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더화이가 누구인가?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에 중공 지원군 총사령관으로서, 압록강 변까지 밀고 올라온 미군과 국방군을 다시 서울 남쪽으로 밀어붙이고 결국 정전협정을 이끌어낸 후 개선장군으로 베이징으로 귀국한 사람이다. 그 후 국방부 부장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국무원 부총리 등을 역임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59년 장시성(江西省) 루산(盧山)에서 마오쩌동(毛澤東)에게 ‘대약진운동’ 중에 발생한 문제점을 직언한 후 ‘우파 반혁명 집단 두목’, ‘소련 첩자’로 몰려서 숙청당했다. 그리고 1966년, 이른바 ‘문화대혁명’ 발발 후에는 전담 조사조(專案組)와 홍위병들에게 심문과 학대, 폭행을 당하다 1974년 11월 29일, 구금 상태로 베이징의 군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은 후 심신이 파괴된 상태로 죽었다.
--- p.7
『펑더화이 자술』은, 이른바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후에 펑더화이가 한편으로는 홍위병들에 의해 공개 비판대회에 끌려 나가 학대와 폭행을 당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짜 맞추기 의도를 갖고 심문을 진행한 전담 조사조의 강압적 요구에 따라 백지 위에 수차례 작성했던 진술서 내용을 ‘문혁’이 끝난 후 펑더화이의 명예가 회복된 후에 출간한 책이었다. 따라서 (대부분 전기류 책의 내용과는 달리) 그 내용에 한 치의 미화나 과장 같은 게 있을 수 없을 것이니 중공 내부의 실제 상황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매우 좋은 자료일 것이었다.
--- p.7~8
중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는 혁명을 위해 열정, 헌신, 희생을 바친 이들이 많았지만, 또 다른 한편에는 그 같은 역사 격랑 속에서 권력의 단맛만 빨고 좇으면서 동지들의 열정과 희생의 결과를 독차지한 이들, 동물적인 권력 본능과 감각으로 부화뇌동, 심지어 배신, 모함까지 한 부류들까지 함께 뒤얽혀 있다. 역사 기록은 끝까지 살아남은 승자의 입장과 관점에서 기록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중공 당사(?史)에서도 진하게 감지된다. 필자는 중국 내 자료들 안에서 혁명과 권력투쟁과 얽히고설킨 인간들과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자기 검열에 길들여진 듯한 이야기들을 냉정하게 보고자 노력했다. 그 내용 범위와 대상 시기는 1921년 중공 창당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그리고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최근 시기까지로 했다.
--- p.9
필자는 마오쩌동이 이른바 ‘문화대혁명’이라 작명한 음모를 기획·발동한 이유와 동기를, 자신이 밀어붙인 ‘대약진운동’이 대실패하면서 초래된 경제 파탄과 대기근의 책임으로 인해 자신의 당내 권력 기반을 위협받게 되었기 때문이라 보았다. 그리고 ‘문혁’ 발동을 위한 사전공작으로 린뱌오(林彪)와 연합하여 군부의 실력자인 국방부장 펑화이를 제거했다고 본다. 이후 마오는 ‘문혁’을 발동하고, 홍위병을 선동하여 자신의 독재체제 구축에 장애가 될 인물들을 차례대로 숙청·제거한 후 당을 자신의 사당(私黨)으로 전락시켰다. 또한, 1949년 정권 출범 당시에 마오가 스스로 채택했고 폐기했던 소위 ‘신민주주의 단계’가 마오가 죽은 후, 개혁·개방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사회주의 초급 단계’, ‘시장 사회주의’ 등의 명칭으로 부활되었다고 본다.
