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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시와 ‘철(鐵)미디어’의 거울

: ‘전기’, ‘전자’, ‘전파’, ‘전신’의 개념에 반사된 시적 상상력과 리듬

한국연구재단 저술총서-17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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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6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390쪽 | 153*225*30mm
ISBN13 9791169191173
ISBN10 116919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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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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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인 것은 깨어진 풍경이며 주관적인 것은 빛이다. 오직 빛에 의해서만 풍경은 불탄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함축하는 시사적 지표를 다양하게 내세울 수 있지만, 그것이 일종의 ‘바이로니즘(Byronism)’에 기대고 있다는 것은 ‘바다’와 ‘소년’이 결합된 제목에서 이미 판명된다. 흥미롭게도 최남선의 ‘바다’가 이태준이나 정지용에게 오면 거대한 동력기의 다이너미즘으로 변신하는데, 더욱이 그 동력기의 소음이 ‘음악적 사유’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은 낯설고 의외적일 뿐 아니라 혹여나 경이롭기까지 하다. ‘기계’가 ‘음악’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섬세, 정밀, 비약, 채색의 시적 언어의 힘을 근원적으로 필요로 하고, ‘기계-음악’의 이 이질적인 대상들의 결합을 위해서는 ‘탈신(脫身)’, ‘탈감각’의, 기존의 몸의 감각이나 그것을 지칭하는 언어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시의 방향성은 ‘인간(자연)-기계(철미디어)’의 ‘헤테로글로시아(heteroglossia)’적인 문법이 긴요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한편, 근대시는 어떻게 오는가(왔는가)”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된 것으로, ‘철’의 언어가 곧 ‘불’의 언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근대시에 전기, 전파, 전자, 전신, 무선 등 이른바 ‘철미디어’의 개념 혹은 물질성이 틈입/주사되는 과정에서 시적 상상력이 어떻게 작동되고 새로운 언어 및 리듬의식이 생성되는가를 분석한 것이다. 근대시 논의의 핵심이 주로 ‘근대성/반(전)근대성’에 맞춰진 것에 대한 피로감과 또 어떤 정형화된 결론에 이르게 되는 방법론상의 구속이 주는 답답함을 지탱하기 힘들었던 이력이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였는지 모르겠다.

근대성/반(전)근대성, 생명/기계, 자연/문명, 인간적인 것/기술적인 것 등의 이원론적 구도는 ‘일상의 논리(아도르노)’로 작동되면서 근대성 담론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이해할 필요가 없거나 또 낯익은 것들이 대중적인 공감을 얻는 편이다. 엄격한 가치판단이나 긴장을 요하는 새로운 개념이나 논리는 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어지는 법인 것이다. ‘이원론의 일상화’는 정작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실감 있게 목격하게 되는데 이 이원론적 사고의 정형화와 유형화는 현재 학생들에게 익숙한 ‘디지털 문명세계’와는 어쩌면 가장 부조화, 부정합한 가치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다.

자연과 기계, 인간적인 것과 문명적인 것 등의 ‘이원론의 허망’을 붕괴시키는 것이 사이보그형상이라는 관점은 ‘가이아 신화’를 일종의 생명체의 자기조절시스템으로 명명한 이 분야의 개척자 해러웨이의 것이다. 사이보그의 형상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반과학적 형이상학, 과학의 악마성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며 그럼으로써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모든 부분들과의 소통적 관계 속에서 일상생활의 경계를 재구축하는 업무를 포용한다. 이원론의 미궁에서 탈출함으로써 일종의 이단적 헤테로글로시아의 꿈을 꾸게 한다는 것이다.

단일한 언어, 단일한 가치, 단일한 세계관이 지배하는 시사(詩史)가 아니라 수많은 목소리들 가운데서 나오는 말의 양식을 주워 담고 집적하는 시사가 되어야 한다. 근대성/반(전)근대성의 체계가 양식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않을뿐더러 설명할 수도 없다. 인간의 의지가 양식의 의지를 지배하거나 견인한다는 관점이 시사기술의 근간은 아닐 것이다. 또 사조, 경향, 문단사로 시인의 재능을 판별하기도 어렵고 개별 시가 위치한 지점을 명료하게 포착하기도 힘들다.

