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 방울의 의지
민구 시인의 시는 충만함을 지향하지 않는다. 무언가로 꽉 차 있음을 욕심내지도 않는다. 마치 “일 분이 되기 전 영원한 오십구 초”처럼 완결이나 완성과는 거리를 둔 듯한 그의 시에서 화려한 수사나 예술가연하는 자의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에 평범한 일상의 장면과 소소한 내면의 언어가 시를 채우는데, 그것으로만 가득 차 있는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은 것이 민구 시의 묘미라면 묘미겠다. 무미하되 건조하지 않고, 담담하되 답답하지 않고, 순순하되 심심하지 않은 그의 시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물 한 방울의 이미지로 집약된다. 하나씩 풀어보자면, 물 한 방울처럼 아무 맛이 없으면서도 무슨 맛이 계속 나는 듯한 잔상을 남기는 화법. 물 한 방울처럼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으면서도 해변이든 숲이든 하늘이든 무엇이든 다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 세계. 뻔하디뻔한 일상 가운데서도 “중력을 무시하고 떠 있는 물방울 하나”를 발견하는 상상. 그런 환상조차 다시 물 한 방울처럼 아껴서 소비하는 검소한 언어가 민구 시의 일단이라면, 그 극단에는 시를 향한 아니 이 세계를 향한 물 한 방울의 의지 같은 것이 보이지 않게 들어 있다. 탄생하는 순간부터 시시각각 증발하는 것이 물 한 방울의 운명이겠지만, 그 운명에 표나게 대들기보다 순순히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저항하는 비폭력의 힘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물 한 방울이 마를 때까지” “가만히 있”으려는 자세는 물 한 방울이 마를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겠다는 의지의 다른 말이다. 시집의 핵심 구절이기도 한 “그는 거기에 있겠다고 했다”는 발언이 미력하지만 끈질기게 이 세계를 응시하는 자의 조용한 다짐이라는 점도 함께 짚어둔다.
- 김언 (시인)
우산의 심정으로 그를 기다리는 일
이 시집엔 조임이 없다. 나사가 없다.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를 느슨하게 거닐 수 있다. 킥킥 웃다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슬퍼질 수 있다. ‘한적한 외로움’은 이 시집이 입은 옷이다. 쓸쓸할 때마다 비석이 세워지는 정원이 있다면, 이 시집의 정원에는 이쑤시개처럼 작고 마른 비석들이 여름비처럼 모여 서 있을 것 같다. 멀리서 보면 웅크린 고슴도치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시 속 화자들은 여기에 있고, 여기에 없다. “머랭”처럼 순하고 언제든지 녹을 준비가 되어 있다. 밤에 손톱을 깎으며 쥐를 기다린다. “내 손톱을 깨물어 먹어요/오늘부터 나로 살아요.” 말하거나 “세상에 없는 이름”으로 불린다. “사람도 사랑도 없는 외로운 공간”에서 없는 “영구”를 생각한다. 없음. 영구 없음. 흐느낌 없음. 청승 없음. 기다림 없음. 외로움 없음. 시련 없음. 그러다 문득 한꺼번에 슬퍼짐. 녹아 사라짐. 없는 ‘나’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거기)에 있다. 이곳에 있는 게 부끄러워서, 추워서, 가난해서,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거기”에 있다. 사라짐은 존재를 투명하게 숨겨, 잠자코 생을 견디는 일이다.
이 시집을 읽는 일은 “거기에 있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다. 이쪽으로 오기를? 아니다. 그건 아니다. “구름을 따라가면/비를 맞고 있는 사람”이 있고, “우산 사세요, 우산 사세요/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다면. 이 시집을 읽는 일은 우산이 된 심정으로 그를 기다리는 일이다. 비처럼 기다랗고 축축한, 그 사람의 둘레가 되고 싶어 하는 일이다.
- 박연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