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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을 살고 돌아보니

팔십을 살고 돌아보니

: 어느 원로 교육자의 인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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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6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160쪽 | 430g | 125*200*20mm
ISBN13 9788997482658
ISBN10 899748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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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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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1919년 10월 27일(음)에 고흥군 대서면 신기마을에서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고 존함은 휘(諱) 송 점(자) 태(자)이시고, 어머니께서는 1921년 5월 16일 고흥군 고흥읍 호형리 간천마을에서 외할아버지의 셋째 딸로 태어나셨으며 류 말(자) 순(자)이시며, 송씨 문중에 시집을 오면서도 어려운 가정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본성이 온후하시고 어버이 모시기에 성의를 다하며 근검하고 가정에 충실하여 마을에서 칭송이 많은 효자셨다. 어머니께서도 마음씨가 곱고 여리며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시부모님 모시기에 정성을 다하여 다른 사람의 본이 되었다. 이러한 부모님을 둔 나는 참으로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이다.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적 수난기에 태어나 나 역시 많은 고초를 겪으며 삶의 역경을 헤쳐왔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모두가 어려운 시대를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시대를 마치 물살 거센 바다를 건너가듯, 지금 생각해보면 위태롭게 지난한 항해를 해온 배처럼 건너왔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꿈을 좆으며 마침내 파도 잔잔한 저녁 항구에 정박한 듯 모두 열심히 살아왔다. 우리 내외도 부모님 모시기를 나름대로 정성들여 봉양했고, 나는 나의 꿈인 교육자의 길을 한눈팔지 않고 걸어, 교육계의 꿈이고 목표인 교감·교장을 지내면서 후학들을 잘 길렀다. 그 결과 많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꿈을 좇아 우리 사회의 동량으로 성장하였다.

공자님께서도 세상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제자들을 잘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엄한 부모 밑에서 성실하게 잘 자라 제각기 추구하는 삶을 잘 살고 있어, 이런 나를 생각할 때 이 세상에 태어나 꿈을 구현했다는 마음에 행복하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녀와 손주들이 건강하게 잘 살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80살을 넘게 살아온 뒤안길을 돌아보니 나의 삶은 ‘정직’을 바탕으로 ‘꿈’을 향해 숨가쁘게 살아온 삶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관이 있고 꿈이 있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그리고 인간성을 지니며 살아가기를 간구해 본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중에서

일본이 대동아 공영을 부르짖으며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기 위해 무수한 악행을 저지르고 있어 생활주변이 어수선한 일제강점기, 나는 아버지 휘(諱) 송 점(자) 태(자)씨와 어머니 류 말(자) 순(자) 여사님 사이에서 1941년 8월 20일(음) 태어났다. 어버이께서는 내가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어려운 가정형편에 도움이 되도록 집안일을 돕기 바라셨고 또래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도 나는 입학하지 못하고 집안일을 도왔다.

다른 친구들은 초등학교에 다녀와서 학교 이야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놀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들이 부럽고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2년이나 늦게 입학하도록 하여 나의 인생의 출발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늦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학교생활이 늦었더라도 열심히 공부하도록 독려하고 격려하셔서 나는 최선을 다해서 학교 공부도 하고 집안일도 열심히 하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운데도 부모님들께서 나를 일하는 데만 힘쓰지 않게 하시고 틈나는 대로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셨다. 나는 이러한 부모님의 격려에 힘입어 꿈을 꾸게 되고,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쉽지만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내 앞에 놓여진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부모님 날 낳으시고」중에서

내가 태어날 무렵은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제국주의의 광기를 드러낸 시절로 각종 수탈과 침략으로 먹고 살기가 어렵고 생활하기 힘들었다. 부모님께서는 이어받은 재산도 없었기에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초근목피로 간신히 연명하였다. 톳을 먹기도 하였는데, 보릿가루를 조금 섞어 끓인 후 먹으면 소화가 안 되어 그대로 대변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그 시절은 영양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영양실조로 성장이 멈추고 면역력이 떨어진 아이들이 많았다. 열 명이 태어나면 절반 정도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날 정도였다. 못 먹고 굶주림 때문에 병약해지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자식을 많이 낳지 않지만, 옛날에는 자식을 많이 낳았다. 먹고 살기 어려운데 입이 많으니 대부분 곤궁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모님도 자식을 7남매를 낳았다. 그러다보니 더욱 생활이 어려웠었다. 나의 유소년기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지나 해방정국에 이어 여순사건, 6·25 한국전쟁, 4·19혁명 등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있어 국민들뿐 아니라 우리 가족은 궁핍을 면치 못했다.

