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이 바로 이 책 전체를 통해 추구할 내용이지만, 우선 이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유전자와 함께 이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여건이 유전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진부하리만큼 평범한 이 사실이 학자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우리 모두의 눈과 귀도 가리고 있다. 이러한 과오는 유전자가 정보를 담고 있다고 말하는 데서 이미 나타난다. 마치 상자가 구슬을 담고 있듯이 DNA 분자가 정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아마도 DNA 분자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한 착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물리학적 시각을 다소라도 지닌 사람이라면 그러한 착각을 할 수 없다. (40~41쪽)
생명체의 ‘살아 있음’이라고 하는 성격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것은 결국 어떤 특정한 물질 단편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많은 물질들이 함께 모여 정교한 어떤 ‘동적 체계’를 이룰 때 가능하리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귀착된다. 즉, “어떤 물질들이 어떤 성격의 모임을 이루어야 그 안에 ‘살아 있음’이라고 할 특징적 면모가 나타나는가?”이다. (56쪽)
인간의 지성은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작업이라도 이를 회피하지 않고 도전할 때 뜻있는 진전을 이루었고, 그러한 점에서 생명을 이해하고 정의한다는 것은 오늘의 지성에 부여된 시대적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생명을 정의하려는 우리의 과제는 단순히 이러한 지적 관심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발등에 떨어진 현실적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외계의 생명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탐사 작업이 현실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외계의 어떤 특이한 존재가 발견되었을 때 우리는 이것이 과연 생명이냐 아니냐를 판단해야 할 현실적 문제에 부딪힌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이미 인공생명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있는데, 이것이 어느 정도 성공하여 그 무엇이 만들어졌을 때에도 이것이 생명이냐 아니냐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82쪽)
우리는 볼츠만이 언급한 “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엔트로피(더 정확히 말하면, 부-엔트로피)를 위해서이다. 이것은 뜨거운 태양에서 차가운 지구로의 에너지 흐름을 통해 얻을 수 있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엔트로피 대신 자유에너지와 (질서의) 정연성을 통해 이야기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즉, 뜨거운 부분(태양)에서 상대적으로 차가운 부분(지구)으로 에너지의 흐름이 있을 때 한해 필요한 자유에너지를 얻을 수 있으며, 이것이 있어야 생존의 유지 등 필요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130쪽)
어떤 존재자에 ‘생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으려면 그 존재자는 여기서 말하는 세 번째 존재자, 즉 이차 질서를 이루기 위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전체 체계 그 자체임에 틀림없다. 사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이러한 존재자에 주목하고 이것이 생명의 바른 모습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를 명시적으로 ‘생명’이라 부르기를 주저해왔다. 그 대신 나는 이를 ‘온생명’이라 명명했다. 굳이 그렇게 했던 것은 이것을 ‘낱생명’(또는 ‘개체 생명’)의 개념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생명의 많은 흥미로운 면모들이 지금도 ‘낱생명’ 개념과 관련하여 유익하게 논의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생명’이라는 한 가지 명칭으로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지칭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았다. (193쪽)
나와 고양이를 생각해보자. 나와 고양이는 모두 한 복합 질서 안에 나타난 참여자들이지만 내 사고는 한 인간인 ‘나’의 사고이지 고양이의 사고일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주관성과 객관성을 나누어볼 수 있다. 나는 내 사고를 주관적으로 수행하지만 고양이의 사고를 주관적으로 수행할 수는 없다. 반대로 고양이는 고양이의 사고를 주관적으로 수행하겠지만 내 사고를 주관적으로 수행할 수는 없다. 단지 나는 고양이의 사고에 대해서는 오직 객관적으로만 말할 수 있으며, 고양이 또한 내 사고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 (233쪽)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의 논의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온생명의 주체이며, 이제부터는 개체로서의 내 삶뿐만 아니라 온생명으로서의 내 삶을 영위해가는 입장에 섰음을 알게 된다. 이는 현상으로서의 생명을 이해하고 현상의 한 부분으로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이해, 곧 나에 대한 각성에 해당한다. 일단 이러한 각성에 이르고 보면 우리는 다시 새로운 종류의 물음에 부딪힌다. 즉,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삶’이란 곧 ‘함’을 의미하는데, ‘주체적 삶’이란 ‘함의 방향을 내 스스로 찾아내야 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252~253쪽)
사실상 가장 유명한 대참사는 6,500만 년 전에 있었던 이른바 K-T 멸종 사건인데, 이때 공룡을 비롯한 수많은 생물종들이 이 땅에서 영구히 사라졌다. 이 사건의 경과는 비교적 상세히 밝혀지고 있는데, 이것은 직경 10km에 이르는 대형 운석이 멕시코 동남부 유카탄 반도 앞바다에 충돌하면서 발생했다. 이 엄청난 큰 충돌과 연달아 일어난 화재로 인해 대기 중에는 짙은 먼지 구름이 끼어 수년간 햇빛의 90% 이상을 차단했고, 이 때문에 지구 전체가 꽁꽁 얼어붙어 식물의 생육이 어려워졌다. 그 결과 이들을 먹고 살아가던 많은 생물종들은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우리 인간의 직계 선조들은 이러한 대참사 속에서 용케 살아남아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가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6,500만 년 전 이 멸종 사건 당시, 우리의 직계 선조는 요즘의 생쥐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은 연약한 포유류였는데, 이들에게는 오히려 이 사건이 전화위복의 계기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그 무섭던 공룡들이 사라지고 이후 포유류의 전성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271~273쪽)
여기서 놀라운 가능성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온생명의 자의식, 곧 삶의 주체로서의 온생명이며, 이것은 저 밖에 있는 어떤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내가 깨달은 나 자신의 모습이다. 나는 ‘작은 나’로서의 내 개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큰 나’로서의 온생명의 삶을 함께 영위해가는 존재임을 발견한다. 물론 작은 나로서의 내 개체는 조만간 끝이 날 것이지만, 큰 나로서의 온생명은 좀 더 길게 지속될 것이며 어쩌면 영구히 존속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운명이 지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주체가 되어 내 삶을 스스로 영위하고 있는 나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경로가 정해질 살아 있는 현실이다. 나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지어 나가고 있다. 작은 나로서도 그러하지만 큰 나로서도 그러하다. 내가 지금 큰 나를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이 큰 나는 영구히 존재할 수도 있고 조만간 사라질 수도 있다.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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