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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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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7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68g | 125*200*20mm
ISBN13 9788956656793
ISBN10 8956656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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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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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어느 암자에서 붉은 녹을 덮어쓰고
가슴에 멍이 든 채 앉아있는
철제 여래좌상을 오래 바라본 적 있다

실타래처럼 뒤엉킨 인생길에
웃음을 간직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나를 다독이며 살아간다는 건

날마다 바람에 귀를 씻고
강물에 귀를 씻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를 닮은 부처가 강물에 오래 귀를 씻는다
---「귀를 씻다」중에서

매화꽃 동안거 하다
올망졸망 동자승
가부좌로 앉았다

오늘 아침
연화대蓮花臺에 앉은 전생을 본다
---「동자승」중에서

천년 고목에 보름 달빛이 촛불처럼 걸렸습니다
山門에 들어 묵언하며 지낸지도 달포가 지나가고
그렇게 겨울의 끝자락에서 다시 새 봄을 만났습니다
산새 노랫소리에 새벽 아침을 열고 솔숲에 들면
세상에 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살아온
삼십 년 세월의 가슴속 보따리를 풀어 계곡물에 철철 흘려 보냈습니다
산길에서 만나는 모든 풀잎과 돌잎들이 부처 아닌 게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부처 아닌 게 없더라」중에서

공양간에서
밥을 고봉으로 담아 내 놓았다

지나가던 노스님 말씀

야야! 그 무덤 같다
---「무덤」중에서

홍류동 물속에는
붉게 풀린
여자가 있다

천 년을 한결같이
저 산에 미쳐
예까지 왔구나

해인사 선방 앞에
알몸으로 좌선하는
홍단풍 한 잎
---「절반쯤은 극락이다」중에서

신라 천년의 꿈속에서
누가 정을 쪼아 생生을 불어 넣어
석불石佛로 태어났다지요
잠시, 길을 잃어 한양에 머물렀다가

한양에서 신라로 다시
가야산의 산새 울음 호젓한 800고지 능선에
대자대비의 석불石佛은 가부좌를 하고
소원 하나 꼭 들어준다는 일념으로
당신 앞에 눈 감은 합장으로 줄지어 서는 중생들을
측은지심으로 굽어살핀다지요

당신의 용안容顔에 점안식 하는
고요와 적막을 깨우며 깊은 영감을 안겨 주었던
형용할 수 없는 환희의 그날
하늘 구름 사이로 만다라, 만다라 꽃, 붉게 피었다지요
오늘은 산을 넘어온 아침 해가
당신 이마에서 한층 눈부십니다
---「법기암의 약사여래불」중에서

마당 한 귀퉁이
한 여인이 울고 있어
누구냐고
묻고 싶었으나
조심스러웠다

초록 치마,
비바람에 휩쓸리며
오체투지로 버티고 있었다

허연 머리 풀어 헤치고
고개 숙인 채,
어느 전생의 곡비哭婢소리는
길을 잃어,
길을 찾고 있었다
---「불두화佛頭花」중에서

나무의 몸 안에서
부끄럼 없는
당당함의 물소리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산에 올랐지만
아! 이 허허로움이란

초록은 속살을 밀어내며
경전을 펼쳐 놓고
바람은 자꾸 내 등을 떠민다

쉰다섯 그런 허망의 봄날에는

좌선하듯,
초록경草綠經을 읽는다
---「초록경草綠經」중에서

미팔군 후문 골목길을 걷다
골동가게 진열장에 비스듬히 턱을 괸
반가사유 좌상에 발길 오래 머문 적 있다

전깃줄 앉은 까마귀 북쪽으로 날아간
허공의 길, 바람의 혀는 차가웠다

깊어가는 그날 밤
문지방 넘나드는 예언처럼 보내는
적막의 검은 그림자에 등을 기댄 채

시공을 넘나드는 바람의 전언 속으로
내 영혼을 깨우는

전생의 부처가 가부좌로 앉아 있었다
---「바람의 전언」중에서

보름달 밤
보리수나무 아래
둥글게 몸을 말고
좌선한 채,
전생의 업보를 닦고 있는
몽돌을 본 적 있다

내 가슴에도
인忍으로 새긴 사리가
몽돌처럼, 모질게 자리 잡아
가끔,
몽돌이 달빛 아래서
흐느껴 울 때 있었다
---「몽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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