특히 나라를 잃은 피지배민족의 삶은 우리 가계에도 많은 시련을 주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나는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잘 몰랐지만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으며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자신들의 힘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억지명분으로 지구촌은 전쟁터가 되어 젊은이들을 전쟁터나 징용으로 강제로 끌어가 노동력을 수탈하고 인권을 말살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어린 소녀들을 일본군위안부, 즉 성노예화시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서슴치 않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내선일체를 강요하며 우리 고유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이른바 창씨개명을 하도록 하였다.

나는 겨우 다섯 살 때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약소국이었던 우리나라는 남북이 분단되어 완전한 해방, 또는 완전한 통일국가를 만들지 못하고 여전히 비극적인 역사를 쓰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실정이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 동족상잔의 아픔과 상처를 남긴 채 우리 민족은 서로를 할퀴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나의 유소년기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과 상처의 비극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의 한복판에서 어린 시절을 살아온 나는 가난과 굶주림에 노출되어 하루에 밥 세 끼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풍요를 구가하는 오늘날, 우리 청년들은 나와 그 어려운 시대를 겪었던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임을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중에서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좌우로 나뉘고 남북으로 분단되어 혼란이 가중되는 때인 1948년 10월 19일, 좌익계 군인들이 여수·순천에서 무장 봉기하여 10월 27일에 완전히 진압되었으나, 일주일 남짓 되는 이 사건의 후유증은 엄청났다. 당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만의 단독정부가 38선 이남에서 출범했지만 식민지에서 갓 벗어나 미국의 산탁통치를 거쳤기 때문에 여전히 혼란스럽고 좌우익의 이념으로 대립되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우리 민족 지도자들은 새로운 우리만의 통일된 자주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방법적인 측면에서 이념문제를 가지고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지도자들간의 욕망이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 정변이나 사건 사고로 나타나 극심한 혼란이 난무하였다. 이른바 ‘여순사건’도 그러한 사건 중의 하나이다.

이 사건을 여순사건,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이라고도 부른다. 정식명칭은 ‘여수·순천 사건’이다. 한때는 ‘여수·순천 반란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단지 두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라 하여 공식명칭에서 ‘반란’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었다.

다른 명칭으로는 ‘여수 주둔 14연대 반란 사건’ 혹은 그냥 ‘14연대 반란사건’이라고도 부른다. 북한에서는 ‘려순 병란 (여순 병란)’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여수·순천이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 주둔 군부대의 사병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반란이기 때문이다. 『남부군』을 쓴 이태가 《신동아》에 기고한 실록의 제목도 이것이다. 여순 사건은 좌익계열의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여 시작되었으나, 사건의 핵심 주동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지지가 않아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일단 극좌 (김일성 측)들과 극우 (이승만 측)들의 잠꼬대는 여백이 아깝기는 하지만 ‘정부의 반응’ 항목에서 살짝 다루고 다수 설이나 우파 측 주장의 경우 진행 과정은 비슷하지만 북한의 사전지시가 있었는지 여부와 반란군을 지휘한 이현상이 언제 도착했는지의 차이가 있다. 강동정치학원에서 유격훈련을 받던 이현상이 반란 소식을 듣고 급히 남한으로 내려갔다는 설도 있고, 이미 3개월 전에 수료하여 곳곳에 흩어진 조직 지도를 위해 지리산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여러 설은 다루다 보니 여순사건을 김지회가 일으켰는지 지창수가 일으켰는지 조금 꼬여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여순사건은 지창수가 일으켰고, 김지회는 나중에 말려들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해방 후 어지러운 정국에 이념의 갈등이 표면화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나라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여수·순천 시민과 주변 주민들의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너무 많아서 그로 인해 주민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워졌고 가정이 파탄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 집안도 여순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1948년 10월 29일에 토벌대에 아무런 죄도 없었지만, 단지 젊은 사람이라고 체포돼 온갖 악행(구타, 물·전기 고문 등)에 시달려 일어나 앉지도 못할 정도로 당했다. 그 이후로 우리 가정은 더욱 어려워져서 내 또래의 친구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다니고 있었으나 나와 내 동생들은 호적에 출생신고가 여러 해 늦고 가정형편도 어려워 학교에도 늦게 입학하는 등 피해가 아주 컸었다.

