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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희 시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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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5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176쪽 | 258g | 128*210*20mm
ISBN13 9791168150492
ISBN10 1168150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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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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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은 언제나 검은 계절에 내렸다
눈이 많이 내려 하얗게 하나 되어 보라고
세상은 검어가지만
세기말엔 눈마저 흡족히 내리지 않는다

성급히 눈발이 멈춘 휴전선
철책을 넘는 삭풍이 철판 찢는 소릴 지르는
철원 평야
서북쪽 산마루를 넘어온
허기진 눈까마귀떼 내려앉는다

지금 휴전선에선
언 땅을 딛고선 병사들이
여기까지 지켜온 불안한 평화가
동해를 입을세라
두 눈을 부릅뜨고 발을 구르며
총을 들고 있다
---「겨울 휴전선」중에서

숨 쉬는 것들의 피돌기가 순조로운 이 나라
같은 핏줄 간 잔인한 전쟁 시작되었다
‘1129일’ 간 쌈박질하다 지쳐
뜨거운 총질을 멈추자던 약속이
반백 년 지나 백 년으로 가는데
이 순간도 남북의 얼간이 병정들이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며
억새숲에 숨어 조준선 정렬을 하고 있다

군번 없는 병사 무덤 비목도
흙이 되어버린 비무장 지대
녹이 슬수록 날카로워지는 가시 철책
흙을 뒤집어쓰고 밟아줄 주인만을 기다리는 지뢰들
이 봄도 숨을 쉬고 있는 위선의 비무장지대
회색 전운이 진종일 감도는
조국 한반도는 극동 아세아 방아틀 뭉치다
---「끝나지 않은 전쟁」중에서

는개 내리는 날
산길을 더듬어 고대산*에 오르니
길이 끊겼다

날개 젖은 새들이 날아가는 곳을 바라보니
북녘 산하다

허허로운 내리막길에서
기적 소리 듣는다

통일호 열차가
신탄리*에서
원산까지 가겠다고
길을 열어 달라고
고함치는 소리다

새들은
길이 끊긴 곳에서도
길을 열 줄 안다

이 땅엔
끊어진 철길이 있다

* 고대산 :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에 위치한 830m, 정상에서 철원평야가 보임
* 신탄리 : 경원선 철도 중단점
---「길 2」중에서

6월이 오면
전쟁이 또 일어날 것만 같아
올해도 하얀 구급약 몇 알과
라면 몇 봉지를
여분으로 준비한다
---「6월」중에서

새털구름 노닐다 멈춘 북삼리 민둥산
서리 맞은 수수밭가 곳집 하나 외롭다
기넘도록 울어대던 개개비는 날아가고
갯여울 소리 청랭한데
가을걷이 농부 내외 짧은 해가 아쉽다

둔밭나루* 맑은 물에 등 부은 발 담그니
북에서 온 물도 여기오면 내 물인 것을...
큰물에 씻긴
임진강 백사장
물새들 노래 있어 옛날 같은데
아 - 언제나 보이는 건 새들이나 넘나드는
아스라한 휴전선

* 둔밭屯田나루 : 연천군 왕징면 북삼리에 있는 옛 나루터
---「변방의 비가」중에서

하늘이 너무 맑아
할 말이 없습니다

차라리
하얀 구절초 꽃다발 같은
구름 한 점
떠 있으면 좋겠습니다

헤 넓은 들판
꿈을 이룬 나락들은
종갓집 새댁보다도 다소곳합니다

무논을 헤집던
농부 같은 하얀 새들은
눈바람이 두려워 남녘으로 날아가고
아스라한 북녘 하늘에서
기러기 떼 날아들어
우물 같은 하늘에 엽서를 띄웁니다

세상에 새들은 가고 싶은 곳 가고 오는데
걸어서 갈 수 없는 산하가 있습니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가 될 수 없어 한 서리는 이 가을에
하늘이 너무 맑아
눈시울이 젖습니다
---「변방에서 ― 휴전선」중에서

한겨울 태양은 뒷걸음질하면서도
비무장지대 마른 풀섶에
불시라도 던질 듯 이글거리다
야멸찬 강추위에 굴복하고
무명지 같은 산마루에서 머뭇거린다

외로운 망루에서 적진을 쏘아보는
초병의 매서운 눈초리에
갈대도 서걱이지 못하는 전선은
차가운 석양을 받아
저승의 오후 같다

지금 서 있는 곳은
당겨진 활시위,
남방한계선이다

시린 눈물을 말리며
돌아서야 한다

파리하게 식어가는 철책을
어린 병사에 맡기고……
---「남방한계선에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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