찾아가자. 비열한 포근함에 안겨 위로받고 싶다. 근영이 생각나자 가슴이 아프다. 나를 떠날 준비를 하는 걸까. 잘 지껄이지 않는 침묵이 이렇게 두려울 줄은 전혀 뜻밖이다. 어떤 경우도 떠나지 않겠다 했는데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박 교수의 너절한 위선에 나를 던져야겠다. 몇 번 드나든 곳이지만 서먹서먹하다. 언제나 당당하게 들어선 곳인데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인다. 낡은 빌딩의 좁은 사무실. 그곳에서 박 교수의 간접적인 구애를 농담으로 물리쳤다. 말소리가 들려온다. 여자 목소리. 좀처럼 자신의 사무실에 여자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그의 의견이었는데 누구일까? 혜연은 촉각이 곤두선다. 그의 음흉이 어떤 노리개라도 구한 것일까?
가까스로 혜연을 붙들었다. 초점이 도망가버린 혜연의 눈동자가 보인다. 근영은 절망했다. 며칠 연거푸 그런 행동이 반복되었다. 죽음보다 힘든 고통. 차라리 죽어버리면 세월 따라 지워지기라도 하지만. 멀뚱거리기만 하는 감정 없는 생명. 근영은 술은 좋은 것이구나 생각했다. 어렸을 때의 어떤 여자가 생각났다. 오동추. 그녀의 이름이다. 오동동 타령이란 노래를 유난히 잘 부르는 여자라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 허벅지가 보이는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밥을 얻어먹고 배가 부르면 양지바른 곳에 쭈그리고 앉아 오동동 타령을 불렀다. 언제나 웃었다. 가끔 여자 앞에 앉아 구경했다.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곁에 앉았다. 편안했다. 초겨울이 다가왔다. 양지바른 곳에서 속옷을 헤집으며 이를 잡아 죽이고 있다. 옆에서 같이 행동했다. 눈이 나쁜 할머니 눈에 작은 이는 보이지 않고, 며느리가 미운 시어머니는 손자도 가끔 성가신 존재다. 그녀가 웃으면 덩달아 웃었다. 겨울이 깊어지자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근영이는 다리 밑에서 얼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 울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것을 전쟁 때문이라 들었다. 그녀의 사타구니에서 재미를 본 병사가 많았다고 들었다. 그 뜻을 안 것은 그녀가 죽은 훨씬 후의 일이다. 죽은 그녀의 사타구니를 개가 핥고 있었다는 소문도 들렸으나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 여자와 같이 되다니. 그렇게 혜연을 버려둘 수는 없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