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평소보다 귀가가 늦어지면 슬슬 불안했다. 자정 즈음 밖에서 누군가 쿵쿵 계단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면 부리나케 달려가 형광등을 껐다. 내 방은 현관 옆이라 식구들이 귀가할 때 내가 자는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방문이 잘 닫혔는지 확인하고 이불 속으로 재빨리 들어가 자는 척했다. 갑자기 불을 끈 것을 아빠가 눈치챘을까 봐 초조하고 두려웠다. 온몸의 신경은 곤두서고 잔뜩 예민해졌다. 제발 그가 투게더, 셀렉션, 엑설런트 등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며 깨우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두려움에 떨다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열여섯 살의 나를 직면했다. 어른이 돼 마주한 그 시절의 내가 안 되고 가여워서 다시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대체 엄마와 할머니는 무슨 짓을 한 거지? 성인 남성에게 험한 꼴을 당하고 있는 아이만 어떻게 거실에 남겨두고 각자 자기들 방으로 잠적할 수 있지? 홀로 공포를 맞서고 있는 어린 나의 지독한 외로움에 마음이 시렸다. 덜덜 떨고 있는 아이를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꼭 안아주고 지켜주고 싶었다.
엄마의 진심은 자식들이 영원히 자신에게 의존하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로 남아있기를 바랐다. 성인이 된 자식에게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강한 애착을 나타내는 엄마는 자식들의 독립을 지연시키고 무기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엄마는 이것이 엄마로서의 역할이자 의무이고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다.
착하고 잘해주는데 유독 불편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엄마가 바로 전형적인 그런 사람이다. 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을 하거나 선행을 베풀어서 상대방에게 부담감을 주고 죄책감을 심는 것은 인에이블러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다. 남에게 잘해주고 욕먹는 사람이나, 착한데 주변에 괜찮은 친구가 없는 사람은 인에이블러일 확률이 높으니 거리를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너무 사랑해서 때리고 상처 준다는 말은 옳지 않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뭔가 하나라도 더 잘해주고 싶고,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어떻게 폭력을 휘두르겠는가. 보호하고 아껴주고 싶지, 가슴이 미어져서 어떻게 감히 고통을 주고 상처를 입히겠는가. 세상에 단점 없는 사람이 없고,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애정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어떤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폭력은 그저 폭력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감정을 숨기고 이성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을 선호하지만, 지나치게 밝고 긍정적이면 오히려 마음에 상처가 깊은 사람일 수도 있다, 나처럼. 캔디의 노랫말처럼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대로 살아가면 마음속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해서 부정적인 감정 억압에 익숙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데는 미숙한 어른아이가 되고 만다.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은 경험이 없어서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고 있구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고, 엄마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고스란히 재연하고 말았나 보다.
주변을 둘러보면 젊은이에 한정되지 않고 중장년층, 노년층에서도 나이는 마흔 살, 쉰 살을 훌쩍 넘고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데도 정신은 일곱 살 착한 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러한 정신적 미성숙과 심리적 빈곤은 한 세대 아래로 똑같이 대물림되고 있다. 세상이 급변하는 것 같지만, 우리가 변함없는 불행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갈등을 극도로 회피하는 부모님의 ‘나는 예민하고 공격적인 사람’이라는 왜곡된 시각에 매몰돼 무던한 온화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써왔다. 이제는 나의 지나친 선량함을 믿고 ‘나처럼 이해심 깊고 참을성 많은 사람이 화가 날 정도라면 누구라도 화를 낼 만한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해서 적절히, 제대로 분노를 표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사이드 아웃」처럼 내 안의 기쁨이만이 아니라 슬픔이와 버럭이와 까칠이, 소심이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려고 한다.
오랜 콤플렉스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수용하자 마음이 그토록 편안할 수 없었다. 끝없는 갈등으로 고통받던 내면에 고요한 평온함이 깃들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인생의 중요한 변화를 맞이한 순간이었다. 나는 좀 더 오롯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모든 가족이 따뜻하고 애틋하지는 않다. 오히려 만나서 불행한 가족도 흔하다.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은 가족 아닌 가족들이다. 우리 사회는 가족애를 유난히 강조한다. 혈연에 기반한 가족에게 집착하는 경향도 짙다. 그러나 가족이라도 인연이 다 했으면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절연하고 사는 부모-자식, 남보다 못한 가족이 생각보다 수두룩하다. 그러니 가족이라도 마음 가는 대로 관계를 정리한다고 괜한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
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렁텅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구나. 지금 나는 기적을 이루고 있구나.
부모로부터 받은 내면의 상처와 트라우마가 깊다면, 자기 마음의 치유와 회복이 먼저이다. 그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계속 이어갈지 말지는 실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치유되었는지에 달려있다. 감정의 골이 깊다면 치유와 회복에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치유 과정이다. 부모와 관계를 단절하고 거리를 두며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과 감정을 먼저 살피는 것이 결국은 진정한 정서적 독립의 시작이자, 언제가 될지는 모를 용서와 화해의 준비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좀 더 쉽게, 좀 더 일찍 ‘굿바이, 마더’, ‘굿바이, 파더’라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자신의 인생이 열릴 테니까.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