이 책은 청소년기의 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 인간의 청춘을 ‘불·빛’의 언어로 요약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존재하지 않던 청소년기 부산의 변두리지역의 한밤을 잠들지 않게 붙들고 있던 것은 저 멀리 FM 라디오 송신 철탑의 붉은 불빛이었고, 대학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온 자의 망명객과 같은 영혼을 품어준 것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한강의 수면이 토해내는 도시의 밤풍경이었다. 교양있고 격식있는 ‘서울’에 주눅들인 시골뜨기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상처 입은 영혼을 되돌려 앉힌 것은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는 봄날의 산들바람은 아니었고, 자취생의 고단한 일상을 위로해주는 연탄집 아주머니의 따뜻한 미역국 한 사발도 아니었기에. 그러니까 한 인간의 청춘을 지속시켰던 것은 전기의 인공불빛이었다. 우나모노가 말한 ‘빛’의 기원은 전기불빛이 아니었을까 멋대로 짐작했다. 거울처럼 빛나는, 2호선 아래의 한강 수면에 매혹당한 자들은 아마 그런 억척을 진실이라 믿고 있을지 모른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은 ‘추억의 세계’가 아닌 ‘등불 아래의 세계’로부터 온 것이어서 그에게 드리워진 끔찍할 정도로 잔혹하면서도 황홀한 자기 파괴적인 언어의 원광은 분명 파리의 전기불빛에 돌려주어야 할 것이라 믿기로 했다. 보들레르 때문에 파리에 가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순전히 이상(李箱)을 읽기 위한 선행학습이거나 예행연습이어야 했는데, 축음기 ‘나나오라’ 한 축쯤은 호사롭게 장만할 허영심은 물론이고, 미샤엘만의 현란한 비르투오소가 빛나는 랄로협주곡 한 구절을 흥얼거리는 악흥을 즐길 수 있는 음악광에, 전기불빛으로 그림자놀이를 즐겼던 이상은 스스로 ‘파리의 망명객’이 되기를 죽음 직전까지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상이 굳이 파리에 갈 필요가 없다고 믿게 되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한강의 밤을 밝히는 ‘불빛’ 때문이었다. 전기불빛에 반사된 한강이 센강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생각은 파리를 직접 다녀온 이후 굳어졌다. 꼭 그 시점 이후는 아니지만, ‘근대성’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면서 근대시 공부가 재미있어졌다.

온 세계가 디지털기기의 손안에 있는 시대에 사는 만큼, 우리 시대의 초상을 100년 전쯤의 시대로 회귀하듯 거슬러 올라가야겠다는 일종의 심리적 저항의식이 생겨났다. 100년 전의 거리의 풍경을 관찰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써보고 싶었다. 본인은 물론 옴짝달싹 없이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의 인간형’과는 가장 거리가 멀다.

이 책은 한국연구재단에서 공모한 ‘저술지원사업(2018)’의 일환으로 기획, 연구되었다. 졸저 『문인기자 김기림과 1930년대 ‘활자-도서관’의 꿈』, 『넘다보다듣다읽다-1930년대 문학의 ‘경계넘기’와 ‘개방성’의 시학』의 문제의식과 심층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근대시’를 ‘양식론(사)적 관점’으로 읽고자 하는 기왕의 문제의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철미디어’란 개념은 이상의 ‘철공부’로부터 빌려온 것인데, 당대의 ‘전기’, ‘전자’, ‘전파’, ‘무선’, ‘전신’ 등의 ‘전기자파적’ 미디어와 연관된 대상뿐 아니라, 드물게는, 기차, 증기선,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 등과 연관된 당대의 동력기관, 기계의 이미지들을 포괄하는 용어로 쓰였다. 본질적으로 ‘철’은 ‘불’이자 ‘장미’와 교통 되는 원형적 질료라는 점에서 ‘철미디어’가 곧 ‘시의 탄생’과 밀착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 연구서는 정밀하면서도 심층적인 언어로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서술해야 한다고 믿는 편이지만 실상 본인의 경우에는 늘 그러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경험을 되풀이하거니와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굳이 무신론자임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밤의 한 줄기 불빛이 주는 위무에 삶을 지속시키는 힘을 얻는 경우가 있다. 지난 1년여 넘게 일상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치유될 수 없는 지독한 병을 앓고 있는 인간에게 예의를 구하는 심정으로 원고를 마무리했다. 고독과 단절과 좌절을 품은 인간에게는 이 책이 한 줄기 빛이자 음악이었음을 고백해 둔다.

