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답다’는 말에 달콤쌉싸름한 무언가를 느꼈던 것 같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군인은 군인다워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번번이 순종의 자세를 취했다. 소수의 반항아를 상대로는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목매지 말라고 같잖게 조언하는, 어지간히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자기다움을 외치던 그들에게 이런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지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프롤로그」중에서
누군가를 위해 준비된 사람이 되고자 함은 실로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길을 걷겠다는 당신을, 잘해주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며 오늘을 양보할 줄 아는 당신을 나는 기꺼이 응원한다. 언젠가 한 번쯤은 서로가 준비된 사람으로 만났으면 한다. 이왕이면 그곳이 내가 뜨개질에 한창인 부산의 어느 여름, 지하철 1호선이었으면 좋겠다.
---「뜨개질을 시작하기에는 여름이 좋다」중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사라지는 시대일수록 고유함을 빚는 행위는 빛이 난다.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좋든 싫든 경제적 가치라는 척도로 평가받지만, 고유한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달콤한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한 겹 한 겹 나만의 경험을 얹고 그 사이사이에 나만의 작품으로 채워 바른다면 나는 나다운 사람으로 비로소 완성일 테다. 뜨개질의 쓸모를 ‘실제로 쓰기에 알맞은’ 데에서만 찾을 이유는 없다. 고유한 것들이 아름다운 이유가 제각기 자신만의 척도를 가지기 때문이라면, 그에 따라 뜨개질은 과정부터 결과까지 오롯이 쓸모 있다.
---「오히려 예쁜 쓰레기가 낫다」중에서
무슨 수를 써도 가성비라는 이름의 체를 마음에서 떼어낼 수 없다면, 나는 계산적인 체의 구멍이나마 좀 넓혀보기로 했다. 뜨개질의 최종 산물인 목도리의 가치를 발굴함으로써 말이다. 일단 뜨개질이라는 행위의 노동 가치는 작지 않았다. 비싼 가격의 실은 덮어두고서라도 틈틈이 들인 막대한 시간을 다른 노동에 투입했다면 적잖은 돈을 손에 쥐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는 허공에 내지른 주먹이었다. 현대 주류 경제학에서 노동 가치는 쉽사리 인정받지 못한다. 더 중요한 대접을 받는 건 소비자의 효용, 희소성 따위다.
---「뜨개질에서 가성비를 논한다는 바보 같은 생각」중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일에 예고가 없듯 애장품이 마음에서 떠나는 일도 한순간임을 안다. 관계 맺음의 순간부터 헤어짐은 각자의 코스를 따라 이쪽으로 마라톤을 시작한다. 더러는 금방 도착할 테고, 얼마는 둘러 오느라 퍽 늦을지도 모른다. 계피와 호두 냄새가 한껏 밴 오븐 역시 세월의 태엽을 돌리다 보면 그렁저렁한 애물단지가 되어 있으렷다.
---「얼마는 둘러 오느라 퍽 늦을지도 모른다」중에서
몹시 엉켜버린 실을 풀고 있자면 나와 얽혔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실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면, 인간관계가 엉킨다는 건 어쩌면 괴로운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애당초 깊어질 건더기 하나 없는 관계라면 꼬일 일도 없었을 테니, 엉킨 관계는 끈끈한 사이로 가는 길에 거치는 통과 의례쯤 될까. 관계에 뒤틀림이 생기는 걸 병적으로 경계할 바에는, 엉킨 관계를 어떤 식으로 부드럽게 풀지를 고민하는 게 낫다. .
---「엉킨 실을 풀어볼 용기」중에서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경험으로 틈틈이 무장한 정신은 과거와의 포옹을 거부할 것이다. 우리가 이따금 떠올리는 때 묻지 않은 순수는 어느새 추억이 꾸며내는 환상이 되었다. 편리함과 풍요로움은 우리를 매 순간 다른 종으로 진화시킨다. 인간성이 희미해지는 방향. 역사 발전의 흐름이 그쪽일지라도 속도를 조정할 힘 정도는 그 종에게도 남아 있지 않을까. 불행 중 다행으로.
---「세상의 방향성은 바꿀 수 없다 해도」중에서
삶의 의미는 어느 날 문득 찾아지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찾아가는 것, 어떤 이상향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혹은 멈추고 싶을 때까지 달려가는 뜀박질이다.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다 보면 삶의 의미와 삶 자체는 비슷한 모양이 될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달려가다 언젠가 뒤돌아보며 말할 것이다. 그 모습이 어찌 됐든, 실로 귀한 삶이었다고.
---「나의 삶은 나의 어법에 따라」중에서
비탈길로 내리닫던 의식의 수레를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명상으로 한숨 돌리고 나니 손에 뜨개바늘이 있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닿는 만큼만 손을 뻗었다. 한 코, 한 코, 그리고 한 단. 욕심내지 않고 동작하는 만큼만 이루어지는 세상이 거기 있었다. 겉뜨기와 안뜨기를 꼬아 뜬 목도리, 보라와 아이보리를 배합한 모자. 뻗은 손에 잡히면 해도 될 일이라 여겼고 잡히지 않으면 그냥 놓아주었다.
---「문어발식 경영은 이제 그만할게요」중에서
나와 같지 않은 모습을 그 사람의 독특한 개성으로 바라볼지, 어느 미친놈의 일탈로 바라볼지는 끝끝내 당신 몫으로 남는다.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 없는 세상이라지만 다름과 틀림을 구분 짓는 경계선 하나만큼은 제 분별력으로 확실하게 두자. 시대 흐름에 편승해서 한 명의 인간을 틀렸다고 규정하기에는 그 말의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으니.
---「다름과 틀림 사이, 그 모호한 경계」중에서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가족. 아무 상관이 없던 낱말에 ‘우리’라는 관형어가 붙을 때 대상은 비로소 삶을 비집고 들어온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세상 만물에 ‘우리’라는 표찰을 붙이고 자기 것인 듯 여기며 살아간다. 떠날 때는 다 두고 가야 할지언정 표찰 하나 붙이는 행위는 가없이 숭고하다. 한없이 가볍고 허무한 세상에서 오직 그것만이 자기 삶에 무게 를 더하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표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