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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조선 사람과 만나다

: 미아보호소부터 코끼리 유배까지

금요일엔 역사책-05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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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6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164쪽 | 282g | 140*205*13mm
ISBN13 9791156122579
ISBN10 1156122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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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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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5세기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태조실록》부터 《성종실록》까지에 담겨 있는 재미있는 일화를 골라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것입니다. 학술서적에서 다루지 않는, 15세기 한반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했습니다. …… ‘이러한 모습도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를 접해보시기 바랍니다
--- p.8~9

조선의 외교는 명과 일본, 양국에 집중되었습니다. …… 당시 명·일본 이외에도 조선과 관계를 맺기 위해 찾아온 국가들이 있었습니다. 유구琉球·섬라暹羅·조와국爪蛙國(각각 현재 일본 오키나와현, 태국, 인도네시아 자바 지역에 해당한다)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 p.14

조선은 섬라곡·조와 등과 어떻게 관계를 맺었을까요? 먼저 섬라곡국부터 보죠. “섬라곡국에서 내乃(섬라곡국의 관직 이름) 장사도張思道 등 20인을 보내어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 2명을 바치니, 임금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궐 문을 지키게 하였다(《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6월 16일 경인).” 이 사료는 섬라곡국에서 사람을 보내 물건과 사람을 바쳤다는 내용입니다. 표현은 ‘바쳤다’라고 했지만, 국가 간 관계를 맺기 위한 선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 p.17

조와국의 사신 기록은 1406년 《태종실록》의 기록에서 처음 확인됩니다. 당시 조와국의 사신 진언상陳彦祥은 …… 전라도 군산도(현 고군산군도)에 이르러 왜구를 만나 교전했습니다.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갖고 있던 물품과 배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이 납치되었고, 40여 명만 살아서 전라도 군산 일대에 상륙했습니다. 태종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물품을 지급해주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 p.23

15세기 초반 조선·명·일본·유구로 둘러싸인 바다, 즉 오늘날 동중국해는 ‘왜구’로 불리는 해적이 활개 치는 바다였습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왜구의 주요 근거지는 일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중세 후반부터 이어진 내전의 영향이 잔존해 있었습니다. 통일은 했지만 정권의 힘이 규슈 서쪽까지 안정적으로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권의 통제가 완벽하지 못한 틈을 타고, 왜구들은 규슈의 서쪽 방면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했던 것입니다
--- p.31

15세기 바다는 해적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납치되어 노비로 팔리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은 납치된 백성을 찾아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국가의 노력과 그에 따른 결과가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 분명한 점은 당시 조선은 잃어버린 백성들을 찾아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최대한 실현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 p.37

세종은 힘 없는 자와 힘 있는 자를 탁주 마시는 자와 청주 마시는 자로 비유하며, 탁주를 마시는 자는 붙잡히지만 청주를 마시는 자는 붙잡히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계층을 탁주와 청주로 구분한 세종의 비유가 재미있습니다
--- p.45

15세기 조선 사회에서 상위 계층은 청주와 소주를, 하위 계층은 탁주를 마셨습니다
--- p.48

태종은 음주 자체를 꺼리지 않았습니다.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하고 효령대군과 충녕대군 중 충녕대군(세종)을 택한 이유에는 ‘효령은 술을 마시지도 못하지만 충녕은 그래도 술을 마실 수는 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이유에서 느껴지듯이 세종은 의례처럼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술을 즐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만취할 때까지 마시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p.48

세종은 …… 허조의 강한 요청에 결국 “술 경고문酒誥을 지어 신하들을 경계시키겠다”고 하면서 집현전 제술관製述官을 불러오도록 했습니다. 예문관 응교 유의손柳義孫이 초고를 작성하고, 세종의 검토를 거쳐 작성된 교지는 …… 백성들의 절주를 간절히 권하는, 절주 교지라 할 수 있습니다
--- p.51

오늘날 한국 사회도 ‘술 권하는 사회’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습니다. 술로 인한 사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는 것이지요. 세종의 절주 교지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p.54

15세기 조선 사회에서 한성은 어떠한 공간이었을까요? 한성은 오늘날 종로구와 중구 일대를 포함하는 공간으로, 좁게는 한양 도성(이하 도성)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넓게는 성저십리를 포함한 공간을 가리킵니다. 성저십리는 도성으로부터 10리 이내의 지역으로, 오늘날로 따지면 대략 서쪽으로는 서대문-양화대교 북단, 남쪽으로는 용산, 동쪽으로는 도성과 중랑천 사이 지역입니다
--- p.62

이성계를 위시한 조선 건국 세력은 한성을 개경보다 더 나은 왕도로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성은 빠르게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 p.63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19일(병신) 한성부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립니다. …… 어린아이가 집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집을 찾지 못해 미아가 되고, 미아를 발견해도 아이의 집을 찾아줄 수 없고, 심지어 그런 미아를 데려다 노비로 삼는 사람까지 있으니, 미아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한성부가 고안한 시스템은 오늘날로 말하면 관영 미아보호소라 할 수 있습니다
--- p.70

한성부가 세종에게 올린 공문의 일부입니다. 도성 내부의 집터 부족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자, 도성 바깥의 땅 가운데 일부를 주택용지로 확보하자고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성저십리 지역이 왜 필요했으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이 즈음 도성과 인접한 곳으로 도성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었고, 그 원인은 도성의 인구 증가와 주택용지 부족이었던 것입니다
--- p.83

성저십리를 설정하고 도성의 관할 범위로 편입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도성의 주택용지는 계속 부족했습니다. …… 도성에서 주택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주택을 지을 수 없는 곳에 임시로 집을 짓고 거주했습니다
--- p.86~7

