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은 당시 사회에서 최고의 권세(權勢)와 부(富)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들을 소유한 자들과 직접 결탁하고 있었다. 왕권의 찬탈 혹은 옹위를 에워싸고 전개된 여러 차례의 정변을 통하여 배출된 이른바 훈신, 그리고 왕실과의 혼인 관계로 맺어진 척신 등은 일차적인 왕권의 옹호자였으며 지배체제의 상호 보험적인 운용자들이었다. 왕실 자체도 그러하였거니와 훈신과 척신 등 세가 자체가 워낙 전국에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세가끼리의 혼인과 핵심 권력에의 참여를 통하여 정치권력·사회세력과 부를 재생산하는 방법으로 확보해가고 있었다.
--- p.44~45
조선 초기의 관계 사료를 읽으면서 필자는, 어쩌면 세조왕권이야말로 그 같은 문제의 해명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다소나마 열어두고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원래 국왕이 될 위치에 있지 않았던 세조 자신이 정변(政變)을 일으켜 왕권을 탈취한 처지였으므로, 그 비정통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역으로 누구보다도 가장 왕위·왕권의 전제성을 확고히 하기 위한 노력을 의도적으로 기울였다는 사실이 사료상으로 어느 정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적 성품이 상대적으로 경정(徑情) 직절(直截)하여 자신의 심경을 많이 그대로 토로하는 편이므로, 왕권의 행사와 관련된 객관적 정세를 어느 정도 사료상으로 읽어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 p.74~75
이 사건은 중앙에서 조사하는 도중, 심지어 홍윤성이 홍산 호장(戶長) 이효생(李孝生) 등으로 하여금 오히려 윤씨 편이 “대신을 모해(謀害)”하기 위하여 사건을 꾸몄다고 ‘무고(誣告)’한 일까지 더하여 탄로 났다. 대간의 극단한 상소가 잇달아 홍윤성의 처벌을 주장하였으며, 신숙주 등도 “석 을산이 살인한 것이야 윤성이 처음에 어찌 알았으리오마는, 그러나 몰래 수리(首吏)를 시켜 오히려 윤씨를 해치려고 한 일이야 그 원정(原情)으로 말하면 어찌 무죄라고 할 것입니까”라고 하여, 홍윤성의 무고죄(誣告罪)를 국왕 앞에서도 명확히 말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살인에 직접 관련된 하 수인(下手人)들만을 처형하는 선에서 그쳤을 뿐, “무고의 일은 모두 그의 아랫사람들이 한 짓이요, 윤성이 아는 바 아니다. 이 작은 일을 가지고서 공신을 죄줄 수는 없다”고 하여, ‘원훈’을 끝내 보전하였다. …
세조는 홍윤성의 무단(武斷)과 군사 은점(隱占)에 대해서만 힐책함으로써 그의 지나친 호강(豪强)을 자못 억제하려고는 하였으나 그의 무고행위는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반역에 관련된 죄가 아니고서는 끝까지 ‘원훈’을 왕권과 ‘일체’로 생각하여 보전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천도(天道)를 체현’한다는 왕권의 본질과는 어긋나는 처사였다.
--- p.90~91
정창손은 결코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는 것을 두고서가 아니라, 세자가 ‘크게 통달한 후’라는 사실에 찬동하는 뜻으로 ‘윤당’이란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 실언을 두고 조처한 세조의 문책은 모든 신료(臣僚)에게 그야말로 왕권, 왕위의 초월성에 대한 인식을 다시금 깊이 되새기게 하는 엄중한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정창손의 다른 마음은 ‘천지 귀신’조차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일편단심을 세조 자신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세조와 같은 전제왕(專制王)을 섬기는 데는 주관적 단심(丹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전위’의 뜻으로 받아들여져서 혹시라도 난신적자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모든 것을 철저하게 현재의 왕권·왕위 위주로 생각하고 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 p.94
이미 누누이 살핀바 신숙주와 한명회는 세조 일대를 통하여 가장 유능한 신료로서 인신(人臣)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신임을 받으며 중용된 원훈(元勳)이었다. 아마 인간적인 면에서도 여타의 어느 군신보다 가까운 관계를 지속한 사이였으리라고 보인다. 실상 그들의 ‘무례’와 ‘전천’이란 것도 그같이 친밀한 관계가 오래 지속됨으로 인하여 생겨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전말을 검토해보면, 세조는 그들에 대해서조차 결코 ‘일체’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그는 그들의 ‘무례’와 ‘전천’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매우 못마땅한 감정을 움켜쥐고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그는 결코 그 감정을 털어버리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다가, 반란 연루설이 나온 기회를 이용하여 엉뚱한 다른 관인을 형사(刑死)시켜 가면서 조정을 ‘숙청’하고, 끝내 그 감정을 발설하여 모든 신료가 양자의 죄를 성토케 하고, 그 성토의 논조에 대해서는 칭찬도 해주는 거조를 벌였다. 양자의 ‘무례’와 ‘전천’의 죄과를 널리 드러내며 극도로 부각시키고 난 후에야 일을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 p.102
훈민정음의 제정은 조선 초기 제도 정비기의 문화적 주체성의 창달에 관한 사례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이 시기 백성이란 존재가 이미 맹목적으로 지배에 복종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이제 가르쳐 깨우쳐가면서 통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초한 교화정책의 소산이었다. 그것은 성리학적 교화라든가 주체성이라는 것을 거론하기 이전에, 자국의 ‘어리석은 백성’이 일상에서 쓰는 말을 문자로 표현할 수 있게 한다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떳떳한 사업이야말로 진정한 주체성의 정립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 p.153
그런데 조선 성리학은 국가 교학으로서의 성격을 결코 지양하지 못하고 대체로 지배층 위주의 학술이론으로 일관하였다. 성리학에는, 그 이전의 고전 유교에서부터 워낙, 서양식 의미에서와 같이 인간의 자아를 위주로 하는 사유가 결여되어 있었다. 넓은 의미의 국가 통치론이었던 것이다. 조선 성리학 또한 넓은 의미에서 정치 교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시종하였기로, 학문 자체에 고유한 순수 이론을 독자적으로 개발해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정치와 깊이 결탁할수록, 이상정치인 왕정을 실현하고자 하는 그 본연의 성격 또한 퇴색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실학이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지니면서 탄생한 것이다.
--- p.206
이이는 왕정의 구현을 위한 세도(世道)의 만회를 자임하면서, 자신의 개혁론을 따라 동요됨이 없이 3년만이라도 실행한다면 왕정을 반드시 구현할 수 있다는 다짐을 여러 차례 피력하였다. 선조임금 또한 이이를 크게 신임하고 국정을 ‘위임’한다는 대화까지 직접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의 경제개혁론은 한 가지도 시행되지 못했을까? 무엇보다도 국왕이 변통하기를 좋아하지 않음에서 기인한다고 이이는 진단한다.
--- p.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