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 인류가 공간을 무대로 삶을 꾸리고, 역사를 일구어왔음을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지만 근대 역사학에서 공간은 상당히 오랫동안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심지어 ‘지리결정론’이라 하여 역사 연구에서 ‘지리’나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입장을 터부시하기도 했다
--- p.5~6

이 책은 필자가 그동안 습득한 공간이론을 한국고대사에 접목해본 것이다. …… 근대역사학에서 공간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이유를 밝히고, 공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주요 개념을 고찰했다. 그런 다음 왕궁, 도성, 소경, 별도에 관한 필자의 실증적인 글에 공간이론을 접목하여 한국 고대 공간의 역사를 새롭게 규명할 연구방법론을 탐색하려고 노력했다
--- p.7

인류는 일찍부터 공간이 인간 생존의 근본조건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실제 인류는 공간을 무대로 삼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를 전개했다. 이런 점에서 공간은 역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 p.12

종래 역사 연구는 주로 역사의 주체인 인간, 그리고 그들이 만들고 빚어낸 제도와 삶의 시간적 변화를 추적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인간 삶의 근본조건을 이루었던 공간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시간 우위의 역사 인식은 근대사회로의 전환과 더불어 형성되었다
--- p.12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 덕분에 인류는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에 따라 전근대 사회의 공간 우세 현상은 점차 시간 우위로 전환되었다. 시간 우위의 역사관이 성립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 p.20~22

거의 모든 사회이론이나 역사이론에서 시간이 공간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공간은 단순히 시간적 과정이 작동하는 선재적先在的 배경으로 상정되거나, 인간 행위의 근본조건이 아니라 우연적인 요소로 치부되었다. 나아가 사회이론이나 역사 이론이 사회변동과 정치적 혁명에 초점을 맞춤에 따라 ‘진보’를 중시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진보 가운데 ‘역사적 시간’이 가장 주요한 차원을 이루면서 모든 공간적 장벽의 철폐, 궁극적으로 시간을 통한 공간의 절멸을 지향하기에 이르렀다
--- p.22~3

공시적으로 존재했던 다양한 사회형태나 정치체는 서구 중심의 진보와 문명이라는 시간 관념에 근거하여 통시적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시간적으로 서열화되고, 이들 정치체의 존립 기반을 제공했던 공간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 p.25

인류 초창기에 공간은 단순히 자연적으로 주어진 존재에 불과했지만, 역사의 전개와 더불어 끊임없이 새롭게 재생산되며 사회적 산물로 탈바꿈했다. …… 인류가 생산하고 조직한 공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역사를 고스란히 담게 되었다. 종래 역사 연구에서 소홀히 다루었던 공간에 주목하면 사회구조나 정치체제 등 역사의 다양한 면모를 더욱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p.29~30

위치와 장소 개념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 위치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장소라는 개념이 생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상대적 위치’는 물리적인 ‘절대적 위치’를 인간의 삶이 담긴 ‘장소’로 전환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 p.34

모든 인간은 매 순간 특정한 절대 위치 속에서 행위를 하며, 그를 둘러싼 요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저마다의 경험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다양한 삶을 파악하려면 먼저 삶의 토대를 이루는 위치부터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 p.40

장소 연구는 특정 인간이나 집단의 행동 양식이나 의식 세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유사한 장소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각 집단이나 정치체의 특성도 추출할 수 있다
--- p.43~4

장소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 인공적으로 생산된 사회적 공간이 어떤 과정을 거쳐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로 고착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 p.45

한국 고대사회를 구성하던 다양한 장소와 그에 담긴 장소 정체성을 다각도로 분석한다면, 한국 고대사를 더욱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국가권력의 창출이나 정치운영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종 정치 행위나 국가의례가 이루어지던 장소와 장소 정체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장소와 장소 정체성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많은 사료를 새롭게 읽기 위한 중요한 개념 장치인 것이다
--- p.50

상대 공간 개념에 입각하면 공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더욱 다채롭게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공간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생산되는지, 공간 스스로 무슨 일을 하는지도 깊이 탐구할 수 있다. 상대 공간 개념은 공간과 사회구조, 공간과 경제 관계, 공간과 정치체제 등의 관계를 이해할 때 유용하다
--- p.53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기준으로 삼아 주변 공간이 전·후, 좌·우, 상·하 등 대칭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 고구려와 백제 도성의 5부[위치부]는 도성 중앙의 왕궁 특히 그곳에 거주하는 국왕의 신체를 기준으로 창출되었다고 생각된다. …… 이는 ‘국왕’의 신체가 국가권력의 담지자라는 고대의 왕자관王者觀과 연관되어 있다
--- p.55~6

‘사회적 생산 공간’이라는 개념은 …… 공간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우리가 활동하고 접하는 공간은 “특정한 사회체제 또는 그 사회 내의 정치나 권력 관계에 의해 생산된 것”으로 파악된다. …… 공간을 ‘사회적 생산 공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공간의 생산 과정에 정치체제나 사회구조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또 투영되는지 파악할 수 있다
--- p.59

