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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라, 혹은 앉을래

현대시학 시인선-116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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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5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72g | 125*188*20mm
ISBN13 9791192079608
ISBN10 1192079604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잠들지 못하는 그대를 위해
쇼핑을 한다

국지성 소나기가 온다는
날씨를 읽고 포장을 할까

원 플러스 원의
여름을 마지막 세일 한단다
환하게 웃던
목덜미가 문득, 떠올라
그것도 함께 장바구니에 담았다

같이 했던 날들이 빼곡하게
사은품으로 따라왔다

진초록 리본을 만들어
가을로 가는 길에 매달아 보면
그대의 구월이 빠른 배송으로
내일쯤 도착하겠지

‘주문이 완료되었습니다’
---「주문 완료」중에서

기억이 그네를 타는 밤
거실문이 너무 멀었어요
땀방울들이 히죽히죽
잘도 웃더군요
얄밉지만 어쩔 수 없어요
봄이 오고 있는 시간 사이에
이백 가지나 되는 바이러스가
내 몸을 탐내니
그저 내어 줄 수밖에요
기어이 뜨거운 마음까지 내줘야
사라질 당신을 앓고 난 후
---「감기몸살」중에서

사랑해
사라졌다 불빛에 새하얗게 반짝거렸던 그곳이
나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변해 있었다 벌레 먹은 잎사귀 몇 개가
바람과 신경전 중, 힘없이 뚝 떨어졌다 부질없이 걸어서 이곳에 왔다
네 살결 같던 꽃잎이 흐드러지고
남모르게 몇 번이나 그렇게 멀미 나던 저녁
번호판 없는 자동차들이 손짓을 한다 사랑해,
오래전에 잊었을 그 말 벌금 고지서를 가슴에 붙인 가여운 저녁이
내 발목을 붙잡고 놓질 않아
제기랄,
더 이상 불빛에 반짝거릴 하얗게 웃는 네가 없다
---「이제 그만」중에서

산꼭대기에 수십 개의 마음이
빼곡하게 걸려있다

비우기로 했던, 비우고자 했으나 비우지 못한

그녀 스스로 벙어리가 되었다 어느 날부턴가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이 상처가 되어
흉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흉측스러워질까 두려워 성형수술도
잊어버린 동화는 늘 부분생략이었다

쉽게 꺼져버릴 성냥개비 같은 이야기
매일 밤 자정마다
호박마차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는 도돌이표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고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랬다

오늘도 비워내지 못한 마음이
얼레빗 같은 산마루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있다
껴안으며 파고들며 그녀, 우후후―
밤새도록 웅얼거린다
---「벙어리 금촌댁」중에서

아파트 앞 버스정류장이 갑자기 부산해진 지난 겨울
안젤라 너를 만났어 얄미울 정도로 도도한 모습으로 식빵을 굽고 있는
윤기 가득한 너의 탐스러운 꼬리는 연이어 나를 유혹했지
눈이 마주친 너는 ‘앉을래’ 말하듯 자리를 비켜앉았어
기억나니? 따뜻한 온기가 취기처럼 훅- 올라와 귀까지 빨개지던 날을
가만히 웃는 너는 너무 안전해 보였지
그날부터 네 옆에 많은 사람이 앉았다 가기 시작했어
눈 오는 날은 눈싸움도 하고 햇살 가득한 날은
그에 맞는 온도의 자리를, 특히 아이들이 좋아했지
그렇게 너는 안젤라에서 앉을래가 되었어
그런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어
우린 모두 아찔했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 호들갑스러운 나날을 견디며
기다렸어 기다리다 그렇게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겨울비가 사나흘 내려 체취마저 봄바람에 날아갔어
봄까치꽃, 안젤라로 돌아온 네가 지천으로 흩어지고
---「앉을래 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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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정량미 시인의 시편들은 “잠깐만 내 곁에 앉아보아요”(「고해苦海」)라고 말하거나 “이리로 들어와 봐요”(「낯선 풍경에선 왜 그리움이 생길까」)라고 가만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곁을 내준다. 사랑의 품에 들어오라고 부르고 이끈다. 혹은 함께 했던 날들의 기억을 다감하게 환기한다. 기억 속에는 순수, 꿈, 뛰는 심장이 있고, ‘첫’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웃는다. 비록 일상은 반복되지만 그 가운데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삶의 희망을 찾고 노래하고, 스스로 혹은 함께 화사해지려고 한다. “달력의 첫 장 같은 마음”(「연軟하다」)이 시행 속에 설레고 빛나서 더욱 푸근한 시집이다.
-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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