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로, 엄마로, 직업인으로 사는 것이 참 버겁잖아요.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많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도 많고요. 일하다 말고 옥상에 올라가 울기도 하고, 운전하면서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시원하게 욕을 할 때도 있고 말이지요. 다들 그렇지 않으신가요?
저는 여성 미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만 억울한 게 아니고, 나만 방황하는 것이 아니고, 나만 슬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다들 그렇게 살아.’라는 공허하게 들렸던 위로가 그들의 삶을 통해 실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것이 제게 참 위안을 주더라고요. 또한 여성 미술가들이 비록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끝내 너무나도 멋진 작품을 남겼다는 점에 자부심과 통쾌함을 동시에 느꼈어요. ‘우리 언니’가 세상을 향해 ‘강펀치’를 날린 느낌이랄까요. 그것이 제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지요.
--- p.6, 「‘여자의 미술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중에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았던 프리다 칼로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삶이여, 만세〉입니다. 숨을 거두기 8일 전에 완성한 작품이에요. 일곱 개의 수박이 그려진, 일종의 정물화지요. 빨간 속살을 드러낸 탐스러운 수박이 찬란합니다. 맨 앞에 그려진 수박에는 ‘Viva La Vida’라고 쓰여 있어요. 스페인어로 ‘삶이여, 만세’라는 뜻이에요. 그 바로 아래 프리다 칼로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어느 누가 봐도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다고 인정할 만한 프리다 칼로가 인생의 마지막 그림에 꾹꾹 새겨 넣은 문구가 생에 대한 찬미라니요. 그의 삶의 여정을 아는 이들은 “삶이여, 만세!”라는 마지막 외침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 우리가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사랑하고, 그의 삶이 자꾸 회자되는 이유는 아마도 제 몫의 고통을 강하고 멋지게 뚫고 지나간 프리다를 보며, 내 인생의 몫을 살아 낼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어서일 겁니다.
--- p.27~29, 「01. 프리다 칼로」 중에서
쿠사마는 건강에 발목이 잡혀 전성기를 뒤로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1973년, 그가 마흔다섯 살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의 정확한 병명은 ‘이인증(離人症)’입니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느낌이라고 쿠사마는 설명합니다. 땡땡이 무늬가 천장에 보이다가 벽과 땅으로 퍼지고, 몸까지 뒤덮어 자신이 사라지는 환각, 더불어 몸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 거기에 이상한 소리까지 종종 들리는 것이 그가 겪는 증상입니다. … 그러나 쿠사마는 자신의 병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정신 질환이 불러오는 환각을 매일 반복해서 재생산했지요. 땡땡이와 그물로 캔버스를 가득 메우면서 고통의 실체를 직면하는 것이지요. 그는 “병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 작품을 만드는 일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정신 질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쿠사마 야요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트레이드마크인 ‘땡땡이 호박’은 이인증이라는 정신 질환을 마주하고 작품을 통해 극복해 내려 했던 쿠사마의 태도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 p.43, 「02. 쿠사마 야요이」 중에서
이미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로 살고 있는 이들은 잘 알고 있지요. ‘나’로 살아가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이 어려운 일을 멋지게 해낸 사람이 있습니다. 오노 요코입니다. 대중에게는 락의 전설 존 레넌의 두 번째 부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오노 요코는 미술과 음악의 영역을 넘나들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펼친 일본계 전위예술가예요.
세상은 한때 오노 요코를 ‘마녀’라 불렀습니다. 요코는 비틀스를 해체시킨 주범으로 지목되거나, 존 레넌을 해괴한 전위예술의 길로 이끌었다는 악평을 받기도 했지요. 심지어 요코가 존 레넌의 돈을 노리고 접근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모두 검증되지 않은 유언비어나 악의에 찬 헛소문이지만, 한번 박힌 부정적인 이미지는 끈질기게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에게 덧씌워진 이미지가 전면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노 요코는 마녀가 아니에요. 그는 세상이 정한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미술과 음악의 두 영역에서 전례 없는 작품 세계를 구축했던 멋진 예술가입니다.
--- p.82~83, 「05. 오노 요코」 중에서
로랑생의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작품을 평가하는 우리의 기준을 다시 생각해 보게끔 합니다. 혹시 지금껏 우리는 크고, 강하고, 묵직하고, 심각한 것들만 위대하다고 평가해 온 것은 아닌지요? 혹은 마리 로랑생이 ‘여성’이기 때문에 파스텔 톤으로 인물을 그렸고, 그런 그림에는 ‘깊이가 없다’고 평가절하한 것은 아닐까요? 마리 로랑생과 동시대에 활동했고 똑같이 파스텔 톤으로 그림을 그린 마르크 샤갈은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랐는걸요. 다시 한번 물어보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는 잘못된 기준으로, 편협한 시선으로 그림을 봤던 것은 아닐까요?
마리 로랑생과 그의 작품은 이렇게 여러 질문을 이끌어 냅니다. 그가 오늘날에 잊히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로랑생은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자기 자리를 홀로 굳건히 지켰습니다. 마리 로랑생과 같은 여성 화가가 오래도록 기억되면 좋겠어요. 또한 편협한 기준에 의해 잊혔던 다른 화가들이 더욱 많이 발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p.110~111, 「06. 마리 로랑생」 중에서
오를랑은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총 아홉 번의 성형수술을 감행했어요. 수술대 위에서 실제 의사가 오를랑의 살을 찢고 봉합하는 과정을 가감 없이 여러 나라의 갤러리들에 실시간으로 방송했습니다. 이때 국소마취를 한 오를랑의 정신은 언제나 깨어 있었어요. 이세이 미야케나 파코 라반 같은 디자이너들이 만든 오트쿠튀르(고급 맞춤복)를 입은 채 수술대에 누워 의사에게 지시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시를 낭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배경음악이 연주되었고요. 오를랑은 이런 장치들을 통해 수술이자 작품인 이 행위가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예술, 외과 수술과 연극 등 상반되는 세계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연출했어요. …그리고 1993년 5월, 자신의 마흔세 번째 생일을 맞아 이마에 두 개의 혹을 이식하며 프로젝트의 마지막을 알렸어요. 종종 오를랑은 눈썹과 이마 사이에 실리콘을 이식해 만든 인공 뿔에 반짝이는 화장품을 발라 강조하기도 하는데, 이마의 혹은 새로운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신의 신체에 대해 완벽한 주체가 되었음을 기념하는 자유의 표식으로 기능합니다.
--- p.135~136, 「08. 생트 오를랑」 중에서
마음이 삭갈린다, 열이 적어진다, 해이해진다, 아기 생각 살림 생각이 뛰어온다…. 아무리 일에 대한 열정이 커도 아이를 낳은 뒤에 마음이 나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싶습니다.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모로서 핏덩이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니까요. 나의 전력을 다했지만, 이제 이를 배분해야 하는 때가 왔습니다.
요즘 엄마들도 똑같습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일에 하루 종일 몰입할 수 있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일에 집중할 시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과 육아가 양자 선택의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하지만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지요. 엄마가 일을 하려면 사회구조적으로 많은 부분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문화적으로도 성숙해야 해요. 물론 정찬영의 경우엔 가정의 협조가 컸던 것으로 보이지만, 출산 후에 일에 집중할 수 없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 p.173~174, 「10. 정찬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