어려운 출판 사정에도 그다지 식견 없고 읽을거리 없고 재미없는 연구서를 출간해 준 ‘한국문화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편집 및 교정에 애써 준 편집진에게도 지극한 고마움을 전한다.
---「‘불·빛’에 감싸인 근대시의 언어들」중에서

“전기기관차의 미끈한 선, 강철과 유리건물 구성, 예각(銳角)”이 ‘세기의 미’를 구성하는 물질적, 물리적 실재라면, 근대 시인의 뮤즈를 충동하는 것 또한 이 ‘세기적인 동력’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최남선의 ‘기차’로부터 김광균의 ‘기차’에 이르기까지 균일하게 선택된 미적 대상들이다. 이들이 한몸으로 ‘세기의 美’를 대표하는 것이니 ‘20세기의 人’이라면 당연히 거기서 ‘美’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이상은 썼다.

걸핏하면 끽다점(喫茶店)에 가 앉아서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차를 마시고 또 우리 전통에서는 무던히 먼 음악을 듣고 그리고 언제까지라도 우두커니 머물러 있는 취미를 업수이 여기리라. 그러니 전기기관차의 미끈한 선, 강철과 유리 건물 구성, 예각(銳角), 이러한 데서 미(美)를 발견할 줄 아는 세기(世紀)의 인(人)에게 있어서는 다방의 일게(一憩)가 신선한 도락(道樂)이요 우아한 예의(禮儀)아닐 수 없다. …(중략)… 어데를 보아도 交錯된 鋼鐵과 巨巖과 갓튼 콩크리-트壁의 숨찬抑壓 가운데 자칫하면 거츨기쉬운 心情을 조용히 쉬일수잇도록 (이상, 「秋等雜筆-禮儀」, 『매일신보』, 1936.10.14-28.)

“결코 이웃 좌석에는 들리지 않을 만큼 그만큼 낮은 목소리”로 ‘전면(纏(經?)綿)한 정서를 풀 수 있는 그윽한’ 화제로 담론을 나누고 휴식을 즐기는 다방에서의 대화는 일종의 지적인 유희(놀이)이기에 결코 “交錯된 鋼鐵과 巨巖과 갓튼 콩크리-트壁의 숨찬抑壓”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같은 층위에서 서로가 등을 맞대고 있다. ‘20세기적인 미’의 한가운데 ‘다방에서의 휴게’가 있고 ‘거츨기 쉬운 심정’은 20세기 인(人)의 것이니 그 피로, 그 노동, 그 번민이 없다면 ‘휴식’도 의미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피로와 노동이 곧 휴게인 것이다.

임동혁은 음악가에게 다방을 드나드는 일이란 석냥(성냥) 없이는 살 수 없는 일상인의 삶과도 같다는 투로 말하고 다방에서의 음악을 구하는 행위를 유황을 채굴하는 광부의 창백하고 불건강한 행위에 비유한 바 있다. (임동혁, 「다방과 음악」, 『문장』, 1940.3.) 다방에서의 불건강하고 음울하게 음악을 듣는 행위는 창백하고 음울한 낯빛으로 고독하고 적막하게 창작 행위를 하는 예술가의 그것에 오버랩된다. 거리를 떠도는 ‘뿌리뽑힌(outrooted) 자’로서의 예술가에게 ‘다방’은 부르주아지의 ‘집’에 대응될 만한, ‘거리의 집’이자 휴게와 사교의 공간을 넘어 일상의 공간이 된다.