특정 시기나 국가를 대표하는 사회적 생산 공간으로는 도성이나 수도를 들 수 있다. 도성이나 수도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고, 그들의 정치 지위나 사회 신분이 달랐기 때문에 ‘개별 인간에 의해 지각된 공간’도 각양각색이었을 것이다. 도성이나 수도는 지리학에서 이야기하는‘상대 공간’의 다양한 면모가 교차하고 중첩된 곳이다
--- p.63

고대의 도성이 고려의 개경이나 조선의 한양보다도 오늘날의 계획도시에 훨씬 더 가까웠던 것이다. 고대 도성이 바둑판 모양의 계획도시로 조영된 양상은 지금도 여러 자료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p.66

고대 도성의 격자형 가로구획은 대규모로 건설한 인공 공간, 곧 사회적 생산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전술했듯이 사회적 생산 공간은 각 사회나 국가의 권력 관계에 의해 생산되며, 무수한 사회적 관계를 내포하면서 각종 통제와 생산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고대 도성의 격자형 가로구획도 다양한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가운데 국가적 차원의 초대형 건설프로젝트로 추진되었을 것이다
--- p.86

삼국은 대체로 6세기 중반을 전후해 격자형 가로구획을 조영하기 시작했다. 고구려나 백제는 4세기에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고, 신라는 6세기 전반에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했다. 삼국 모두 중앙집권체제 정비 이후 격자형 가로구획을 조영한 것이다
--- p.86

격자형 가로구획의 건설은 기존의 장소 정체성과 지배질서를 약화시키거나 해체시키고, 새로운 장소감과 지배질서를 배태하는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격자형 가로구획은 공간의 생산을 통해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한 사례라 할 수 있다
--- p.94

격자형 가로구획은 왕궁을 정점으로 하는 도성 전체의 위계적 공간구조를 창출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삼국이 초기 이래의 입지조건이나 전통적 권위를 계승하여 도성 전체의 위계적 공간구조를 창출한 것이다. 삼국 후기 도성의 위계적 공간구조는 초·중기 도성의 전통적 공간성과 새롭게 도입한 격자형 가로구획을 결합하여 창출했다
--- p.97

경복궁의 중심 축선에 자리한 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은 왕조의 운영과 지탱에 핵심 역할을 하던 전각들이었다. 근정전이 중요한 정치회합[조회]과 국가의례를 거행하던 곳이라면, 사정전은 국왕의 집무실로 대소 신료와 정무를 논의하던 곳, 강녕전-교태전은 국왕과 왕비의 침소로 일상생활 공간이다
--- p.105~6

삼국 초기의 왕궁은 왜 정치적 중추 공간의 위상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일까? …… 삼국 초기의 왕은 특정 부의 대표자이면서 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국왕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에 따라 국왕의 업무도 소속 부와 나라 전체의 일로 구분되었고, 집무 장소도 구분되었을 것이다. 삼국 초기의 왕궁이 정치적 중추 공간의 위상을 확보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p.110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왕궁 내부에 국왕이 나라 전체의 정무를 돌보는 집무실을 마련해 강화된 왕권을 뒷받침했던 것이다. 이로써 왕궁의 정치적 위상이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 p.118

통일신라의 왕들은 신료들을 대동하여 월성의 높다란 문루에 올라가 시가지를 굽어보며 민정을 시찰하거나 치적을 과시하며, 왕궁이 도성에서 가장 중추적인 공간임을 은연중에 드러내었다
--- p.129

지방 행정 구역이란 각국의 사회·경제 구조와 국가체제에 입각하여 영역을 일정 구획 단위로 나누어 분절하고 이를 재조직한 것이다. 국가권력의 기획 아래 영역을 인위적으로 재편했다는 점에서 지방 행정 구역도 왕궁이나 도성처럼 사회적 생산 공간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 p.135

신라의 소경이나 고구려의 별도는 도성을 모방해 건설했고, 백제에도 도성에 버금가는 부도가 존재했다. 소경이나 별도는 명칭 그대로 도성과 같은 성격을 지닌 ‘작은 서울’ 또는 ‘또 다른 도성’이라 할 수 있다
--- p.147~8

삼국은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갖추면서 지방 통치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영역 전체를 일정한 구획 단위로 분절하거나 재편할 만큼 집권력이 강력하지 못했다. 이에 지방제도 정비 초창기에는 각지의 전략적 요충지에 지배 거점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통치력을 관철해나갔다. …… 이러한 지배 방식은 일반적으로 ‘거점 지배’나 ‘점點 지배’라 일컬어진다
--- p.153~4

