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철은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1935년 11월 18일에 아버지 유일봉과 어머니 이복선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첫째 아들은 어린아이 시절에 병사하였고 둘째 딸 창기(이후로 추자로 개명)와 나는 세 살 차이를 두고 가난한 어린 시절에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하였다. 유기철의 나이 네 살 때(추정) 부모님과 우리 남매 그리고 외삼촌 이현호와 외숙모 모두 여섯 식구가 고향 땅을 등지고 만주(봉천)로 이민 길에 오르면서 고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워낙 어린 나이여서 고난의 일상들을 자세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희미하게나마 여러 생활의 파편들이 기억되곤 한다.
만주 봉천에서의 유랑 이민 생활은 부모님을 비롯한 여섯 식구가 정착하기엔 너무도 힘들고 어려움이 많았다. 고생을 견디다 못해 현지정착을 단념하고 다시 귀국 열차에 몸을 싣고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만주에서의 생활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한 것으로 기억된다. 고난의 만주 이민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황해도 땅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부모님 생각은 전라도로 다시 돌아가기보다는 황해도에 정착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는지 황해도 남천(南川)이라고 하는 역에 여섯 식구가 내리게 되면서 황해도(남천)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서부터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조금씩 또렷해지기 시작한다.
그때가 1942년 여덟 살이 되는 해였고 남천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당시 황해도 평신군 남천면 시골인데도 일본인 군인들은 물론 많은 일본사람들이 현지에 거주하였다. 우리 국민학교 선생님도 일본인 “가다기리” 씨가 담임교사로서 학생들을 지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945년도 8월 15일에 태평양전쟁이 끝이 났다.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소련 군대가 진주하면서 김일성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인민공화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맞이한 공산주의 치하의 삶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는 강압 독재 체제는 하루하루 숨 막히는 삶이었다. 그래서 남한(대한민국)으로 월남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때가 국민학교(인민학교) 5학년 때인 1947년도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황해도 남천(평산군 남촌면 신남천리 4구 13번지)에서의 객지 유랑생활을 하던 약 7~8년간 참으로 갈등이 심하셨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컸지만 두 분의 성격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분노와 증오로 격렬한 다툼이 거의 매일같이 지속되었다. 아버지가 가족들의 생계조차 저버린 채 집을 떠나 몇 달이고 가출 생활을 하시는 바람에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생계가 막연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어머니의 병환(정신적 불안정에서 오는 가슴앓이 속병)도 나날이 깊어지셨다. 이런 환경은 어린 남매들 성장기의 성격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기억된다. 이때부터 형성된 아버지에 대한 불신과 미움의 감정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본인이 성장해서 자립한 이후 지금까지도 한으로 남아있다. 이는 성장기의 성격 형성뿐 아니라 반드시 성공해서 그 많은 회한을 보상받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으며 그때 어린 마음의 상처가 본인의 생애에 큰 영향으로 작용했다.
어쨌든 황해도 평산군 남촌면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험난했던 38도선 월남도 하였고 고난을 극복하며 송악산 경계를 뚫고 경기도 개성시 관훈동에 네 식구가 무사히 안착하게 된다. 이때 나는 개성 원정국민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6학년 말에 졸업 한 달을 앞두고 개성에서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시)로 이사하게 되고 이리에 있는 일출국민학교 6학년에 편입되고 한 달도 안 되어 국민학교를 졸업한다. 이때가 1948년이다.
여기서 잠시 개성에서의 국민학교 1년여 기간을 회고해 본다. 이북 북한 땅에서 도망 나온 월남 피난민으로서 미군이 제공하는 구호 식량을 공급받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그러나 네 가족이 생계가 막막한 개성 땅에 이대로 머무를 수 없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님 세 식구는 개성을 떠나서 서울로 갔고 서울에서 어머니와 누님은 이리로 각각 흩어졌다. 국민학교 5학년 때 부모님과 가족을 떠나보내고 개성에 혼자 남는다는 것은 어린 나이에 엄청난 외로움과 두려움, 고난의 날들이었다.