그런데 “전기기관차의 미끈한 선, 강철과 유리 건물 구성, 예각(銳角)”과 같은, 운동성과 역동성이 ‘다방에서의 음악듣기’라는 이 예술가적인 행위에 필수조건처럼 달라붙어 있다. 예각, 직각 등의 선의 차고 날카로운 감각은 자연이 주는 곡선의 부드러움이나 온화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냉정’인가 ‘열정’인가의 ‘선택’적 사항도 아니고 혹은 그 두 사항 ‘사이’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냉정한 열정’의 교착된 상태에 가까운데 이 기계적인 속성과 음악의 속성이 모순의 상태로 등을 맞대고 있는 형국이다. “交錯된 鋼鐵과 巨巖과 갓튼 콩크리-트壁의 숨찬抑壓”의 공간에 음악이 흐르고 있다. 콘크리트의 차갑고 금속적인 공간 한가운데 음악이, 지적 유희가 존재한다는 이 인식은 홍효민의 ‘인조적 악희’라는 시각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한강의 철교는 도리어 이 自然으로 일우어진 景色에 對하여는 아무것도 아니다. 더욱이 淺薄한 人間의 손쉬운 작난같이도 생각이든다. 곧 아름다운 自然의 景色을 딱무질러서 그것이 人造的 鐵筋콩트릿을 세어논 것이 너무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나는 이러한 人造的惡?인 漢江鐵橋를 뒤로 두고 앞으로 前進해간다. (홍효민, 「신추만필(5) 아름다운 조선」, 『동아일보』, 1934.9.5.)

구룡산 원정(元町)에서 발동기선을 타고 강화로 가는 길에 홍효민은 한강변의 山鷲粱津, 여의도 백사장, 당인리 수양버들, 양화도 등의 경색을 감상적으로 읊어본다. 조선의 자연과 경색에 대한 감상적인 시선은 그의 旅情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발동기선의 작고 초라한 규모 때문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시선이 중국 남방의 白帝城 같은 의고적 대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조선사람, 조선민족’ 등의 당대 ‘조선심’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강철교와 같은 인조적 구조물을 ‘인조적 악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보는 관점과 그것을 지적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이상의 ‘20세기인’의 관점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감상적이고 유장한 홍효민의 진술체 문장과 건조하고 투명한 이상 문체와의 차이도 동시에 지적할 수 있다.

김기림의 ‘반감상주의’의 한 축은 기계미, 철미디어의 감각에 기댄 것이다. 김기림은 스윗타스의 명제를 언급하면서 “운동과 생명의 구체화”인 페르낭 레제의 기계미학을 재인용한다. 현대시는 궁극적으로 기계의 미, 운동의 미, 노동의 미 이 세 개의 중요한 항을 배제한 채 진보적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들의 시는 기계에 대한 열렬한 미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운동과 생명의 구체화’(페르낭 레제)로서의 기계의 미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일의 사회질서와 인간 생활에 있어서 새로운 기조가 될 것이다.
둘째 정지 대신에 동하는 미
그것은 미학에 있어서의 새 영역이며, 시에 있어서의 새 역학의 존중이다. 행동의 가치에 대한 새 발견이다.
셋째 일하는 미
다시 말하면 노동의 미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음’이다. 움직이지 않는 신, 움직이지 않는 천국, 열반은 ‘죽음’의 상태가 아니고 무엇일까. 활동은 생명이다. 진보다. 그것은 그 자체가 미다.
(김기림, 「감상에의 반역」, 『전집』 2, 82면.)

