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상인들로부터 폐지를 수거하며 고단한 생계를 이어가는 김정신 여사가 여느 때처럼 그날 아침에도 시장에서 폐지를 수거하고 있었는데 하바드반찬가게 앞에서 낯선 남녀를 만나고 정신을 잃게 되어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은지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부분은 그 다음 이야기였다.
“마천시장 CCTV를 다 돌려봐도 김정신 여사가 봤다는 남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어.”
그러자 마천시장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원장의 이야기로는 김정신 여사가 기가 약해져서 그렇다 하고, 족발 가게 권화순족발집 남자는 김정신 할머니가 잘 먹고 다니지 않아서 헛것을 본 거라고 했다. 시장 옆에서 법당을 운영하는 법사는 푸닥거리 한 번 하면 생기지 않을 일이니까 다 같이 돈이나 모아 내라고 했다. 이에 질세라, 옷수선 가게, 슈퍼마켓, 떡볶이 가게, 오리구이 식당, 생닭 가게, 생선 가게, 떡 가게, 칼국수 식당, 과일 가게, 채소 가게, 순대국밥 식당, 곱창 가게 상인들까지 각자 장삿속에 따라 이러쿵저러쿵 떠드느라 회의가 진행이 안 될 상황으로 번졌다.
그때였다. 한구석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천시장 중앙 통로 마트 앞에 자리 잡은 정육점을 운영하는 삼십대 초반의 육권화 사장이었다.
“우리…… 할무이가 그랬지라. 갸들은 내 아무리 봐도 도깨비가 분명하지라잉.”
그러자 강말숙은 오른쪽에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마천시장 교회에 다니던 성도에서 목사가 된 후 제대하고 오십 년 가까이 목회를 이끄는 박순희 목사였다.
“그라요. 한 말씀 들어봅시다.”
무당집 보살이 박순희 목사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상인들은 무당집에 다닌 사람들과 교회에 다니는 성도로 양분되었다. 방금까지 김정신 여사의 안부를 걱정하던 상인들은 이번엔 그 남녀가 도깨비냐 아니냐로 서로 입씨름을 벌이기 시작했다.
---「도입부」중에서
김정신이 청년의 어깨에 팔을 뻗었지만 김정신의 팔은 청년의 몸을 그대로 가로질러 허공을 스쳤을 뿐이었다. 김정신은 자기 팔을 들어 자기 눈앞에 가까이 대고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팔을 뻗어 청년의 몸을 건드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김정신의 팔은 청년의 몸을 지나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놀라 기겁한 김정신이 기절하며 폐지를 담은 리어카 쪽으로 쓰러지면서 우당탕하고 소리가 났다. 시장 골목 안에 폐지가 흩어졌다. 청년과 여자는 가게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전날 비가 많이 내린 탓으로 시장 길바닥엔 물기가 남아 있었다. 김정신이 쓰러진 곳에 고였던 물이 폐지에 스며들었다.
--- p.13
최 군은 아니, 최밷알은 인터넷방송에 빠르게 적응하는 중이었다. 그 순간 녹두방송채널에선 울트라챗이 들어오고 풍선도 올라왔다. 딱 일 분이나 지났을까? 녹두는 풍선과 울트라챗으로 삼만 개나 받았다. 최밷알은 녹두를 보고 놀랐던 심장이 다시 쿵쾅거렸다.
‘……’
‘이런 씨 …… 하루 배달 십만 원도 못 버는데 여긴 일 분만에 삼백만 원? 어휴……’
녹두가 최밷알을 보면서 불렀다.
“최밷알! 근데 너 리액션 안 해?”
최밷알은 녹두를 보고 몸이 굳어버렸다.
‘리액션이라니……?’
최밷알, 오늘자 현재 이 시각부로 남캠이 된 최 군의 닉네임이다.
‘일인 방송이라니!’
회사도 퇴사한 마당에 배달하면서 자기 인생 성찰의 시간을 가지려 했는데 모든 게 일순간에 바뀌었다.
--- p.34
이뿐이화장품 어엽분 사장이 은지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은지도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김달포 사장은 어엽분 사장과 은지를 연달아 보며 갑자기 양팔을 위로 쑥 올리더니 박수를 쳐댔다.
