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이 두 달 후로 다가오자 갈수록 할 일이 많아졌다. 정해진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너나 할 것 없이 초조함과 긴장이 쌓여갔다. 주변에는 변변한 식당 하나 없었다. 아침, 점심은 현장식당, 속칭 함바집에서 해결했다. 이상하게 함바집 밥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근처에 맛있는 음식점 하나만 들어선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준공식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전산화 시스템 시뮬레이션도 곧 해야겠죠.”
일 얘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찜질방 앞이었다. 잠시 눈을 붙이려고 들어간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개원준비단의 다른 직원들이 같은 옷을 입고 빙 둘러앉아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로를 쳐다보자 힘든 와중에도 웃음이 터졌다. 이른바 찜질방 개원준비단! 이들이 기다린 것은 새벽의 여명이었을까, 아니면 그 너머의 무엇이었을까.--- p.22
예상치 못한 수많은 문제에 부딪히고 일정이 늦어지자 개발팀 안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일단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용 중인 시스템을 도입하고 정보화의 핵심인 EMR은 조금 시간을 두고 개발하자는 중도 입장이 나오더니 결국 종이 차트와 병행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수 차례의 회의 끝에 아무리 어렵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다시 한번 힘을 모아야 했다. 느리고 힘들지만 전산개발자와 각 과 의사들은 국제 표준 의료용어에 따라 맞춤형 차트를 만들어 나갔다. 전산 예산만도 다른 병원의 몇 배가 들었다. 그러나 그 열매는 크고 달았다. 분당병원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서도 바로 사용 가능한 차트가 탄생한 것이다. 결국 전자차트는 EMR의 꽃이 되었다.--- p.45
왜 끼니를 같이 하는 ‘한솥밥 모임’이었을까? 여기서 분당병원의 조직 관리 이념이 드러난다. 가족을 다른 말로 ‘식구’라고 한다. 식구(食口)란 곧 ‘먹는 입’이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밥상에 둘러앉아 한끼의 밥을 함께 하는 사람이 곧 식구다. 한끼의 밥을 앞에 두고 서로 나누는 이야기와 눈빛이 가족 간의 사랑이 되고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우리의 기억에 아로새겨진 의식(儀式)의 힘은 강렬하다. 행복하면 웃지만, 거꾸로 웃으면 행복해진다. 가족은 함께 밥을 먹지만, 함께 밥을 먹으면 곧 가족이 된다. 그렇더라도 전제는 있다. 함께 웃으며 즐겁게 밥을 먹어야 한다. 개원 초기에 원장을 비롯한 병원의 리더들이 가장 신경을 쓴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함께 웃으며 즐겁게 밥을 먹으려면 분위기 좋은 곳에서 비싼 음식을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식구’처럼 챙겨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노력은 주효했다. 식구로서 밥을 먹은 사람들은 정말 식구가 되었다. 경영진과 직원 사이, 직원과 직원 사이의 벽이 빠르게 허물어졌고 병원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던 것이다.--- p.57
환자를 안심시키긴 했지만 쉽지 않은 수술이었다. 칼을 뽑자니 혈관 파열로 대량 출혈이 생길 것이고, 그냥 놔두면 뇌수막염이 생겨 패혈증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상황이었다. 수술이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만의 하나 실패한다면 의료분쟁으로 이어질 소지도 있었다. 하지만 방 교수는 수술을 결정했다. “만약 내 가족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당연히 수술했겠죠. 그냥 두면 서서히 찾아올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하루하루가 얼마나 지옥 같겠어요.”--- p.83
"물론 만들 때는 번거롭죠. 그러나 지금처럼 국제화,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된다면 돌아가는 것 같아도 결국 이쪽이 더 빠릅니다.”
의료정보에 관한 분당병원의 철학은 확고하다. 노력과 비용이 들더라도 표준을 준수해야 한다는 원칙이 철저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깐깐하게 챙긴 덕분에 2014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방위부 산하 6개 병원에 의료정보시스템을 수출하게 되었다. 직접적인 의료 행위가 아니라 인프라에 해당하는 정보시스템을 수출하는 시대가 왔다니 흥미진진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거니와, 이러한 개가를 올린 이면에는 의료정보시스템에 관한 분당병원의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p.150
의료 수준이 높은 병원일수록 심정지 환자에게 얼마나 빨리 심폐소생술을 했는지, 폐렴 환자에게 적합한 항생제를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등을 수시로 체크하여 부족한 점이 있다면 끊임없이 고쳐나간다. 분당병원은 이런 임상 지표가 600여개나 된다. 미국 최고의 병원으로 손꼽히는 메이요 클리닉에서 평가하는 임상 지표가 100개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임상 지표 결과를 하나만 보려고 해도 의료진이 열 명쯤 투입되어 2주 후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분당병원에서는 600여개의 임상 지표 중 어떤 것이든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분당병원에서 열린 암 치료 학술 회의에 참석했던 메이요 클리닉 의사들이 암 치료는 제쳐두고 이 시스템만 몇 시간씩 물어볼 정도로 신기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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