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인은 수학에서는 메소포타미아인보다 훨씬 뒤처졌다. 산수는 덧셈과 뺄셈 수준에 머물렀고, 대수학의 이해도 초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천적 기하학에서는 상당한 지식을 가졌다. 기하학은 나일강의 범람으로 없어진 농지의 경계를 다시 구분한다든가, 피라미드를 축조한다든가 할 때의 필요 때문에 발달했다. 이런 종류의 토목 사업에서는 이집트인이 같은 시대의 메소포타미아인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들은 아직 사고방식이 신관의 지배와 종교의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진정한 과학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메소포타미아인처럼 이집트인도 진정한 과학적 방법의 발달 없이 필요한 기술을 습득했다. 이집트인은 우리의 역법의 직접적 선조가 되는 태양력을 세계 최초로 만들어냈다. 그들은 고왕국 초기에 이미 나일강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결과, 홍수 범람의 평균 주기가 365일임을 밝혀낸 것이다.
--- p.63 「제1장 원시사회와 최조의 문명」중에서
국가가 새로 태어난 모든 아기의 생존 적합성을 심사하고, 불구이거나 병약한 아기는 죽게 내버려두었다. 소년은 7세에 가족을 떠나 국가의 통제 아래 들어가, 엄한 규율 아래 고된 훈련을 받고 국가에 헌신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는 20세가 되면 병적에 오르고, 30세까지 병영에서 생활했다. 그 시기에 결혼은 허용되었으나, 병영 생활은 계속해야 하며 밤에만 부인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는 서른이 되어서야 완전한 성인으로 인정되어 민회에 참석하고, 저녁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60세까지 군사훈련을 하며 군대 동료와 공동으로 저녁 식사를 해야 했고, 60세 이후에야 비로소 병영에서 완전히 벗어나 가정에서 가족과 생활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 시민은 복종과 준법의 정신 속에서, 사생활의 의지 없이 오로지 공동체의 유기적 일부로 존재했다. 전사-시민 가족의 생계는 헤일로타이가 떠맡았다. 이들은 국가가 시민의 몫으로 분배한 토지를 경작해 주었다.
--- p.108~109 「제2장 그리스 문명」중에서
결혼은 원래 평생을 함께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기원전 3세기에 이르러 이혼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혼은 양쪽 모두가 요구할 수 있었고, 결혼의 파탄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이혼은 기원전 1세기에 특히 성행했는데, 이때는 정치적 혼란기로서 결혼이 정치적 동맹을 위해 이용된 탓도 컸다. 여성은 조혼이 널리 행해졌다. 소녀의 법적 최소 결혼 연령이 12세였는데, 흔히 14세쯤에는 떠밀려 결혼을 했다. 키케로(Cicero)의 딸은 공화정 말기 로마 상류사회 여성의 일생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그녀는 16세에 결혼한 뒤, 22세에 과부, 일 년 뒤 재혼, 28세에 이혼, 29세에 다시 재혼, 33세에 다시 이혼, 그리고 34세에 삶을 마쳤다. 로마 사회에서 이는 여성으로서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 p.190 「제3장 로마 문명」중에서
고전의 필사는 유럽의 문화 발달에 또 하나의 귀중한 공헌을 했다. 그것은 오늘날 유럽에서 쓰이고 있는 글씨체의 발달이다. 로마 시대에 글은 대문자로 썼다. 그러다가 로마 말기에 다양한 형태의 소문자가 도입되었는데, 메로베우스 시대에 쓰인 글자체는 판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궁정학교에서 고전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읽기가 쉬운 글자체가 고안되어 이전의 글자체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유럽의 글자체는 모두 이 ‘카롤루스 소문자’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다.
--- p.310 「제4장 중세 유럽 문명의 형성」중에서
박해가 심해지고, 나아가 살해 계획까지 알려지자, 무함마드는 622년 대다수가 자신의 하심 씨족에 속하는 200여 명의 지지자를 이끌고 북쪽에 있는 메카의 경쟁 도시인 야스리브(Yathrib)로 도피했다. 야스리브에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어느 정도 유일신 신앙에 익숙해 있던 야스리브 주민들이 이들을 통해 무함마드를 초청한 것이었다. 야스리브 주민들은 무함마드를 그들 부족 간의 갈등을 해결해 줄 강력한 지도자라고 판단했다. 그 도시는 나중에 메디나(Medina), 즉 ‘예언자의 도시’로 개명되었다. 역사에서 히즈라(Hijrah, Hegira)로 알려진 이 ‘이주’가 행해진 해는 이슬람력의 기원 원년이 되었다.