“그 옆엔, 보자, 보자. 응. 그래, 김구이집 알지? 저 사장님 항상 서서 김 굽는 분인데 저분이 또 군대 의장대 나온 분이야. 군대에서도 서 있기만 했는데. 아무튼 그렇고. 그 옆에 돼지불고기 사장님? 불고기에 인생 거신 여자 사장님. 저분은 약대 출신이라고 하셨는데? 아무튼 그래. 맞죠? 그리고 채소 가게 림재복 사장님. 저분은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 농대 나오시고 산림학 박사이셔. 애처가야, 애처가. 가족사랑 아내 사랑은 저분만큼만 하라고 해. 세계 평화가 올 테니까. 그리고 저기, 벽에 등 대고 두 다리 가부좌 틀고 앉아 계신 여자분. 저분이 공대 컴퓨터공학과 출신인데, 모르는 컴퓨터프로그램이 없어. 애플하고 구글에서도 근무했고. 왜 있잖아? 공대 아름인가 뭔가 공대에 여학생 있으면 대단한 거 있지? 저분이야. 지금은 저분이 마천시장에서 제일 오래 자리 잡고 계신 무당집 선녀 무당이고 쥔장이고. 저분 통해서 제자 무당들이 프랜차이즈 열고 자리 잡았지, 아마? 선녀 사장님, 그렇지요? 요즘 무당집 잘돼요?”
--- p.70
육권화 사장은 요란한 수다를 내뱉듯 이어 붙이면서 고깃덩어리를 이리저리 밀면서도 좀처럼 발골을 시작하진 않았다. 사람들이 더 모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육권화 사장의 속사포 랩이 다시 이어졌다.
“끓일수록 정이 깊어지고 사랑이 진해지는 양지살로 국을 끓여줘요! 힘이 세고 질기더라도 오래오래 끓여주면 강철 심장도 녹여주는 사태는 탕이나 찜을 만들어요! 고기가 많은데 마블링으로 식감도 좋고 맛도 좋은 등심은 스테이크부터 소불고기, 소금구이 다 좋구유! 고기가 연하고 부드러운 우둔살은 장조림에 좋고 전골에 넣으면 일품이고요! 우둔살 옆에 채끝살은 안심을 둘러싼 고기여서 부드럽고 맛도 좋아 바비큐로 먹고 소불고기로도 먹고 전골에도 넣어요! 그럼, 안심은요? 안심해요! 안심이에요! 양은 적은데 고기가 연하고 마블링도 듬뿍! 잡수고 싶은 대로 요리해서 잡수면 되고요! 갈빗살은 쫄깃쫄깃 식감을 높여주죠? 갈비찜, 갈비구이, 갈비탕탕! 앗싸 갈비! 그러면 우족살은요? 요건 좀 그래요, 질겨요, 질겨요! 오래 오래 끓이세요! 국이나 육수에 사용하면 맛있어요! 그리고 이거 대접살! 연하고 담백해요! 요것도 스테이크! 장조림! 구워도 맛있어요! 그러면 남은 건 꼬리인데요? 요건 찜으로 드시면 좋아요! 아빠 기운 튼튼! 소꼬리찜 맛있으면 오늘 밤에 막내한테 동생 생겨요!”
육권화 사장의 속사포 입담은 소꼬리찜 단락에서 절정을 이뤘다. 이쯤 되면 발골 이벤트를 지켜보던 아줌마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지갑을 열고 다가오는 게 순서였다.
--- pp.142~143
요원이 끼어들었다.
“이 세상이 영원하고 무한대로 느껴지는 이유는…… 이 세상에 마이너스와 플러스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게 양자물리학이고요?”
동구가 요원을 보며 엄지와 검지를 마주 튕기며 말했다.
“그게 바로…….”
은지가 받았다.
“도너츠.”
요원이 은지에게 물었다.
“네?”
은지가 동구를 바라봤다가 요원을 보며 말했다.
“실상이 허상이고 허상이 실상이라는 것이죠. 이 세상의 모든 물체는 아주 작은 크기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플랑크 길이 값이라고 하는데요,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크기……, 플랑크 길이를 h라고 할 때 h는 1.616229×10-35m이고요.”
동구가 이어 말했다.
“플랑크 길이.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들여다보면 결국엔 아주 작은 공간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NASA에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아주 작은 공간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고부터 우주로 눈을 돌린 거예요. 우주에는 어떤 물질이 있을까 하는 건데요.”
은지가 말을 이었다.