여순사건은 내 나이 여덟 살 무렵에 겪은 사건으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질곡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당시에는 이념으로 인해 같은 민족끼리 서로 죽이고 저주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목도하며, 나는 어린 나이에 세상이 무섭고 이념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대립과 갈등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역사는 곧이어 6·25 동란으로 이어져 혈육끼리 피를 부르는 전쟁까지 겪게 하고 여전히 남북으로 분단되어 서로에게 증오와 적개심으로 싸우고 있는 우리 민족의 운명이 애처롭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중에서

여수·순천 반란사건 때 토벌대가 우리 지방 고흥에 들어와서 집에서 가정을 돌보고 계시는 아버지를 벌교 경찰서로 데려갔다. 반란군을 도왔다는 누명을 씌워 문초하고 고문을 가했다. 토벌군은 반란군을 도왔다는 거짓을 받아내기 위해 육체적으로 심한 고통을 준 것이었다. 결국 혐의가 없어 2개월 만에 풀어주었으나 우리집 가장인 아버지가 일어설 수도, 걸어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우리 가정이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친구들이 초등학교를 입학하였음에도 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50년, 열 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책을 구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책을 얻어서 보거나 얻지 못할 때는 학교의 선생님께서 지도해주시는 것만으로 학교생활이 이루어졌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들어와서 집안일을 돌보고 산에서 땔감을 마련했다. 그때는 음식을 조리할 때나 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었다. 그러므로 나에게 공부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어린 마음에도 열심히 공부하여 가난을 극복하고 우리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나의 다짐이 나를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동기부여를 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 해에 이른바 ‘6·25 한국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순식간에 낙동강 부근까지 밀고 내려왔다. 우리나라의 서부지역인 전라도는 인공치하로 변해버렸다. 어린아이들은 학교에서 인민군이 가르치는 사회주의 노래를 배우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편에 선 사람들은 평소에 감정이 있거나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 사람은 죄인이 되어 죽음을 면치 못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러 ‘손가락총’이라고 불렀다.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좋은 세상이 왔다면서도 사람 죽이는 것을 너무나 손쉽게 자행했다.

1950년 9월에 맥아더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인민군과 이를 따르는 사람들은 북으로 도망가거나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갔다. 두세 달 동안 우리 고흥에서 온갖 못된 짓을 하던 사람들이 물러갔다. 그래도 우리 고흥지역은 여순사건의 피해를 워낙 많이 받았던 터라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가 비교적 적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지루한 4년 여의 전쟁이 마침내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 끝났다. 집에서 학교 까지의 거리가 약 5km정도 되어 왕복 10km 정도의 거리를 책보자기를 들고 다녔으며, 고학년 때도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고 굶고 다니며 어렵게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다른 사람은 중학교에 진학하였으나 고난과 어려움 때문에 책보자기(책가방)를 집 안방에 놓아두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중에서

16세,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정이 좀 나은 친구들은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원서를 쓰고 시험도 보고 하였으나 나는 엄두도 낼 수 없어 포기하였다. 가정형편이 좀 나은 아이들은 집에서 왕복 20km를 걸어서 조성중학교로 진학했고, 가정형편이 좀 더 나은 아이들은 벌교나 순천, 광주로 진학하였다. 우리 마을에 서당이 있어서 봄과 겨울에는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몸이 지쳤으나 나의 향학열은 열심히 공부하게 하였다.

내가 다니던 우리 마을의 서당이 없어져 화천마을, 안동마을로 서당이 있는 곳에 다녔다. 밤이면 혼자서 무서운 곳이 많은 안동마을까지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만물집』, 『명심보감』, 『통감』 등을 익혀가며 어렵게 공부를 했다. 한마디로 낮이면 일하고 밤이면 공부하기 위해 크게 노력하는 주경야독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여 동안 집안 일도 도우며 혼자서 공부하였다. 마음 속에서는 학교진학을 진저리치도록 하고 싶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시던 부모님께서는 없는 살림살이에서도 정신적인 지원과 격려를 해 주셨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께서도 건강을 많이 회복하셨다.

그러나 없는 살림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나는 마침내 학업의 길에 나서기 위해 공부하기 위해 광주로 향했다.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많이 늦었지만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내 나이 19살이 되던 해였다. 광주에 가면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서당에서 덮고 자던 이불을 싸들고 광주에 있는 사촌형 자취 집으로 가게 되었다. 사촌형이라 해도 나와 동갑내기이고 고등학생이었다.
---「서당에 가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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