무한한 움직임은 생명의 원환회귀의 동력이며 그것은 피로와 정지를 모르는 무한 반복적 노동이 가능한 기계의 속성에 투사된 것이다. 기계의 운동성을 일종의 생명력으로 파악한 레제의 기계에 대한 신뢰가 그의 회화의 중요한 세계관이다. ‘한개의 엑스타시’의 ‘發電體’라는 표현(김기림, 「시의 모더니티」, 『전집』 2, 81면.)이나 기계적인 금속성과 소음주의적인 활력을 강조한 김기림의 「오전의 시론」의 맥락은 레제의 기계주의 미학의 관념에 한발을 걸치고 있다. 색채와 선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철미디어를 통과한 빛의 세례 때문일 터인데, 김기림이 말한 전기미디어적 작업, ‘발전기’의 호르몬적 투사로 가능한 것이다. 빛과 색의 변화를 통해 힘찬 움직임과 역동성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기계의 미학은 ‘움직이는 주체의 미학’이며, 인간의 지각력과 감정적 반응들의 총체적 에너지가 기계의 움직임과 활력에 투사돼 있다. 인조적 구조물, 과학 기술의 구현체에 대한 이상과 홍효민의 시각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듯, 김기림의 시각은 당대의 여타 ‘기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일정한 차이가 있다. (「대판의 인상(8)」, 『동아일보』, 1929.8.17; 이향, 「인생과 기계, 기계와 문예」, 『동아일보』, 1929.10.29.)

‘사회적 호르몬’으로서의 철미디어의 경험 없이 단순한 독서물을 통한 지적 탐구의 수준에서 이 같은 기계의 동력과 활력의 에너지가 주는 시적 비전을 논파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시에 있어서의 새 역학”을 철미디어에서 찾은 이 같은 김기림의 지적 사유에는 미래파, 입체파의 사조적 수용을 뛰어넘는 점이 있다고 판단되는데, 그것은 기계, 동력, 전기자파 등 철미디어의 실질적 경험을 통해서 획득된 것이라 판단된다. 따라서 서구시(시인)와의 ‘영향관계 분석’이나 ‘비교문학적 관점’의 재고찰이 요구된다 하겠다. 김광균에게 ‘이미지즘의 후예’로 등기시킨 시는 「秋日抒情」인데, 그것의 가치는 이미지즘의 현란하고 난숙한 언어적 기술에 있다기보다는 동력학적이고 기계주의적인 이 수사적 장치가 고도로 섬세하고도 건조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데 있다.

포프라나무의 筋骨사이로
工場의 지붕은 힌니빨을 드러내인채
한줄기
꾸부러진 鐵棚이 바람에나부끼고
그우에 세로팡紙로만든 구름이하나
자욱-한 풀버레소리 발길로차며
호을노 荒凉한생각 버릴곳없어
공중에 띄우는 돌팔매하나
-김광균, 「秋日抒情」(『인문평론』, 1940.7)

말하자면, 기계가 문학(시)이 되고 있는 것이다. 秋日의 ‘서정’은 깊고 무겁되 건조하고 냉랭한데, 그것은 물기 있고 온난하기보다는 황량하고 삭막한 근골(筋骨)의 건조주의에 가깝다. 김광균이 그려내는 대상들의 자세가 정립상(正立像)이 아니라 기울어진 ‘사선형’이라는 것이 핵심인데, 그래서 그의 이미지즘이 안정과 위안의 노스탤지어보다는 불안정과 불균형과 뒤틀림(왜곡)의 기형적 이로니(Irony)를 더욱 가깝게 불러낸다. ‘꾸부러지’고, ‘기우러’지고 ‘반원을 그’으면서 낙하하는 대상들을 시인은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다. 아무리 돌을 던져도 돌은 하늘에 가 닿지 않으니, 시인의 돌팔매질은 단지 허무하고 무위한 상념의 반복을 표상하는 행위일 것이며, ‘오후 두시의 급행차’만큼 시인의 마음은 조급하지만 그 속도만큼 그의 발길은 차마 앞길을 재촉하지 못한다. 아마도 근대시사상 ‘눈물’을 거두어 간 것은 이미지즘의 이론적, 이념적 조건 및 실행이기보다는 기계주의의 동력학이 불러 낸 이 기형적이고 건조한 수사의 방식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철미디어의 동력학이 미적 관념에 미치는 요인들에 대한 논의는 ‘현대미’, 여성의 미 등에 대한 혁신적인 담론을 이끈다. 『인문평론』(1940.1)은 ‘現代美의 書’를 주제로 특집을 꾸리고 있는데, 고유섭, 김관, 서인식 등 음악가, 철학가를 위시, 임화, 안회남, 김광섭 등 문인들이 각 방면에서 ‘현대미’를 고찰하고 있다. 특히 ‘우리의 都市美’ 란을 따로 두고 『인문평론』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화문을 싣고 있는데, 「분수」, 「鋪道」, 「여객기」, 「철교」가 그 대상이다.

