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인 야구를 하다 보면 팀 이름 중에는 프로야구에서는 쓸 수 없는 과감한 이름들이 많다. 상위 리그에서는 ‘흑풍’, ‘블랙비스트’, ‘나이트스텔스’와 같은 어감만으로도 강한 인상을 주는 이름들이 많은데, 그런 이름을 가진 팀의 선수들은 왠지 시커멓고 덩치도 크고 인상도 험악해 보인다. 이름만으로 반쯤 기선을 제압하는 이 이름들의 특성은 기본적으로 연상되는 의미가 공포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ㄱ, ㄷ, ㅂ 계열의 소리인 파열음을 많이 사용하여 어감으로도 강한 느낌을 준다. 성대를 울리면서 공기를 흘려보내는 소리(ㄴ, ㄹ, ㅁ, ㅇ, 모음)는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과 달리 파열음은 공기를 막았다가 한꺼번에 터뜨리는 방식으로 내는 소리이기 때문에 억센 느낌을 준다. ‘능인 파코스’라는 우리팀 이름은 ‘능인’이라는 이름이 울림소리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위압감을 주지 못한다. 대신 ‘파코스’는 파열음 중에서도 거센소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강해 보일 수 있었지만, ‘ㅏ, ㅗ’와 같은 양성모음과 결합해서 느낌이 강하지 못하다. ‘페이커스’나 ‘플루크스’라고 하면 어감이 훨씬 더 강해 보일 수 있다.(단 ‘플루크스’라고 한다면 어감은 강렬할지 몰라도 개그 야구단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우리와 같은 공무원 리그에 있는 경찰관들로 구성된 ‘동부불스’라는 팀은 파열음에다 크고 둔한 느낌을 주는 음성모음이 결합되어 있다. 거기다 ‘불스’가 가진 의미,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유니폼 때문에 반쯤 긴장하고 들어간다. 다들 우락부락하게 황소처럼 보이는 것 같고, 쳤다 하면 외야로 공을 뻥뻥 날리는 것을 보면(분명 간밤에 팔공산 아래서 음주 단속하다 왔을 텐데) 산에서 도끼질하다 왔거나 공사판에서 해머질하다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반면에 ‘죽기전에’, ‘하고잽이’(뭐든지 해 보려고 하는 사람을 이르는 경상도 사투리), ‘다디져스’, ‘놀기사마’와 같은 팀들에 있는 사람들은 팀 이름 때문인지 다들 인상이 웃는 얼굴에 승패를 초월해서 그냥 야구를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 같다. 실책을 해도, 삼진을 먹어도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는다.’는 삼미슈퍼스타즈 팬클럽의 강령을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회인 야구에서는 여러 팀에 동시에 속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어 ‘동부불스’에 속해 있는 선수가 ‘놀기사마’에 가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팀 이름에 따라 사람의 인상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경기에 임하는 마음가짐이나 경기하는 스타일도 많이 달라진다. 이름에는 이처럼 우리의 태도와 때로는 운명을 좌우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야구팀 이름처럼 어떤 단체의 이름을 짓는 것은 단체가 지향하는 철학을 이름에 자유롭게 담을 수 있지만,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자식의 이름이 가진 운명은 이름을 짓는 부모가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평생 가져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가 부여한 특별한 의미나 상징성이 강한 이름은 아이에게 큰 짐이 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이창동 전 장관의 소설 〈용천뱅이〉에는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인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김막수’로 지은 이야기가 나온다. 아들은 그 이름으로 인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야 했고, 아버지가 져야만 했던 좌우 이념 대립의 짐까지 이름을 통해 물려받았다. 주인공은 결국 아버지와의 단절을 위해 ‘김영진’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한다.
이런 예는 소설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중학교 때 ‘달달’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부모님이야 ‘통달하고, 통달하라[達達]’하라는 좋은 뜻으로 이름을 지었겠지만, 성까지 ‘오’씨다 보니 출석을 부를 때마다 교실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어린 나이에 이름만으로 그렇게 남의 이목을 받는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친구는 스스로 개명을 했고 ‘달달’이라는 이름은 그 친구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예전에는 나도 자식을 낳아 이름을 짓는다면 한글 이름, 뭔가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그런 이름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형제, 자매 이름이 ‘여진, 여선, 여미’, ‘일우, 이우, 삼우 … 칠우’ 이렇게 가는 이름들을 보고 참 무성의하게 지었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아이 이름을 지으려고 보니 그렇게 지은 데도 어른들 나름의 철학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름들은 기본적으로 항렬자를 따름으로써 형제라는 일관성과 순서는 남기되, 부모의 의지를 이름에 부여하는 것을 최소화한 것이다. 그리고 ‘일, 이, 삼, 사…’로 나가는 이름을 가진 집의 경우 금기시 되어 있는 ‘사우’ 대신에 ‘성우’를 쓰고, 소 키우는 집이라 그런지 몰라도 ‘육우’ 대신에 ‘영우’라는 이름을 쓴, 단순해 보이지만 단순하지 않은 원칙이 담겨 있었다.
사람의 이름은 특별한 의미를 담기보다는 부르기 좋고, 어감이 좋은 것이 좋다. 튀는 이름보다는 너무 흔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익명성도 있는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어려서부터 이름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담고 싶다면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할 일이 아니라 자식이 스스로 가명을 쓰든지, 개명을 하면 되는 일이다.
---「p. 49~53, 1부 ‘이름 이야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