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보통은 잊고 지냅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면, 삶의 본질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 p.15
인문학은 바로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겁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나만을 위한 인문학으로는 절대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타인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설령 물질적으로는 도와주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심정적으로 공감은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처지가 딱하고 공감이 되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재량 범위 내에서 도와줄 수도 있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면 다 같이 함께 공영(共榮)하는 세상과 가까워지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한 인문학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은 나도 좋고 남도 좋게 만들어 줍니다. 인문학으로 공영(共榮)의 세상이 가능합니다.
--- p.18
저 또한 인간성은 나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완벽하게 이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럴듯한 상황에서는 뭐가 뭔지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인간성은 나약하지만, 인류는 발전해 왔습니다. 나약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반성하고 사회적 가치와 윤리, 도덕을 지키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다만, 함몰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나약하지만, 나약해지지 않도록 늘 자각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pp.54~55
자기에게 있는 것들에 대하여 가치를 두면, 그 사람은 행복합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들에 대하여 가치를 두면,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자기에게 결핍된 것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수록 스스로 초라해집니다. 자기에게 충만한 것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수록 스스로 뿌듯합니다.
--- p.85
명리학은 인문학과 굉장히 가깝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인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명리학은 고귀한 것은 고귀한 대로 가치를 부여하고, 통속적인 것은 통속적인 대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 p.103
예를 들어, 내 사주에 있는 아내의 모습이 좋지 않다고 가정해 봅시다. 소위 아내 복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현실의 내 아내도 썩 마음에 안 듭니다. 미운 짓만 골라서 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내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겁니다. 내 사주의 대본대로 아내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내를 보고 뭐라고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아내가 내 마음에 들도록 기도해도 잘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내 사주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걸 깨닫고 나면, 세상을 원망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게 명리학의 힘입니다. 명리학을 배우면 원망과 불만이 사라지게 됩니다.
--- p.109
욕심을 버리고 사는 일은 욕심을 내면서 사는 일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욕심을 내면서 사는 삶도 힘들어하는 사람이 어떻게 욕심을 버리고 사는 삶을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욕심을 버리는 삶을 감당하기 어렵겠다 싶으면 차라리 욕심을 좀 내면서 열심히 사는 것도 괜찮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은 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젊은 시절에는 열심히 살면 그 성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 p.132
성공학 제1의 법칙은 바로 생각대로 세상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나 불교 등 많은 종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죽하면 성공학이라는 학문 분야도 있겠습니까? 새삼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믿어지는가요? 생각대로 세상이 이루어진다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우리의 직관과도 맞지 않고, 살아오면서 경험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덥석 믿기가 망설여집니다. 만약 이게 맞는다면, 왜 나는 원하는 대학에 못 들어갔을까요? 왜 첫눈에 반한 그녀와 사귀지 못했을까요? 실상은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다르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과연, 세상은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겁니까?
--- p.146
그러면 협상은 언제 하는 것이 만족도가 높을까요? 바로 파국이 보일 때입니다. 파국이 보이기 전까지는 협상이 잘 안 됩니다. 내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국이 보이기 시작하면, 내가 다 잃기 때문에 이번에는 협상이 무조건 자기에게 이득이 됩니다. 그냥 처음부터 협상했으면, 시간도 절약하고 여러모로 좋았을 텐데 그때는 자기가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 협상을 안 합니다. 그러다가, 터지고 깨지고 소위 피를 좀 보고 나서 그때에야 비로소 협상합니다. 이게 참, 협상의 모순점입니다. 아이로니컬합니다.
--- pp.233~234
좋은 인간관계를 위해 노력은 하되, 안되는 걸 억지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관계는 성격과 같은 선천적인 요인이나 어릴 적의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않으면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관계를 고치는 데도 그만한 자각과 노력, 시간이 필요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개인의 가치와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인간관계는 이래야 한다는 식의 획일적인 가치관도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가치가 덜 중요한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 pp.236~237
우리의 직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이미 죽어있든지 살아 있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카드의 마지막 패는 스페이드 에이스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이미 결정난 상태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이중 슬릿 실험은 우리의 그 직관이 틀렸다고 합니다. 양자역학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는 관찰 시점에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례는 관찰 시점이 언제일까요? 바로 그 상자를 여는 순간입니다. 카드에서 관찰 시점은 언제일까요? 바로 그 카드를 젖히는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우리의 직관이 틀렸습니다!
--- pp.299~300
감정의 의인화는 바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부정적 감정을 내 눈에만 보이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 나의 부정적 감정을 분리해야 합니다. 나는 엄마가 되고, 나의 부정적 감정은 어린아이가 됩니다. 나의 부정적 감정을 독립적인 한 사람으로, 작은 아이로 생각해 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의 감정을 항상 객관화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 감정이 일어나면 이렇게 말합니다.
어 친구 왔는가?
이 친구 오늘도 화났군. 그래, 그럴만해.
나라도 그랬을 거야.
이해해. 괜찮아. 좋아질 거야.
--- pp.310~311
부모는 늘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부모가 자식에게 미안할까요? 주기만 하고 받는 건 없는데 말입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제대로 못 키우고, 미숙하게 키웠기 때문에 그게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왜 부모는 늘 자식에게 고맙다고 할까요? 그렇게 미숙하게 키웠는데도 자기 자식이 잘 커 주니까, 그게 너무 고마운 겁니다.
--- pp.340~341
우리는 타인의 삶을 보면서 위로를 받고, 희망과 긍정의 길로 나아갑니다. 그 타인의 삶은 문학이나 역사, 철학, 예술 등 인간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이 만든 것보다 더 인간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인공지능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기계라고 배격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이 곧 인공지능이고 인공지능이 곧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인공지능을 통하여 인문학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너무나 당연시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p.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