이것들은 현대 도시미의 규준이 되는 동력학적인 주체들로 육체와 리듬, 운동과 생명, 감각과 철미디어의 물질적 상관성 간의 관계를 돌이켜보게 한다. 이상, 정지용이 ‘포도(아스팔트)’를 딛고 선 채, 발밑에서 요동하는 아스팔트의 날카롭고 역동적인 감각에 그의 전신을 내맡기는 황홀한 장면을 위의 화문에 겹쳐본다. 『인문평론』 특집에서 주목할 것은 근대 동력학적 주체들, 예컨대 ‘斷髮-電髮’, ‘유선형-속도감’ 등의 개념을 들어 그것이 ‘현대미’를 판단하는 규준인 동시에 근대적 문예개념, 근대적 시의 의장과 연관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철미디어는 시적 리듬 형성의 동인이자 주체이며, 시의 새로운 역학이차 그 리듬분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안회남은 ‘電髮이 가장 참신한 현대미의 형태’ (안회남, 「電髮」, 『인문평론』, 1940.1.)라 본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현대미를 이해하고 향수하는 것은 본질적인데, ‘電髮’은 과학적 현대미의 새로운 섭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젊은 여성의 최신의 감각을 가지려는 미적 발전에 의한 것이라 본다. 상식적인 담론이지만 ‘전발’을 ‘현대미’의 대상으로 특기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김광섭의 「현대미의 병리학」은 ‘대유기체’, ‘정신기능’, ‘운동미’ 등의 용어를 새롭게 쓰고 있어 흥미롭다. 그 부제가 ‘기계, 영화, 여자, 도시’인 것에서 확인되듯, 이들을 일종의 ‘기계-주체’로 보고 “이 모든 것을 싸고도는” 종합적 현대미가 대도시의 기계화된 ‘대유기체’라 규정한다. ‘싸고 도는’이라는 구절에서 철미디어가 근대 일상생활의 대기를 압도적으로 지배하면서 혼곤하고 신비한 아우라를 풍겨내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대유기체’란 용어도 주목되는데, 그것은 사회를 움직이는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판’이자 그 판을 이끌고 가는 호르몬이자 호흡(박동)의 질서처럼 들린다. 김광섭은 ‘기차, 전차, 자동차, 비행기’ 등의 ‘기계의 스피드’를 지목하고 특히 비행기를 “전쟁하다가는 전투 이외에 詩人 驚嘆하여 이것을 愛人같이 품에 안고는 영원한 運動美의 創造에 灼熱될 수 있을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昇天하는 精神機能’이라 쓴다.

아파-트, 홀- 鐘路 本町 政治 經濟 新聞 詐欺 敎育 大道路 宮殿 電信電話 라디오 꼬스-톱 交通巡査.... 이모든 것을 한몸의器官같이 쉴사이없이 움직여가는 商業都市- 商業美術-네온사인. 움직이지 않으면 失望하는都市美. …(중략)… 電報詩가오고 푸로페라美 가 올지라도 生活이없이 들어온 機械 鬪爭하지않고 얻은發明 創造하지못하고 輸入한 美學政黨 ------ (김광섭, 「現代美의 病理學=機械, 映畵, 女子, 都市」, 『인문평론』, 1940.1.)

