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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망루

배이유 | 알렙 | 2023년 06월 1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0 리뷰 22건 | 판매지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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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6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00쪽 | 324g | 144*210*20mm
ISBN13 9791189333614
ISBN10 1189333619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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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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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워 있는데 다리 사이에서 속살거림이 느껴진다. 간지럽다. 나는 참지 못하고 일어나서 화장대에서 손거울을 빼들고 팬티를 내린다. 구부려 앉은 자세로 거울을 갖다 댄다. 검은 붓꽃이 거울에 모습을 드러낸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다. 숨어 있던 입은 얼마 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처음 본 뒤로, 충격을 받은 탓인지 그때부터 뒤늦게 말문이 터진 아이처럼 아무 때나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불만을 달래듯 두 개의 입술을 부드럽게 만진다. 꽃잎이라고 표현하는 그곳은 메말라 있다. 메말라 있는 입술에 검은 붓꽃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가만히 손가락을 찔러 넣어 입술을 벌린다. 수다스러운 입은 자꾸만 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귓불을 어루만지듯 나는 그곳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검은 붓꽃」중에서

여기 모인 분들은 혼자 죽는 게 두려워 여행길에 동참한 거 아닙니까. 이번에도 같이 해보죠. 하루만 더 사용해 봐요. 본이 한 말 중에 제일 길었다. 다들 말이 없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하는 것 같았다. 전열이 흐트러지고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제리는 미간을 찡그리며 한 손으로 긴소매의 팔을 긁어댔다. 착화탄에서 불꽃이 튀며 연기가 올라왔다. 매캐한 연기가 바깥으로 맘껏 뻗어나가지 못하고 천정에 부딪치며 옆으로 퍼졌다. 탁은 연거푸 기침을 했다.
---「홍천」중에서

이순은 앉아서 망연히 하늘과 구름과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문득 발목에 젖은 모래를 털어내며 신발을 벗어 맨발을 내밀었다. 따끈한 모래의 감촉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발가락들이 저마다 자신의 얼굴을 내밀었다. 집 안이 아닌 곳에서는 늘 감춰져 있는 발가락들이 해를 볼 일이 있겠는가. 역사적인 사건인데, 서로 햇빛을 쐬려고 구멍에서 얼굴을 내미는 두더지 같았다. 이순은 발가락 낱낱을 떼어 움직여주었다. 너희를 덩어리가 아닌 개별적 인격체로 존중할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중에서

ㄱ은 11살 이후로 줄곧 성을 지켜왔다. 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괴이한 공격의 무리가 달과 해가 바뀌어 푸른 달이 피로 얼룩질 때 바람과 함께 나타난다는 운명적 예언이 있었다. ‘푸른 달이 피로 얼룩질 때’는 다분히 상징적인 것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 다만 밤과 낮이 바뀌는 경계 시점으로 밤과 관련되어 있다고들 했다. 하지만 진리인 양 떠드는 그 말들이라는 것은 다분히 낮의 진실을 가리기 위한 위장막일 수도 있었다. 밤과 낮의 구별은 무의미했다. 공격 시점이 밤이 될지 태양의 시간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성의 첫 번째 고위 관리자인 클람만 예언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들 말했다.
---「밤의 망루」중에서

경의 또렷한 귀를 본다. 귀를 세우고서 귀주머니가 움직인다. 내 말뿐 아니라, 어설픈 휘파람도 심지어 자신이 흘린 말의 일부도 귀주머니에 서둘러 담는다. 저리 바쁘게 쫑긋거리는 매력적인 그녀의 귀 문(門). 귀주머니 속 흩어진 말 조각들을 맞춰 본다. 어쩌면 이 세상에 없는 낯선 말들의 조합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 기묘하고 낯선 말들의 감각이 농담처럼 흘러나올지도.
---「옛날에 농담이 있었어」중에서

록은 노래 부르다 간주 사이에 문득 뒤를 돌아봤다.?무대 뒤 어둠이 그녀를 골똘히 쳐다본다.?어둠 속 눈이 도마뱀처럼 벽에 붙어서 무대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천연덕스럽게 또아리 튼 무엇.?록은 얼핏 들여다본 어둠 속 눈을 외면하며 마이크를 힘주어 잡았다.
---「소리와 흐름」중에서

판서하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다 햇빛이 내리쬐는 운동장을 본다. 운동장은 텅 비어 있고, 주택가와 경계진 울타리 아래의 테니스 코트에서 하얀 캡을 쓴 두 여자가 공을 주고받고 있다. 햇빛이 환하다. 빛의 내부로 들어가고 싶다. 나는 왜 여기 의자에 묶여 있을까, 안으로 흐르는 피는 끓어서 피부 속을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데, 심장은 뜨겁게 솟구치는데 침이 튀는 선생님의 말은 귀 바깥에서 머물고 교실에는 나른한 잠기 어린 권태가 떠돈다. 입체적이지 않다, 정물, 부당하다, 부조리하다,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과연 무엇을 위해……
---「소리와 흐름」중에서

Y는 지금 차 안에 그대로 있는데, 찰나의 알 수 없는 영상을 보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스르륵 몇 년 전의 그 회색빛 흐릿한 도로를 가고 있는데, 가고 있다고 느끼는데, 비루한 흰 고양이의 긴장을 접촉하던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 같은데, 그때와 현재 사이 한 치의 틈도 없는 그 시간의 밀착감이 피부에 생생히 닿는데, 지금 이 순간과 저 순간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멈춘다 흐른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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