부모님이 개성을 떠나면서 미군이 월남 피난민에 주는 우리 가족 배급식량(4인분)을 개성 거주 현지인에게 주고 나의 경제적 지원을 부탁한 터라 한창 성장기에 있는 나는 그들이 주는 밀끼우리 수제비 한두 덩이를 먹고 견디기에는 너무나도 배고팠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는 밭에 있는 고구마와 감자를 캐 먹고 배가 아파 쓰렸던 기억, 밤이면 일본식 다다미방에 벼룩한테 물려 잠을 못 자고 주인 부부 방에 가서 혼나던 기억, 그보다도 어머니가 보고 싶고 그리워서 밤이 되면 이불 속에서 흐느껴 울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하루는 학교 같은 반에 있는 구교태라는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처음으로 소고기 장조림에 개성식 김치를 흰밥에 배불리 먹고 기뻐했던 기억도 난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교성적은 좋아서 부반장이 되어 비록 부모 형제 없이 모르는 사람에게 얹혀사는 배고프고 고달픈 시절이었으나 졸업 며칠을 남기고 떠나올 때까지 너무도 많은 추억들이 남아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유랑생활」중에서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3월에 공군 하사관에 편입 입대 이후 다음 해인 54년 9월에 임관하여 16년간의 공군 장교 생활을 마무리하였으며 1969년도에 현대자동차 부산지역 정비사업소장으로 발령받아 사업소를 창설한 다음 해에 울산 자동차 조립공장 품질 관리실장으로 전근 후 2년도 안 되어 73년에 또다시 자동차 본사 정비 사업부장으로 발령받아 울산을 떠나 서울로 이동하면서 본사로부터 현대자동차 출고 차량의 전국단위 사후 정비 관리를 수행할 현대자동차서비스 주식회사 창설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이때 새로이 창설되는 현대자동차서비스(주)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내정된 분이 바로 정주영 회장님의 장남이신 정몽구 회장이었으며(당시는 사장) 새 회사의 창설지원 멤버로서 정몽구 당시 사장을 보좌한 임무가 정몽구 회장과의 인연을 맺게 된 시작이었다. 현대자동차서비스(주)가 1974년도에 지금의 서울특별시 원효로에 본사를 두고 창설 당시 정몽구 사장, 그리고 본인은 정비 담당 이사로 발령받아 본격적인 전국 단위 지방 정비사업소의 설립업무와 전국단위 부품공급(HMC 부품) 업무를 추진하게 된다. 정몽구 회장과의 인연은 1973년부터 시작되어 1977년도에 현대정공을 새롭게 설립, 본격적인 해상 운송용 표준화 컨테이너의 양산수출을 비롯해서 철도차량 및 방산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현대차량을 인수함과 동시에 정몽구 사장은 회장으로 승진되고 본인도 상무, 전무, 부사장을 거쳐 사장으로 발령받게 된다.
그 이후 현대정공은 정몽구 회장의 탁월한 사업 확장 및 통솔능력을 바탕으로 해서 자동차 사업에도 진출 대표적인 RV차량인 갤로퍼와 싼타모의 생산과 해외수출사업도 성공하면서 정몽구 회장이 주도하는 현대정공의 대내외적 이미지를 새롭게 부각하게 된다. 현대정공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당시에 대우 독점시장이던 지하철 5호선 수주에 성공함과 동시에 국가사업으로 추진된 고속전철사업도 불란서(테제베) 사와 함께 수주하는 등 철도차량 시장영역의 확장 변화에 크게 성공하는 데 이어서 항공사업 진출을 위한 헬리콥터 조립 생산(일본 가와사키 중공업과 제휴), 이어서 공작기계 생산(일본 야마자키 사와 제휴)에 의한 국내외 경쟁시장에 진출 하는 등 눈부시고 주목할 만한 제조 분야 경쟁시장을 뚫고 성공을 거듭함으로써 우리 정몽구 회장의 기업가적 탁월한 지휘 능력을 국내외에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
정몽구 회장의 직속 부하 참모로서 본인이 현대를 떠나는 1999년까지 현대 재직 30년 기간 중에서 26~7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오로지 정몽구 회장을 보좌하는 일급 참모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보좌해 온 것이다. 돌이켜보면 27년이라는 긴 세월을 오로지 한 분 상사를 모시고 직속 부하 참모로서 역할을 다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마디로 표현해서 참으로 행복했고 감사했고 하루하루가 신명 나는 생활이었다. 그만큼 우리 정몽구 회장은 우리가 모두 존경하는 상사, 지휘관이었고 우리 모두가 신명 나게 정열적인 열정으로 일할 수 있도록 장을 만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기회와 동기를 부여해준 존경받는 우수한 지도자요 지휘관이었다.
본인이 2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을 가장 가까운 지근거리에서 직속 상사로 모신 정몽구 회장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외람된 점이기는 하지만 정주영 명예회장님의 장남이라는 사실을 떠나서도 그는 한마디로 명장 중의 명장이었다. 외모로 풍기는 과묵하고 투박해 보이는 모습 뒤에 숨겨져 있는 따스한 인정미와 애정 어린 친화력은 많은 동료친구분과 함께 그를 진심으로 따르고 섬기려 하는 많은 부하 직원들을 거느린 덕장이었으며 회사의 장래와 미래를 예측 판단하는 통찰력, 한번 결심하면 밀어붙이는 추진력 그리고 임기응변에 대응하는 기동성 등 대기업의 통수자로서 갖추어야 할 지·덕·용. 추진력을 두루 갖춘 명장 중의 명장이라는 사실이다.
정몽구 회장이 현대자동차서비스(주) 사장으로 임명되고 현대정공 사를 창설하는 27년이라는 기간에 방산, 철도, 컨테이너, 자동차, 밸브, 요트, 컨테이너 밴(VAN), 냉동 TRAILER의 미주와 멕시코 진출 등 해외사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다양한 신규 개발 사업에 참여하면서도 결코 실패는 없다고 하는 신념을 몸소 온몸으로 실천해 보였으며 그를 따르는 많은 부하 직원들의 진심 어린 존경을 받고 있는 덕망 있는 명장이었다.
