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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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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6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176쪽 | 280g | 128*188*20mm
ISBN13 9791190187367
ISBN10 1190187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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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갑자기 하얘졌다. 나는 지금 흰 와이셔츠를 입고 흰 사무실에서 매일 일하고 있다. 청바지에 파랑 앞치마를 걸치고 일하면 납세는 영원히 청색신고(납세자가 세액을 결정하여 신고·납세하는 것으로, 한국의 녹색신고제도와 유사)를 해야 했을 텐데, 예기치 않게 화이트칼라가 되었다. 더구나 하얀 연인까지 있다. 인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의 하얀 연인은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하얗다. 마루노우치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히나 인형처럼 화장을 하얗게 하지만, 그녀는 목덜미에서 위팔 안쪽까지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하얗다. 본인은 통통해 보여서 콤플렉스라고 했지만, 어딜 봐도 그녀는 통통하지 않다. 오히려 가슴이나 허리 부근은 살이 좀 더 붙는 편이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가늘다.
---「첫 문장」중에서

그건 그렇고 시어머니가 와 있는 날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야근을 한다. 시어머니가 낙담할 얼굴이 떠오르지만 하는 수 없다. 남편이 자신의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하기 껄끄러워하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니다.
--- p.53

쿠루미의 맨발은 하얗고 보드랍다. 허벅지와 종아리는 살이 찌는지 신경 쓰는 모양이지만, 오히려 딱 적당하게 탄력이 있어서 긴 무릎 아래의 라인에서 이어지는 발목이 잘록해 보여,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남성을 꼬이게 하는 다리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 p.88

폴란드인 청년은 중세 성에 사는 왕자 같은 미남이었다. 성형을 했을지도 모른다. 요즘 같은 시대에 성형은 흔해서 너무 아름다우면 오히려 성형으로 오해받는다. 나는 할머니가 젊었을 때 순간 빠졌던 사랑 덕분에 혼혈이라서 타고나기를 예쁘게 태어났지만, 그 덕분에 득을 본 일은 특별히 없었다. 오히려 험담만 들어서 인간을 불신하며 자란 듯하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건 이미 56년이나 전 이야기였다.
--- p.154

나는 주부지만 글을 쓰는 일을 한다.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을 받으면 주부 말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정이라는 장소가 어디보다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곳인것도 아니다. 아들의 엄마라는 것이 첫 번째 의무도 아니다. 주부라는 그럴싸한 직함이 좋을 뿐이다. 남자가 결혼해서 집안일에 전념하면 사회적으로 무직이지만, 여자는 결혼하기만 하면 ‘주부’가 된다. 일은 언제 관둬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신을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을 테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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