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체를 그가 속한 집합체의 술어들을 통해 파악할 때 자주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것은 한 집합체에 속한 주체가 그 집합체의 술어를 얼마나 의지적으로/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느냐, 그리고 외부의 시선이 그 주체와 집합체 사이의 거리를 얼마나 감안해서 보느냐의 여부에 관련된다. 예컨대 한 사람이 여자로 태어난 것은 비의지적인 것이지만, 기독교도인 것은 일정 정도 의지적인 것이다. 그래서 한 주체는 (자신이 속한) 집합체의 규정을 (정도상의 문제이지만) 때로는 의지적으로 또 때로는 의지와 무관하게 가지게 된다. 또 한 주체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 주체의 술어와 집합체의 술어를 단적으로 동일시할 수도 있고 구분해 볼 수도 있다. 그 사이에 무수한 시선들이 존재한다.
--- p.27
객체화와 주체화의 균형을 위해 때로 자발적인 객체화가 요청된다. 모든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서(예컨대 지루하게 순서를 기다릴 때) 스스로를 참을성 있게 객체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들로 눈을 돌릴 때, 자발적 객체화의 요구는 종종 거대 주체의 전략의 일환으로서 작동하곤 했다. 처음부터 불평등하게 시작되는 우리의 삶에서 균형 잡힌 주체화는 오히려 불평등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통해서 형성되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소수의 커다란 주체들과 대다수의 작은 주체들이 대립하는 현실에서, 균형이란 주체성과 객체성의 단순한 배분이 아니라 이미 높이 솟아 있는 거대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데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결국 주체성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주체들의 균형은 근거 없이 주어진 거대 주체성을 와해시킴으로써 가능하다.
--- p.66
주체-화는 ‘singularity=multiplicity’라는 우리의 공식에 입각했을 때 이-것-되기로서 이해된다. 이-것-되기는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 즉 특이존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며, 주체-화는 곧 기존의 개체를 그 중요한 요소로 포함하는 다양체-되기, 이-것-되기를 통해서 성립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주체-화는 기존의 주체 개념을 넘어서는 동시에 각종 형태의 환원주의 또한 넘어선다. 이-것-되기로서의 주체화는 기존의 주체가 가지는 단단한 동일성을 버리고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서의 개별-화, 주체-화를 사유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체가 가지는 ‘singularity’의 성격과 각 다양체에서의 기존의 주체들의 역할 또한 사유하려 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주체-‘화’를 겪는 존재로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체’-화라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 p.133
내재적 가능세계론이 함축하는 윤리는 타자-되기를 그 기초로 한다. 타자와의 마주침이라는 존재론적 조건을 넘어 상호-현실적 세계라는 윤리적 조건을 채우려면 반드시 타자-되기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윤리학의 출발점은 어떻게 상호-현실적인 세계를 이루는가에 있고(다른 모든 윤리적 문제들은 이 조건 위에서 성립한다), 이는 곧 어떻게 내 현실세계와 타인들이라는 가능세계들의 고착화를 무너뜨리고 타자-되기를 행하느냐에 있다. 주체들이 어떤 일정한 동일성을 갖춘 주체로서만 병존할 때, 윤리는 그 출발점을 찾을 수가 없다. 윤리는 앞에서 본 갈등적 보편성이나 이기적 비-보편성으로는 성립하지 않지만, 나아가 호혜적 보편성이나 이타적 비-보편성을 통해서만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그 이전에 타인과의 마주침의 지점들에서 타자-되기를 통해 각 가능세계들이 상호-현실적 세계들로 이행해가야만 한다.
--- p.170
미래로 말미암아 과거는 창고에 저장한 물품처럼 결정된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 계속 생성하는 것이 된다(과거는 현재와 상관적으로 생성하지만, 현재의 생성 그 자체가 미래와 상관적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미래는 연결되어 있다). 이는 순수과거가 현재와 과거의 순환적 구도에 사로잡힌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구도가 열려야 하고, 비결정성을 이해하려면 미래가 고려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때 우리는 시간의 열려-있음과 비결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는 곧 현재와 과거의 순환이라는 구도에 어떤 절대적인 차이가 도입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현재는 순수과거의 선험적 작동에 묶여 있게 되며, 순수과거는 현재와의 원환적 구도에 사로잡히게 된다. 순수과거는 표상적인 현재와 대조적으로 비-표상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현재에 묶여 있고 현재에서 실마리를 잡아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머무는 한에서 현재의 표상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시간의 주름이 베르그송의 원뿔을 넘어서는 보다 복잡한 구도를 띠어야 함을 뜻한다.
--- p.235
인류 역사는 수많은 반복으로 차 있다. 그러나 각각의 반복은 차이의 강도를 동반하며, 그러한 강도들이 역사를 의미 있게 만든다. 역사에서의 반복들은 물리 현상들에서 볼 수 있는 빈약한 반복들이 아니라, 진리-사건을 즉 생명, 노동, 주체의 소진 불가능한 힘들의 귀환을 함축하는 차생적 반복들(differential repetitions)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역사철학적으로 중요한 하나의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역사를 이끌어 가는 힘인 반복의 강도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읽어 낼 대안공간의?역사철학적?의미를 읽어 낼?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세 개념을 통해서 대답할 수 있다. 사건, 영원회귀, 그리고 투쟁이 그것들이다. 자연적 사건과는 다른 역사적 사건, 기계적 반복이 아닌, 차생적 반복의 영원회귀를 함축하는 역사적 반복, 그리고 진화론적 투쟁이 아닌, 억압과 회귀가 영원회귀에 연관되는 역사적 투쟁. 한마디로 말해서, 역사는 억압과 해방 사이의 투쟁을 포함하는 역사적 사건들의 차생적 반복들의 영원회귀이다.
--- pp.360~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