“양자얽힘, 웜홀을 만들어서 정보의 순간이동 실험도 하는데요, 지구에 존재하는 물체를 순식간에 화성으로 보낼 수 있는 연구에요. 정보손상 없이요.”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 pp.156~157
“우주가 확장된다면 우리 태양계도 이동 중이거든. 그런데 빛의 속도보다 빠른 게 없다면 우주의 가장자리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거야.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다만, 우주의 확산 공간에 블랙홀, 웜홀, 화이트홀 같은 빛 입자를 가둘 수 있는 공간이 있거나 중력처럼 공간의 변곡면을 만들어낸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아무튼 우주의 중심을 찾을 수 없겠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주의 중심에 도달할 수는 있을 거거든.”
동구가 은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주의 중심을 지날 수 있겠다? 뭐 그런 건가?”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외계인이라면 또 다른 이야기야. 지구인은 아직 모른다고 하더라도 외계인이라면? 우주에서 지구인보다 먼저 생긴 우주인이 있다면? 그들은 우주의 중심을 알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을지 모르거든.”
동구가 요원을 쳐다봤다.
“그렇다면…… 지구인보다 먼저 생긴 우주인들, 지구 밖 성체들을 먼저 찾아낸다면 그야말로 획기적인 상황이 펼쳐지겠군요? 우주의 중심도 찾을 수 있을 것이고요. 문제는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겠네요?”
--- p.246
그날 저녁. 재개발조합 선거를 앞둔 조합 사무실.
“회장님 오십니다.”
강호식이 꽁지머리 남자를 앞세우고 한의원 건물 오층에 자리 잡은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실에 모인 사람들은 마천시장 상인들이었다. 채소 가게, 정육점, 김구이집, 생고기 식당, 마트, 떡볶이 가게, 칼국수 식당, 옷수선집, 반찬 가게, 곱창구이집 등 마천시장 재개발사업에 관한 중앙 통로 쪽 가게를 가진 상인들과 인근 이면 도로에 가게를 운영하는 상인들이 모였다. 대략 칠십여 명 가까이 모였다. 강호식이 들어서자 상인들이 말을 멈추고 강호식을 바라봤다. 강호식은 상인들을 보며 양팔을 펴고 웃는 얼굴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상인들 앞에 마련된 강단으로 올라섰다. 강호식은 상인들을 쳐다보며 일일이 시선을 맞추며 먼 곳에 앉은 상인들과도 눈인사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 p.307
“어제…… 여기 난리도 아니었어. 알지?”
“아, 네네. 아침에 김 경장님 얘기 들어서……. 근데 왜요? 왜요? 뭐 또 다른 일 터졌어요?”
고춘자가 강말숙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내 말 맞지? 강호식이 그런 거잖아? 직원들, 아니 깡패 새끼들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다 죽일려고 그런 거라니깐. 멀쩡한 가게를 왜 부수겠어? 얼마 안 있으면 조합장 선거고 마천시장 이권 챙길려면 상인들한테 떡 하나라도 더 줘야 할 상황인데……. 단단히 미치지 않고서야 그게 제정신 가진 놈이 할 짓이야?”
“하이고, 우리 고춘자 사장님. 또 말씀 격해지신다. 호호호. 내가 이래서 우리 언니 내 맘에 쏙 든다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강호식이 언니 말대로 뭐에 씌웠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그렇잖아도 김 경장이 와서 넌지시 나한테만 물어보던데요, 저기 붕어빵네 공터에 옷차림도 희한한 사람들이 간밤에 어슬렁거리는 걸 김 경장님이 데려다가 조사했대요.”
--- p.354
다시 며칠 후. 새로운 상인들이 모여든 마천시장에 아침이 시작된 어느 날이었다. 은지네 도넛 가게 문이 열렸다. 간판을 새로 다는 날이었다. 은지가 가게 문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간판집 사장이 왔다. 새로 다는 간판은 핑크 톤 도넛 모양이었다. 간판엔 진지한 궁서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바드도넛가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은지는 간판을 새로 달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의자에 놓아둔 핸드백에서 작은 액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우리 가족’이라고 쓰인 손 글씨. 은지의 글씨체였다. 액자 안에는 고등학생 은지, 동구, 에릭이 함께 모여 웃는 얼굴로 촬영한 사진이 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은지는 동구와 에릭을 잊지 않고 있었다.
--- p.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