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길을 먼저 닦고 그 위에 상업이 길을 열면 교역의 탄탄대로가 열린다네!”
“장사꾼의 흥정하던 버릇이 있어 그러하니, 내가 실수했다면 용서를 구하겠소. 기예단을 이끌고 고구려 방방곡곡 장터를 순례하며 먹고사는 것 같은데, 나를 따라 저 서역까지 가서 크게 한판 벌여보는 것은 어떠한지 묻고 싶은 것이오. 그 대가는 이 고구려 땅에서 버는 수입에 열 배를 보장하겠소.”
조환은 말끝에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말에 사내가 경계심을 풀고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서역이라?열 배를 보장하겠다고 했소?”
사내는 다시 한 번 확인이라도 하듯 되물었다.
--- p.16
“네가 담덕이냐? 도무지 병법도 모르는 자가 아닌가? 퇴로를 막아버리면 더욱 기가 살아 죽기로 싸우는 것을 모르느냐? 적의 가운데로 진격하라! 죽기로 싸워 포위망을 뚫어라!”
아신은 병사들을 향해 목이 쉬도록 외쳤다.
“우하하하하! 백제왕 아신은 들어라! 도망치는 적을 애써 쫓지는 않겠다. 오늘은 그대의 얼굴을 보고 싶어 접견하러 나왔을 뿐이다.”
담덕은 깃발로 신호를 보내 중군을 좌우로 갈라지게 했다.
--- p.107
“올해는 비가 적게 내려 풀들이 제대로 자라지 않았다. 양떼들의 번식이 크게 줄어 겨울날 양식이 걱정이다. 이러한 때에 고구려왕 담덕이 백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하니, 아직우리는 안심해도 될 것 같다. 고구려 변경마을을 급습해 양식을 구해 오는 길밖에 없다. 자, 백마와 청우의 피를 이어받은군사들이여! 우리 비려의 철기군이여! 나를따르라!”
야율사단은 비려의 군사를 출동시켰다
--- p.124
바로 그때였다.자작나무숲의 비탈길로 데굴데굴 바위가 구르듯 달려 내려오는 짐승이 한 마리 있었다. 갈색털이 곤두선 채 질풍처럼 내닫는 것이 꼭 장마철 산사태로 바윗덩어리가 굴러내리는 듯했는데, 다름 아닌 불곰이었다. 활을 든 군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그때마다 쿵쿵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흙덩어리가 튀어올랐다. 겨울잠을 자려다 꽹과리와 징 소리에 깜짝 놀라 동굴에서 튀어나왔는지,구르듯 달리는 불곰이 네 발을 재게 놀릴 때마다 살집 뭉친 등허리의 근육이 육감 좋게 꿈틀거렸다.
--- p.171
“우리 탁발씨와 고씨가 동시에 모용씨의 옆구리를 찔러보자는 얘긴데”
“흐음, 양수겸장이라? 저 옛날 한나라와 초나라의 전쟁을 놀이로 꾸민 것이 장기 아니오? 참으로 재미있구먼! 우리 탁발씨와 고씨가 동시에 모용씨의 옆구리를 찔러보자는 얘긴데, 야비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 과히 나쁜 전략 같지는 않구먼…….”
탁발규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p.177
‘방법이없다. 아,우리 백제는 이대로 무너지는가?’
사두는 이제 백제를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어떻게 해서든 담덕을 사로잡아, 그의 목숨을 담보로 고구려군이 조용히 물러가게 만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 p.278
“아신, 그대는 우리 고구려의 포로가 되었느니라. 포로는 노예나 다름이없다. 앞으로 짐의 노예가 되겠는가?”
“네, 지금부터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나이다.”
아신이 말하는 ‘노객’은 노예이면서 동시에 신하를 이르는 말이었다.
“지금부터 그대는 짐의 영원한 노객이 되었다. 이후부터 다시는 우리 고구려의 남변을 칠 생각을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리도록 하라. 따로 우리 고구려 제장들이 전리품을 요구할 것이니,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조속히 생구生口와 물자들을 마련토록 하라.”
담덕은 그것으로 20여 년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포한을 풀기로 했다.
--- p.287
“나라도 큰 꿈을 가지고 발전시켜야 대국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작은 꿈을 가지면 소인이 되고, 큰 꿈을 가지면 대인이 되는 법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로 큰 꿈을 가지고 발전시켜야 대국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대국이 된다는 것은 땅만 크고 백성이 많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름지기 대국은 대국다워야 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단군왕검 시대부터 내려온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 정신을 살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p.295
“아, 이제 나도 늙었군! 이 추운 날 원정에 나선 것은 아무래도무리였어.’
모용수는 후회를 거듭하면서 앞서 달리는 기마대를 따라잡기 위해 말채찍을 정신없이 휘둘렀다. 그와 보조를 맞추어 모용보도 말머리를 나란히하고 따라붙었다. 모용수의 질주하던 애마가 다리를 삐끗하더니 순간적으로 앞다리를 꺾었다. 그 바람에 모용수 역시 허공에 붕 떠올랐다 땅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 p.340
모용수는 자신의 애마에게 다가가 갈기를 쓰다듬어주었다. 갈기는 땀으로 흠씬 젖어 있었고, 두눈에선 찐득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래,너도 너무 많은 전장을 누볐다.”
모용수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애마의 목을 단칼에 쳤다.순간, 몸뚱어리에서 떨어져나간 말머리가 혀를 쑥 내민 채 헐떡거렸고, 절단된 목줄기에서는 시뻘건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올라왔다. 천천히 다가가 말머리를 손으로 들어올린 모용수는 그때까지 멀뚱하게 뜨고 있던 두 눈을 감겨주었다. 그의 눈에도 물기가 어렸다.
--- p.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