당시 한성 사람들이 겪었던 문제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연료입니다. 음식 조리를 위해선 연료, 즉 땔감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땔감은 조리뿐 아니라 난방을 위한 연료이기도 합니다. …… 이에 한성에서 가까운 곳의 산부터 벌채되기 시작했습니다
--- p.88

사람이 모여 살면 취약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화재입니다. 조선은 한성의 화재 예방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도입했습니다. …… 화재 예방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보급하려 한 것이 기와입니다. …… 기와는 초가에 비해 비를 안정적으로 막아주고, 위생적으로도 깨끗하며, 교체 주기가 길고, 불이 옮겨 붙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조선에서는 서민들에게 기와를 저렴하게 공급하고자 별와서別瓦署를 운영했습니다
--- p.90~4

1472년(성종 3) 4월 27일(계사)의 기록에 따르면, 가뭄이 심하게 들어 식수가 귀해지자 공동 우물을 독차지하거나 심지어 돈을 받고 우물물을 판 경우도 있었습니다. …… 그만큼 당시 도성의 인구밀도가 상당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 p.94~5

조선 관료들의 근무 시간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였을까요?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 편에 따르면, 관료들은 묘시卯時에 출근하여 유시酉時에 퇴근했습니다. 묘시와 유시는 오늘날 오전 5~7시와 오후 5~7시에 해당합니다. 출근 시간이 오늘날보다 조금 이르지만, 전체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p.98

관료들의 공휴일은 언제였을까요? …… 1429년(세종 11) 8월 24일(무술) 세종은 우의정에서 은퇴한 유관柳寬의 요청에 따라 3월 3일과 9월 9일을 영절令節로 정하고 관료를 포함한 모든 백성이 각각 명승지를 찾아가 태평성대를 누리도록 했습니다
--- p.103

예나 지금이나 관직에는 이른바 요직이 있습니다. …… 사람들의 선호도가 높은 부서 혹은 자리 등이 요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급이 빠르거나, 권한이 많거나, 그 사람의 선택에 따라 바뀌는 것이 많은 자리 등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홍문관은 왕의 자문 기구로서 …… 요직이자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청직이었습니다. …… 홍문관에 임명되는 것은 관료로서 탄탄대로를 보장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홍문관 관원의 승진을 제약하는 요소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후배가 선배를 뛰어넘어 승진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선후배를 나누는 기준은 바로 과거 합격 순서였습니다
--- p.106

1429년(세종 11) 9월 15일(무오) 용산에 있던 군자감이 기울어져 위태로운 곳을 수리하던 도중 5명이 압사하고 30여 명이 다쳐 의원을 보내 치료하도록 했다는 짧은 기록이 있습니다
--- p.112

책임자였던 김재는 죽음으로써 그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죽거나 다치게 만든 하나의 죄만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사의 준비 상황과 평시 공사 진행 상황, 사고 발생 이후부터 구조 및 수습 처리 등 모든 것을 조사하고 각각의 죄목을 정했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 사회의 인명 사고 처리가 상당히 상세했음을 보여줍니다
--- p.120

조지서는 어사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누구보다 일찍 출발했고, 수령의 불법을 적발하기 위해 말단 관리의 집까지 직접 찾아다녔습니다. ……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조지서의 임무 수행이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수령과 아전들에게 조지서는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던 것입니다
--- p.133~34

1412년(태종 12) 12월 10일 공조 전서를 역임했던 이우가 코끼리에 밟혀 죽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 이로부터 약 1년이 지난 1413년(태종 13) 11월 5일(신사) 코끼리는 전라도의 섬으로 보내졌습니다. 사람을 죽였기 문이었습니다
--- p.137~39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이 코끼리는 동남아시아 쪽에서 일본으로 보낸 선물이었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선물로 받은 코끼리를 다시 조선에 선물로 보낸 셈이지요. 그렇게 조선으로 오게 된 코끼리는 조선에서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참 처량하고 기구한 삶입니다
--- p.144

외교 선물로 조선에 들어온 동물이 코끼리뿐이었을까요? …… 1410년(태종 10) 5월 17일(계미)에 따르면, 일본은 코끼리 외에 원숭이도 몇 차례 보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 p.144~45

조선에서 국가적으로 가축을 기른 곳은 사축서司畜署의 전신인 전구서典廐署와 예빈시禮賓寺였습니다. 1416년(태종 16) 5월 7일(무술) 태종은 전구서와 예빈시에서 염소·양·당저唐猪(중국산 돼지)·기러기·오리·닭 등을 기르는 데 먹이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면서, 당저만 적당히 남겨두고 나머지는 외방 각도로 보내 기르도록 했습니다. 당저만 남겨두라는 것은 …… 명 사신단의 식자재로 사용하기 위한 측면이 주요 목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 p.149~50

당시 조선에서 사람들에게 확실히 각인된 야생 동물은 호랑이였습니다. 이미 알다시피 호랑이는 조선의 야생 동물 가운데 최상위 포식자였습니다. 그런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민가를 침범하는 일도 종종 있었지요. 1405년(태종 5) 7월 25일(무오)에는 경복궁 근정전 뜰에 호랑이가 들어오기도 했고, 전주 향교에서는 새로 이건한 향교에 호랑이가 들어올 것을 두려워하여 담장을 두르고 자물쇠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1418년(태종 18) 5월 26일(을해)에는 청계천에 표범이 내려온 적도 있었습니다
--- p.156

경복궁에 내려왔던 호랑이는 자신도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지만,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역을 확대해갔고 호랑이는 그렇게 점차 사라져갔습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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