--- p.377 「제5장 형제 문명들」중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치명적인 단점은 제위 세습이 원칙으로 확립되지 못하고, 대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관행이 굳어졌다는 점이다. 작센왕조와 잘리어왕조는 각각 한 세기 남짓 동안 왕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제위는 자주 이리저리 옮아갔으며, 많은 경우 대제후들은 자신들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둘 허약한 황제를 선출했다. 그 결과 프랑스 왕들이 느슨한 봉건체제를 좀 더 중앙집권화한 왕국으로 개혁하는 과업과 씨름하는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차츰 각 봉토, 각 주교구, 각 도시가 독일 안에 있든 북이탈리아에 있든 사실상 작은 독립국가로 바뀌어간 것이다.
--- p.434 「제6장 중세 봉건사회의 성장」중에서
고대 로마 세계와 달리 중세 문명은 ‘몰락’하지 않았다. 야만인 침입의 물결도, 사회질서와 상업의 붕괴도 없었다. 오히려 중세가 끝날 때, 서유럽은 대단한 활력과 팽창 정신을 드러냈다. 중세는 뚜렷한 단절 없이 근대로 이동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내세우고, “여기서 중세가 끝났다”라고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현재의 문명이 중세의 연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분명 서유럽 생활의 가시적 양상은 크게 변해 왔으며, 그 변화는 14세기에 일련의 사회적 재난을 거치면서 속도가 빨라졌다.
--- p.502 「제7장 중세 봉건사회의 변화」중에서
헨리 8세는 영국의 교회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제한하는 여러 조치로 압박을 가했으나, 교황은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었다. 안달이 난 헨리 8세는 1532년 마침내 토머스 크랜머(Cranmer)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고, 이듬해 1월 서둘러 그의 주재 아래 비밀리에 앤 불린(Anne Boleyn)과 결혼했다. 왕비의 시녀였던 앤은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다. 이후 곧 크랜머는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로 하고, 헨리와 앤의 결혼을 합법화했다. 그리고 1534년 마침내 의회는 수장법(Act of Supremacy)을 제정하여 영국의 국왕이 영국 교회의 최고 수장임을 선언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영국의 교회와 로마교황청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어 영국의 교회는 독립된 영국교회가 되었다. 반가톨릭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국교회는 이제 국왕의 정책 추진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엄청난 액수의 교회 소득이 왕실 금고에 쏟아져 들어갔다.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한 뒤, 헨리는 1539년 수도원을 폐지하고, 방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상당한 부분을 측근과 지지자들에게 분배했다. 그리하여 헨리는 쪼들리던 재정을 넉넉하게 확보했을 뿐 아니라, 로마와의 결별에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든든한 지지 세력으로 지주 계층을 새로 창출했다.
--- p.617~618 「제8장 근대 유럽의 등장」중에서
은행의 이와 같은 발달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의 하나는 국가 채무 관념의 발달이었다. 17세기까지도 정부가 빌린 돈은 국왕의 개인 빚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새 왕은 종종 선왕이 남긴 빚을 갚기를 거부했다. 심지어 중세 말 은행가 자크 쾨르는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거금을 빌려주었다가, 갚지 않으려는 국왕의 음모에 걸려들어 유죄 선고를 받고 전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정부와 거래하는 은행은 파산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이자율은 그 위험도에 상응하여 높았다. 그런데 17세기에 왕이 진 빚은 왕 개인이 아니라 정부가 진 것이라는 관념, 이를테면 국가 채무 관념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제 은행은 좀 더 안전하게 거금을 정부에 대여해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관념은 왕권이 약한 영국과 공화국인 네덜란드에서 먼저 발달했다. 그 덕분에 그 두 나라 정부는 은행에서 낮은 이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으며, 이는 전시나 다른 비상시에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 p.750~751 「제9장 절대주의의 전성」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