지방 행정 구역 내의 다양한 상대 공간을 포섭하여 공간 통합을 이룩한 다음에는, 이를 다시 국가적 차원에서 통제하며 재통합할 필요가 있다. 이에 고대국가는 영역 전체에 걸쳐 기초 지방 행정 구역을 설치한 후 이들을 포괄하는 상위의 행정 구역을 설치하며 여러 단계의 지방 통치조직을 갖추게 된다. …… 고구려 후기의 5부部, 백제 후기의 5방方, 신라 중고기의 주州 등은 이러한 지방 통치조직 가운데 최상위의 광역 행정 구역이다
--- p.155~6

공간 개념을 원용하면 다양한 인간집단의 활동 범위나 영역 지배의 일반적인 원리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시기별 지방 통치조직도 상호 비교하여 그 특징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각 국가가 어떠한 방식으로 영역 전체에 걸친 공간 지배망을 구축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공간을 통한 역사 읽기는 역사를 더욱 풍부하고 다채롭게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b>공간에 담긴 한국사</b><br/><br/>한국역사연구회에서 새롭게 기획한 ‘금요일엔 역사책’(한국역사연구회 역사선)의 세 번째 책인 『시간이 놓친 역사, 공간으로 읽는다』는 저자가 그동안 습득한 공간이론을 한국고대사에 접목한 책이다. <br/><br/>왕궁이나 도성 등 공간에 담긴 역사성을 규명하기 위해 실증 연구와 이론 모색을 다각도로 진행해온 저자 여호규(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는 근대역사학에서 공간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이유를 밝히고, 공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주요 개념을 고찰한다. 그런 다음 ‘사회적 생산 공간’ 개념을 차용하여 고대인들이 도성을 바둑판 모양의 계획도시로 건설한 까닭, 삼국 초기에 경복궁과 같은 왕궁을 짓지 못한 이유, 지방 각지에 ‘또 다른 서울’을 건설한 배경 등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한국 고대 공간의 역사를 새롭게 규명할 연구방법론을 탐색하고자 한다.<br/><br/><b>도성, 왕궁, 별도의 공간역사학</b><br/><br/>저자가 펼쳐 보이는 한국 고대의 공간역사학은 생경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저자는 공간을 왜 주목해야 하는지(1장), 공간 이해의 출발점은 무엇인지(2장)를 살핀 후 공간이론을 한국 고대 공간의 역사에 적용한다. 먼저 고대 도성이 조선의 한양보다 더 계획도시였음을 밝히며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 도성을 격자형 가로구획으로 조영한 까닭을 들여다본다(3장). 저자는 격자형 가로구획을 ‘공간을 통한 지배체제 구축’으로 본다. 격자형 가로구획의 건설이 “기존의 장소 정체성과 지배질서를 약화시키거나 해체시키고, 새로운 장소감과 지배질서를 배태하는 기반을 제공”했으며, “왕궁을 정점으로 하는 도성 전체의 위계적 공간구조를 창출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br/><br/>삼국 초기에 경복궁과 같은 왕궁을 짓지 못한 이유를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 미정비’에서 찾는다(4장). 삼국 초기에는 왕권이 확립되지 않아 국가 차원의 의례공간이나 집무실을 국왕 거주공간의 바깥에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왕궁 내부에 “경복궁의 사정전과 같은 나라 일을 돌보는 국왕의 집무실”을 마련하고,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은 국가적인 의례 공간”도 갖추었다는 것이다. 경복궁에 비견할 만한 왕궁은 고대 정치체제의 정비와 함께 오랜 세월에 걸쳐 출현했다는 것이다. <br/><br/>삼국이 지방 각지에 ‘또 다른 서울’을 건설한 배경 또한 ‘고대국가 운영 시스템의 특성’으로 설명한다(5장). 신라의 소경, 고구려의 별도, 백제의 부도는 모두 도성과 같은 성격을 지닌 ‘작은 서울’이었다. 지방제도 정비 초창기에 삼국은 집권력이 강하지 못했다. 이에 “각지의 전략적 요충지에 지배 거점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통치력을 관철해나갔다.” “지방 행정 구역 내의 다양한 상대 공간을 포섭하여 공간 통합”을 진행한 것이다. 그런데 신라 도성인 경주는 삼국통일 이후 국토의 한쪽에 더욱 치우쳐 ‘재화의 공급 집적지’ 역할을 하기 힘들었다. 이에 신라는 “전국의 교통 요지에 소경을 여러 개 건설하여 도성 중심의 물류망을 구축하고 영역 전체의 공간통합을 이룩했다.” 이러한 소경은 고려 이후 점차 사라지는데, 고려의 개경이나 조선의 한양이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해 ‘재화의 공급 집적지’ 역할을 원활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br/><br/>바둑판 모양 계획도시가 고대 신분제의 구현과 연관되고, 왕궁의 공간구조는 정치체제의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달라졌으며, 지방 각지에 건설한 ‘또 다른 서울’은 고대국가의 영역 지배원리와 연관된다는 저자의 고찰은 낯익은 대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공간이론을 한국고대사에 접목하는 과정에서 다소 성급한 결론을 내린 부분도 없지 않”다는 저자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가치 있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