--- p.9~10
마오쩌동은 탁월한 전략가였으나, 동시에 고집과 오기가 매우 강했다. 자신의 과오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고, 또한 복수심이 매우 강했다. 단, 마오의 행동 전략은 자신의 권력 기반이 얼마나 공고한가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즉, 자신의 권력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다고 느낄 경우에는 상당한 정도로 양보와 타협도 했다. 그의 사상과 전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군중노선’과 ‘실사구시’는 그 같은 실천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측면에서 마오의 성격 특성과 본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는 1959년 여름 장시성 루산에서 개최된 중공중앙정치국 확대회의(1959.7.2∼8.1) 이후였다. 마오는 이 회의에서 대약진에 대해 비판 의견을 제출한 펑더화이를 숙청했다. 짐작컨대 그 이유와 동기는 대약진운동과 합작화, 인민공사 운동으로 인한 부작용과 그에 따른 경제정책 실패와 대기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가 어렵고, 자신의 당내 권위와 권력이 흔들리고 위협받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 p.187
한편 린뱌오는 류샤오치의 1월 27일 대회 보고 발언 중 곁눈질로 은밀하게 마오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마오가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의 발언 내용에 대해 불만스럽게 느끼는 기색을 감지했다. 또한 이어진 마오의 발언을 들으면서 그가 자기 입으로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짐작하고 있었다. 마오는 “구상의 방향과 틀은 옳았다. 다만, 일련의 구체적이고 적합한 정책과 방침이 부족했다. 이것은 경험 부족 때문이며 동시에 하층 간부들이 과장, 허위 보고하고 중앙을 속였기 때문이다”라고 발언하고 싶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린뱌오는 바로 이 순간이 정치적으로 투기할 절호의 기회임을 직감했다. 류샤오치 이후 발언자들의 발언 후에 린뱌오가 단상에 올라가 발언을 시작했다.
--- p.233
문화대혁명에 대한 책임과 비난은 응당 전적으로 마오쩌동의 몫이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의 중국 연구자들 중에서도 이 점에 대해서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국 내 연구자들에 대해서는 공식 검열 외에도 자기검열까지 거쳐야 하는 체제 내에서 당할 수 있는 위험을 피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아직까지도 문혁과 관련하여 무언가 긍정적인 측면이 있을 거라는 관점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듯한 표현과 발언을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 p.236
한편, 홍위병 청년들을 대상으로 추진한 농산촌 하방과 상산하향 운동의 실제 진행 과정은, 마오쩌동을 포함한 중공중앙의 간부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문혁의 중견 세력이던 이들 지식 청년(知?) 홍위병들이 내륙지구와 변방지구 농촌 기층 단위로 하방된 후에 그곳 인민들의 열악한 상황과 생활조건 속에서 공산당의 추상적인 혁명 이데올로기 구호들이 구체적 실천 층차에서는 매우 거칠고 설익은 것이어서 실제에 적용할 수 없는 매우 공허한 것이라는, 즉 기층의 실제 실천 과정에서 드러나는 차이를 체득·확인하게 되면서 한때 왕성하게 타올랐던 정열이 식고 환상이 깨지는 체험과 각성을 하게 된다.
--- p.265쪽
마오쩌동은 1975년 4월 18일, 중국을 방문한 북한의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 말을 한 지 약 1년 5개월 만에 사망했다) “현재 저우언라이 총리도 캉셩과 류보청 동지도 모두 병상에 있습니다. 나는 올해 82세이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배석한 덩샤오핑을 가리키며) 정치에 대해서는 저 사람과 이야기하면 됩니다. 그는 어떻게 전투를 치를지, 또 어떻게 수정주의에 맞서 싸울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홍위병들에게 숙청당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복권되었습니다.”
--- p.292~293
1978년 말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결정은 지난 세기 사회주의 진영 국가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양대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또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11년 뒤인 1989년에 발생한 ‘베를린장벽 붕괴’이다. 소련과 동유럽권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공산당 정권 몰락의 시작을 예고한 베를린장벽 붕괴와 중공의 개혁·개방 결정은, 지령성 계획경제 체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혁과 개방을 추구한 중국공산당과, 제때에 선택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파국을 맞은 소련 및 동유럽권 국가 공산당 정권의 대조적인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는 중공이 홍보 차원에서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실천 과정에서 노출된 사회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인식·인정하고, 적시에 개혁과 개방을 추구한 중공과 그렇게 하지 못했던 소공(蘇共)과 동유럽권 공산당 정권이 겪은 결과의 차이를 강조한 것이다.
--- p.346~347
천샤오루가 2013년 8월 20일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위해 마음속의 짐을 스스로 털어버리고 싶다”라는 말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인터넷에 게시했다. 당시 그의 나이 67세였다. “나는 문혁 시기에 베이징 8중학(北京八中) 학생 지도자(?袖)와 학교 혁명위원회 주임 역할을 한 자로서 당시에 비판대회(批斗)에 끌려 나가고, 노동개조를 당한 학교 당위원회 서기와 교장선생님, 동학(同?), 그리고 상처받은 모든 분들에게 직접적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 p.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