한 부부도 30년을 함께 하다 보면 이런저런 다툼도 때로는 미움도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 현대정공이 함께한 그 긴 27년이라는 세월은 미움이나 다툼보다는 오로지 우리에게는 신성한 목표가 있었다. 우리 목표 달성의 명분으로 똘똘 뭉쳐 달려 나아가는 그리고 성공을 쟁취하는 열정과 정열 그리고 감사가 있을 뿐이었다.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온 27년이라는 세월은 피로와 잡념, 두려움, 다툼이 없는 오로지 시련과 역경을 딛고 성공의 목표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려온 승리와 감사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우리 정몽구 회장은 우리 모두가 이러한 불같은 정열과 의지를 가지고 뛰고 달릴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고 신명 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과 동기를 준 훌륭한 지도자이자 지휘관이었다. 그는 많은 우수한 관리자와 일꾼들을 키워 낸 일등 공신이다. 그러기에 현대, 기아자동차 통합인수 이후 회장으로서 짧은 기간 내에 현대차 그룹을 통합 안정시키고 오늘의 세계적인 현대차 그룹의 기반을 만드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신 분으로 존경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임을 확신한다. 지금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정몽구 회장님의 조속한 쾌유와 동시에 그 옛날 중후하면서도 따사로운 그 분의 모습을 다시 뵙게 되기를 기도하며 끝으로 정의선 회장이 영도하는 현대차 그룹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반드시 세계 최고의 자동차 그룹사로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끝으로 본인과 함께 위로는 정몽구 회장을 모시고 그 오랜 세월을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회사의 성공과 영광을 위해 고통을 분담 수고하고 애환을 같이 해온 현대정공의 역전의 용사이자 전우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한다. 우리의 현대차 그룹이 힘찬 날개를 펴고 푸른 창공을 향해 비상하는 독수리와 같이 밝고 예리한 눈동자를 통해 GLOBAL 자동차 경쟁시장의 미래를 내다보고 GLOBAL 최고의 일등 경쟁기업으로 우뚝 서는 현대차 그룹으로 성공함이란 확신을 가지고 함께 기원하고 성원해 나갈 것입니다.
현대, 현대차 그룹, 비상하라, 하늘 높이, 그리고 영원하라.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오직 영광이 함께하리니.
한번 현대는 영원한 현대다. 우리 함께 손잡고 가자.
---「현대정공 -현대, 현대차 그룹, 비상하라」중에서
본인이 공군에 입대 임관된 이후 22세가 되던 해에 공군부대 의무실에 근무하던 지금의 내자 “김채락”과 결혼하여 공군에 입대 이후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고 그렇게도 소망하던 세 식구의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현명한 선택을 말하라고 하면 제일 먼저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집사람과의 만남이고 백년해로를 약속한 결혼이다.
본인이 외롭게 성장한 외아들이라는 점에서 어머니는 다산을 권고했고 연년생으로 아이 다섯을 출산하게 된다. 그 첫째가 아들 윤찬, 둘째가 딸 화영, 셋째가 아들 윤권, 넷째가 딸 지영, 그리고 다섯째가 딸 미영이다. 아이들의 탄생과 성장은 모두 어머니의 손자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경제적으로는 비록 넉넉하지 못해 어려웠지만 애들은 잘 자랐다.
본인이 31살 되던 해(결혼 10년차)에 어머니가 59세의 젊은 연세로 돌아가셨다. 얼마 되지 않아 34세에 공군에서 퇴역하고 현대에 취업 되면서 서울의 주소지를 떠나 부산과 울산 그리고 다시 서울로 옮겨 살았다. 어머니가 안 계시는 상황에서 다섯 아이들을 돌보면서 외지로 전전하던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의 어려움은 말로 형언키 어려우리만큼 힘들었고 따라서 아이들 성장 교육에도 아쉬움이 많았다고 생각된다.
나의 아내 김채락은 북한의 평북 만포와 강계에서 1녀 3남의 장녀로 태어나서 6.25전쟁 중 월남하여 대구에서의 피난시절을 보냈으며 대구 수리참 병원 간호사 시절 연애로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아내는 한마디로 평생을 오직 남편 한 사람과 가족들을 위해 희생해 온 내 평생의 소중한 반려자이다. 엄격한 부모님의 가정교육을 받은 탓에 항상 책임감이 강하고 넉넉지 못한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2남 3녀의 다섯 아이들을 대학까지 교육시키는 데 한평생을 바쳐온 전형적인 현모양처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아내 김채락 없이는 오늘의 유기철은 물론 우리 식구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참으로 우리 일곱 식구와 어머니 등 여덟 식구의 우리 가정을 이끌어온 절대적 노고와 고생에 대해 감사할 뿐이다. 1999년도 본인이 현대 직장을 떠나는 그해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하게 되고 다행히 중증을 면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의 정성어린 간호 덕에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 그동안 다하지 못한 남편의 역할과 애정을 백년해로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보답할 것을 다짐한다.
---「나의 아내 김채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