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사랑의 미학
최순향
세계전통시인협회 한국본부 이사장
상경尙? 봉하창奉夏昌 시인이 2018년에 첫 번째 시조집 『그리움은 꽃이 되고』 이후 5년 만에 상재하는 두 번째 시조집 『소금인형』의 서문을 부탁받았다.
교장선생님으로 정년을 앞두고 펴내는 시집이다. 봉 시인의 원고를 받고 처음에는 가벼운 기분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냥 내처 읽었다. 중간에 그만둘 수가 없었다. 몇 번을 읽었다. 시조로서 작품이 잘 되었는지, 어느 부분의 표현이 절묘하다든지, 문학적으로 좌표가 어떠하다든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깊은 가슴 속 고백이자 속울음이자 팡세이자 수상록이었다. 읽으면서 내가 쓴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누군가의 작품을 읽고 이런 감동과 전율과 아픔과 순수의 감정에 빠지기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총 157편은 모두 하나같이 인간에 대한 사색과 탐구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시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흔히 시의 대상으로 즐겨 쓰이는 영웅 · 위인 · 석학 · 예술가가 아니라 ‘나(자신)’를 비롯하여 갑남을녀甲男乙女 · 장삼이사張三李四 등 평범한 일상 생활인들로, 그들의 희로애락애오욕을 노래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이 얽히고설키어 어울려 살면서, 온갖 애증, 갈등, 싸움, 은수恩? 등 미묘 복잡한 감성 작용이, 가장 가까운 가족은 물론 친구 · 사제 · 사회 각계의 상하 사이에서 빚어내는 인간관계가 아주 디테일하게 표출되고 있다. 하지만 그 해결책이 신통하다. 다음 단락에서 후술한다.
상경 봉하창 시인은 세계전통시인협회 한국본부 회원으로, 인생을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사시는 분이다. 남보다 정도 더 많고 그러기에 몸속에 새겨진 통점痛點도 더 많다. 그럼에도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며 그 특유의 휴머니즘과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인생관에 의하여 잘도 치유하고 예술화한다. 요즘은 시조의 보급을 위해 낭송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상경 시인의 목소리에 실려 들려오는 시조는 또 다른 매력으로 청각을 행복하게 한다.
이제 작품을 살펴본다. 상경 시인은 시를 쓸 때, 이론에서 배운 대로 틀을 짜놓고 기승전결이나 기교 · 수사를 생각하며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다. 가장 깨끗한 마음으로, 기발한 시어를 피하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평범하고 순수한 어휘를 골라 시어로 승화시켜 기도하듯 시를 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바로 한 편의 고백이며 가장 간절한 기도가 된다.
엄청난 이 현실을 인정하게 하소서
당신께 의지하되 울지 않게 하소서
나보다 당신이 터 아픔을 깨닫게 하소서 ─ 「기도」 전문
살면서 지은 죄가 얼마나 쌓였을까
미워하고 원망하며 분노로 얼룩진 삶
가장 큰 // 죄가 있다면 // 나 자신을 미워한 것 ─ 「죄」 전문
위의 두 작품에서 보듯, 누가 이보다 더 간절하게 기도하며 고백할 수 있을까. 어려운 단어도 얄팍한 기교도 거부한, 이 단순한 한 편의 작품이 주는 감동은 말로 다할 수 없다. 문학은 혼자 하는 작업이지만 독자가 있어 감동해 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는 장르이다.
사는 게 땀이더라 때로는 눈물이여
강물에 헹구어진 곱상한 모래톱이
해맑게 // 웃을 수 있는 // 밀물 썰물 품었기에 ─ 「알 것 같아」 전문
발끝에 느껴지는 // 참흙과 자갈 모래
서로를 엉겨 안고 숲길을 만들었다
사람도 // 서로를 껴안고 용서하며 가야 하리 ─ 「산책길에서」 전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모래톱, 밀물 썰물, 참흙과 자갈 모래 그리고 숲길을 노래하며 알려주고 있다. 고난도 감내하며 서로 다른 사람끼리 껴안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일상 회화에서 쓰는 단어와 소박한 수사지만 얼마나 핍진하며 함축적인가.
