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가서 농사나 지어라’라든가 ‘나도 시골 가서 농사나 지어야겠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농부는 경제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문턱이 낮은 직업이다. 농사지을 땅만 있으면 거대 자본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배워야 하는 고급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특수작물, 과수 등 일부는 배우기 매우 어려운 기술이 필요할 수 있다), 감독관이나 상사 밑에서 눈치 보며 일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심으면 적든 많든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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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기다림과 포기를 익히게 한다.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일이다. 서둘러도, 악착같이 덤벼들어도 그렇다. 자연의 힘, 시간의 힘은 도전의 대상이 아니라 순응하고 따라야 할 섭리다. (중략) 삶이란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온전히 내 손으로 (조직의 힘이 아닌) 이룰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명상과 깨달음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농사를 짓는 내 어깨와 머리 위로 먼지처럼 내려앉는다. 그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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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억 원의 대출을 얻어 딸기 재배 시설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연간 1억 원의 매출에 재배에 들어가는 경비와 인건비, 대출이자를 내고 순수익이 대략 3천만 원이라고 할 때, 한 푼도 안 쓰면서 대출을 갚는다면 꼬박 7년 정도가 걸린다. 시설이 태풍에 날아가거나, 폭우나 가뭄, 폭설 같은 자연재해나 병충해, 기타 다른 이유로 딸기 농사를 망쳐서는 안 된다. (중략) 한두 해만 농사를 망쳐도 대출 상환 시기는 10년 이상으로 쭉쭉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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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성 있는 농지가 첫 번째다. 내 땅이든 임대한 땅이든 5년, 10년 안정적으로 사용할 땅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적절한 농기계와 시설을 갖고 있어야 한다. (중략) 사람이 삽질하는 데 일주일이 걸리는 일이라면, 관리기는 하루가 걸리고, 트랙터는 한 시간이면 끝낸다. 천 평 농사에 웬 트랙터냐고 관리기만 사용했는데, 결국 작년에 15년쯤 된 중고 트랙터를 한 대 구입했다. ‘돌쇠’라고 이름 붙인 늙다리 트랙터는 정말이지 일주일 치 일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사실 우리 부부는 돌쇠에게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이게 뭐라고 우리의 수고를 엄청나게 덜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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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아이 키우고 싶다는 젊은 부모들이 종종 있는데, 나는 전적으로 그 생각에 동의한다. 자연과 접하는 시간이 많고 도시의 지나친 자극에서 멀어진다는 점, 사교육의 과잉에서 보호된다는 점 등에서 확실히 좋다. 특히 학부모 커뮤니티를 통해 자극받는 경우가 줄기 때문에 부모 역시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와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다. 이런 학원에 보내야 한다, 이걸 안 배우면 큰일 난다는 식으로 부모의 불안을 부추기는 목소리가 거의 없다. 지역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뭘 가르치려고 해도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 학원 외에 딱히 특별한 학원 같은 것도 없다. 또래 아이들이 있는 동네에서 산다면 방과 후에 아이가 혼자 시간을 보낼까 걱정할 필요 없이 알아서 잘 어울려 노는 편이다. 우리 아이들은 강화도에서 어린이집, 유치원부터 다니기 시작해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취향과 감수성만큼은 약간 독특한 편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하고 순수하며 긍정적이어서 좋다. 나는 시골에서 아이 키운 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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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귀촌을 꿈꾼다면 시골살이의 장점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단점과 수용 가능한 ‘불편함’에 대한 체험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의 불편함까지 감수할 수 있을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가족과 함께 귀촌할 거라면 가족 구성원 각각이 겪게 될 일들을 세심하게 가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시골살이에 대한 환상이 클수록 실망도 커진다. 그래서 내게 시골살이가 어떠냐고 묻는다면 대개 이렇게 답한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시골이라고 별다를 거 없어. 조용하고 공기 좋은데, 불편한 게 아주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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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 초기에는 실수도 많이 했다. 완숙 토마토를 농산물용 종이박스에 담아서 보냈더니 80%가 터져서 도착했다. 놓는 방식이나 완충재를 잘 고민해서 아이스박스에 담아 보냈어야 했는데 경험이 부족해서 생긴 사고였다. 어떤 물건이든 택배 발송 후에는 한두 번 정도 확인 문자를 보내고 문제를 발견하면 고객이 전화하기 전에 먼저 연락을 취한다. 간혹 농부들 가운데는 고객이 이해해주기를 바라면서 문제를 슬쩍 눙치고 넘기려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태도야말로 고객과의 신뢰를 깨는 것이다. 내가 보낸 농산물, 내가 보인 태도가 고객에게는 친환경 농산물과 친환경 농부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돈을 받고 물건을 판다는 생각이 아니라 ‘좋은 농산물과 기분 좋은 경험’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 우리 농장의 판매 원칙이다.
--- p.120
‘어떤 땅이 좋은 땅이냐’라고 내게 묻는다면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지만 일단 ‘풀이 나지 않는 땅은 죽은 땅’이라는 답부터 내놓을 것이다. 흙의 특성과 조건에 따라 풀은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고 나는 풀의 종류도 제각각 다르지만, 풀이 하나도 나지 않는 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는 죽은 땅일 확률이 높다. 다른 식물의 발아와 성장을 억제하는 물질을 내뿜는 소나무 숲이라면 모를까.
--- p.150
도시인의 먹을거리는 어디서 오는가. 이마트와 쿠팡과 편의점에서 오는가. 가공이든, 생물이든 그 먹을거리는 농촌에서 길러낸 것들이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산과 숲, 논과 밭에는 도시에서 생존할 수 없는 다양한 생명이 살아가고 있다. 농부의 후손인 우리는, 도시에 살면서도 왠지 모를 이끌림을 느낀다. 흙을 밟고 풀냄새를 맡으며 내 손으로 생명을 키우고 싶은 욕망. 우리 안의 농부 DNA는 ‘주말농장’과 ‘텃밭 농사’를 위해 기꺼이 수고를 감수하도록 이끈다. 하다못해 베란다 텃밭, 옥상 텃밭에라도 무언가를 심고 키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 p.219
“이제 농사는 그만두고 양봉할 거야?”
가끔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나는 농사를 그만두고 양봉을 할 생각이 아니라, 농사를 더 잘하기 위해 양봉을 배우는 중이다. 친환경 농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생태계다. 게다가 우리 농장은 관행농지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섬 같은 존재여서 더욱 그렇다. 이 작은 생태계를 제대로 가꾸고 유지하기 위해 꿀벌들을 모셔오기로 한 것이다.
--- p.231
귀농해서 성공한 농부가 되고 싶어요. 뭐가 필요할까요? 책이라서 점잖게 얘기하고 싶은데, 그냥 탁 까놓고 말할게요. 돈이 필요해요. 내 돈이 없으면 부모님의 땅이라도 필요합니다. 귀농한다고 다 성공하는 농부가 되는 게 아니에요. 정말 어렵게 어렵게 성공한 농부들이 있는데, 그분들 보면 농사가 아니었어도 성공했겠다 싶을 만큼 열심히 하셨죠. 귀농 몇 년 만에 억대 매출, 이런 거는 부모님 땅이 적잖이 있거나 시설에 투자할 만한 쌈짓돈이 있는 케이스들이에요.
--- p.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