‘현대미’란 ‘대도시의 기계화된 대유기체’로부터 기원하고 있으며 그것은 ‘모든 것을 한몸의 기관같이 움직여가는’ 일종의 ‘기관 없는 신체’와 방불하다. 매클루언이 소개한 ‘거대한 생물학적 사건’으로서의 인간 사회를 변화시키는 척도인 전신전화, 라디오, 교통순사, 전보시, 푸로페라 등을 아우르는 철미디어적 실체가 대유기체의 ‘킷(Kit)’이다. 이것들은 질서 없이 흩어진 채 산만하게 기계화된 대도시의 한 기관을 이룬다. 김광섭은 고티에의 ‘미학정서론’을 인용하면서 현대미란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에 대한 호소를 넘어 정서를 통과하고 궁극적으로 지식에 호소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기계-주체’의 이미지를 발견한 김광섭의 예리하고 예민한 감수성의 종착점은 ‘생활 없이 들어온 감수성’, ‘창조하지 못하고 수입해온 기계미학’에 대한 비판이다. 근대 기계미란 이식이나 모방의 그것이 아니라 그 기계미학을 창출한 사회적 경험을 통한 정서적 반응이자 비판지식의 차원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각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정에 호소해 그 감정을 통해 지식에 호소’함으로써 기계미와 도시미의 진정한 발명과 창조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각’, ‘감정’, ‘지식’의 개념 차이와 그것들 사이의 경계점을 굳이 논할 이유는 없을 듯한데, 현대미란 ‘생활을 통해 얻어진 것’, 즉 철미디어의 사회적 호르몬으로서의 기능과 직접 연결되고 비판지식 가운데 창조적인 것으로 전화되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김광섭의 논의에 기댄다면, 1930년대의 시의 리듬은 철미디어적인 ‘감각-감정-지식’을 관통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김남천은 현대의 여성이 갖춰야 할 ‘美’를 세분해 설명하고 특히 ‘疑裝美’를 ‘사자처럼’ 포효하는 힘과 ‘탄환처럼’ 폭발하는 찰나적 동력에 견주었다.

偉威를 갖후고 世界라도 삼킬 듯이 뻐겨보지 못할 것이 무엇이랴! 前日, 美國에서는 스텐레스 스탈제의 헬메트같은 軍國調의 金屬帽가 婦人네들間에 戰時모-드로써 流行하고 있다는 外電에 接하였다. 獅子처럼 채려라! 彈丸처럼 擬裝하여라! (김남천, 「現代女性美」, 『인문평론』, 1940.1.)

스텐레스 스탈제의 헬메트, 군국조의 금속모 같은 의장이 일종의 ‘전시모드’로 시대의 유행을 주도하고 있는데, 일제 말기 군국주의의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남천은 차고 냉혹하며 단단하지만 유쾌하게 빛나는 금속성 미학이 현대 여성미의 속성을 대변한다는 해석을 달아두었다. 그것은 도전적이고 저돌적인 여성의 힘과 威儀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임화가 『인문평론』의 ‘현대미’ 시리즈에 참여하고 있는 것도 주목되는데, ‘기계’란 “인간에 의해 정복된 자연이자 가공된 자연이며 인간의 힘의 한 상징”이라 규정하고 항공기, 豪華船, 전투함, 고층건축이 주는 쾌속성, 정확성, 규칙성 등을 ‘기계미’로 규정한다. 쾌속미, 기계미의 개념을 적용한 예술 형식이 추상예술 (임화, 「기계미」, 『인문평론』, 1940.1.)이라는 언급에서 미래파나 입체파의 반복적 선과 유형적 이미지에서의 리듬이 읽힌다. 기계를 근대(성) 혹은 도시의 핵심으로 두고 그것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두는 방식에서 벗어나 오히려 기계미를 건조하고 찬 추상예술의 형식미에 대응시키고 있는데 ‘기계’를 현대예술의 물질적 ‘호르몬’의 위치에 놓는 임화 특유의 예리함이 확인된다.

이헌구는 여배우의 미란 본질적으로 인공적으로 꾸며낸 미이며 이것만이 여배우에게 더한층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라 요약하는데, (이헌구, 「女優의 미」, 『인문평론』, 1940.1.) 현대의 남성미는 인공적이고 기계적이기보다는 자연미를 갖는다는 최정희의 관점 (최정희, 「現代男性美」, 『인문평론』, 1940.1.)과 기묘하게 엇갈린다. ‘인공적인 것=기계적인 것’의 도식은 ‘현대의 미적 본질론’에 이르게 되면 그 논점 자체가 무엇인가 혼동되고 착종된 상황을 불러온다.
---「직선, 예각, 미끈한 육체의 뮤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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