어려운 질문이다 무어라 대답할까
사람을 잃는 것은 골수에 새긴 고통
그래도 // 남은 사람들 사랑하며 살았다 ─ 「어떻게 살았니?」 전문
얼굴을 감싸 안고 서녘을 바라보다
노을로 물들어진 손가락 틈 사이로
서산을 // 넘지 못하는 // 얼굴 하나 // 보았다 ─ 「그리움」 전문
상경 시인은 개인사에 아픔이 많은 사람이다. 골수에 고통으로 새겨진 이별도 있었지만 그래도 시인은 남은 사람을 사랑하며 씩씩하게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노을 앞에서 얼굴을 감싸 안고 손가락 틈사이로 보내지 못한 인연을 추억하는 이 시인의 속내는 아주 여리고도 깊다. 차라리 아프다고, 보고 싶다고 말하면 좋을 것을.
다향茶香이 너울너울 벽지에 스며들고
오래된 고서古書에는 손때가 녹아들고
창가에 // 비추던 햇살 흔들의자 주인 찾고 ─ 「그 겨울의 단상」 전문
말없이 오랫동안 함께여도 좋은 사람
어디를 가는지가 중요치 않을 친구
시계를 // 보지 않아도 지루하지 않을 이 ─ 「벗」 전문
위의 작품을 읽다가 문득 S 대학 K 교수를 떠올린다. 봉 시인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와도 가깝던... 서로가 서로에게 벗이 되어주던 인연을 떠올리는 봉 시인의 심서가 마음에 집힌다. 멀리 떠난 뒤에도 추억해주는 인연이 있다는 건 얼마나 따뜻한 삶인가.
바다를 바라보니 // 나와는 달라 보여
누군지 알고 싶어 // 널 안아 보려고 해
너와 나 // 하나였음을 // 깨닫는 그날까지 ─ 「소금인형」 전문
이 시집의 표제이기도 한 작품이다. 동화나 동시처럼 쓴 작품이지만 많은 것을 시사하는 작품이다. 인간관계에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편향된 사고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완전히 나를 버리고 상대방이 될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렇게 될 때까지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럼으로 상경의 시는 철학이다. 시종 인간을 탐구하며 긍정한다. 시詩 도처에서 인간의 선성을 구가한다. 이 점 『시경』 3백 편의 근본은 ‘사무사思無邪’이며, 『맹자』 7편의 핵심은 ‘인성은 선’이라는 성현의 말과 통한다.
봉 시인의 작품들은 일상생활이 모두가 시의 제재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장 맑은 눈으로 바라보고 쉬운 단어들로 노래하듯 풀어낸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에는 현학적인 시도나 계획된 기교가 없다. 어린아이처럼 유순하고 순수하다. 마알갛게 씻은 순수한 지성으로 아름답게 노래한다. 그의 작품은 소박하지만 가볍게 대할 수가 없다. 나는 감히 이 시집을 힐링의 시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상에 지친 날은 집 가까운 공원이나 산책길에, 어느 한 모퉁이 빈 의자에 앉아 이 시집을 읽는다면 영혼이 맑아지고 행복해 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상경 시인은 ‘실타래 엉킨 머리 어떻게 풀어볼까 // 조용히 방에 앉아 책 하나 집어든다 // 그 속에 // 풍덩 빠지면 // 세상 시름 잊는다 「책의 힘」’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 시집을 자연 속에서 바람소리, 새소리, 나뭇잎 소리, 구름 흐르는 소리 들으며 읽으면 독자들은 더 행복해지리라고, 힐링되리라고 얘기하고 싶다. 미리 원고를 읽는 행운을 가지게 해준 상경 시인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제3의 시집도 기대한다.
---「서문」중에서
봉하창 시인의 시조에서 ‘자연’은 보여 주기 기법으로 감수성의 현대적 표상화에 성공한 제재다. 자연이 품은 내적 비의秘義를 통하여 인간과 자연이 동일시되는 계기에서, 그의 시조는 ‘만남’의 심미적 윤리를 표출하는 낭보를 전한다. 이는 현대 사회의 분리detachment의 비극을 해소하는 언어 미학의 한 ‘기적’이다. 그의 자연시조에는 ‘유한적정幽閒寂靜’으로 요약되는 우리 전통미가 깃들여 있고, 이는 마침내 자연 질서의 섭리가 한 뿌리에서 난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진리 터득에 이르러 있다.
봉하창의 ‘인간 시학’은 뛰노는 아이들의 역동적 에너지에서 발원하여, 장애인과 노인 등 그늘진 이들을 향한 짙은 사랑에 이른다. 만남 시학의 감동적인 상황이다. 봉하창 시학에서 인간과 인생의 인식은 찬류 의식이나, 구원救援을 지향하기에 무상無常치 않다.
---「평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