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찬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필요성과 편찬 이유, 서술 형식 및 효용성까지를 명쾌하게 밝히었다. 패관(稗官) 작품과 야사(野史)의 특이한 이야기를 찾아보고 신기한 내용을 널리 고찰하면, 역사 기록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충할 수 있고 소담(笑談)의 기본 자료를 얻을 수 있으므로, 문장가들이 완전히 담을 쌓아 외면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그 필요성을 제시했다.
--- p.5 「역자 서문」 중에서
이 책은 조선 후기 다른 야담집과 달리 서문에서 편찬자의 명확한 편찬 의도와 방향을 제시하였고, 그 체제와 수록 작품의 분류 체계가 주제별로 잘 정돈되어 20세기 이전에 국내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설화분류법을 제시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지(書誌) 체제를 보면, 2권을 1책으로 하여, 제1책이 101장(張), 제2책이 87장, 제3책이 104장, 제4책이 120장, 제5책이 106장, 제6책이 114장, 제7책이 111장, 제8책이 108장으로 구성되었다.
--- p.6 「역자 서문」 중에서
중국 고대의 역사 사실이나 고사가 문장 속에 매우 많이 혼융되어 있으며, 고대 문헌에만 드물게 등장하는 난해한 단어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이러한 학구적인 저술 형태와 저본의 불확실성 때문에, 그 자료적 가치가 지대함에도 그동안 우리말의 완역이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 p.8 「역자 서문」 중에서
해천서당(海川書堂) 김현룡 교수는 이 『동야휘집』 완역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 후학들의 요청으로 5년여에 걸친 원전 강독을 마친 다음, 수강한 문하생들로 하여금 우리말 번역을 진행하게 하여 마침내 완역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강독과 번역을 위해 우리나라와 중국의 수많은 사서와 전적을 참고하였고, 많은 사전류를 열람하셨다.
--- p.9 「역자 서문」 중에서
내가 긴 여름 동안 병으로 요양하면서, 우연히 『어우야담(於于野談)』과 『기문총화(紀聞叢話)』를열람해보았는데,눈을부릅뜨고볼 만한곳이자못 많았지만, 오직 이 기록들의 본모습이 산일(散逸)되고 누락되어, 그 개략적인 참모습의 만분의 일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곧 이 두 책에서 그 내용이 길고 방대한 이야기와 옛 사실을 고증할 만한 것들을 뽑아 모으고, 주변의 다른 책들 중에서 함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자료들을 아울러 다듬고 보충하여 책으로 엮었다. 또한 나아가 민간에 널리 전승되는 고담(古談)들을 채집해, 문장으로 구성하여 역시 함께 넣어 수록하였다.
--- p.32 「원전 서문」 중에서
이 책 속에 실린 바 이야기에는 민간 사람들 정서와 세상 물정들이 손바닥 위에서 짚어 가리키는 것처럼 환하게 나타나 있어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사건들을 집어내어 그 습속들을 경험해 보는 것 같으니, 오늘날 세상 사람들 교화(敎化)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록 간혹 현실과 거리가 먼 허황된 사건이나 괴이한 신귀(神鬼) 이야기인, 옛 성인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지 않았다고 하는 괴력난신(怪力亂神) 관련 내용이라 할지라도, 이미 기록되어 전하고 하나의 전설(傳說)과 고사(故事)로 굳어진 이야기는 역시 빠짐없이 수록하였다.
--- p.33 「원전 서문」 중에서
『동야휘집 완역본 제1책』
세종 임금 때는 문치(文治)를 장려하고 연마하였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선비들을 뽑아 들여, 학사들에게 교대로 숙직을 하게 했고, 임금의 은총이 융성하여 모두 신선이 사는 삼신산(三神山)의 영주(瀛州)에 오른 것에 비기었다. 하루는 임금이 한 내관에게 명하여 당직하는 학사가 무엇을 하는지 엿보고 오라 했는데, 숙직하는 학사가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고 있어서, 내관이 돌아와 아뢰니 서너 번을 다시 가서 보고 오라고 하였다. 학사는 글 읽기를 그치지 않다가 첫닭이 운 다음에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다.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입고 있던 담비 갖옷인 초구(貂?)를 벗어 주면서, 학사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몸에 덮어 주라고 명하였다.
--- p.41
요동백(遼東伯) 충무공(忠武公) 김응하〈金應河; 선조13(1580)~광해군11(1619)〉의 자는 경희(景羲)이고, 철원 김씨(鐵原金氏)이다. 키가 팔 척이나 되고, 용모가 거룩하고 위엄스러웠으며 기상이 훤칠하고 우러러보였다. 한 번 식사에 능히 큰 소의 다리를 먹었고 술 몇 말을 마시고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활쏘기 기예가 뛰어났으며 무과에 급제했다.
그가 젊었을 때 열병(熱病)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 한 친구가 열을 식히는 냉약(冷藥)을 가지고 와 크게 호통쳐 말했다.
“자네는 일찍이 국사(國事)를 위해 죽겠다고 스스로 자부하더니, 이제 한 가지 병으로 적막하게 쓸쓸히 죽을 셈인가?”
--- p.224
좌랑(佐郞) 이경류〈李慶流; 명종19(1564)~선조25(1592)〉는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그 중형(仲兄)이 학문을 그만두고 무업(武業)을 닦아 무인 직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방장(助防將) 변기(邊璣)가 출전하면서 그 중형을 종사관으로 차출하였는데, 명령서에 이름이 아우 이경류(李慶流) 이름으로 잘못 기록되어 내려왔다. 형이 말하기를 자신의 이름이 아우 이름으로 잘못 기록되었으니, 당연히 전쟁에 나가겠다고 했다. 이에 이경류는 이미 명령서에 자기의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 마땅히 자기가 출정하겠다고 하고는 짐을 꾸려 모친께 인사를 올리고 급히 전쟁터로 나아갔다.
--- p.382
서천령(西川令)은 종실(宗室) 사람이다. 재주와 기예가 뛰어났으며, 바둑을 잘 두어 우리나라 최고 바둑 국수(國手)로 알려져 세상에서 그를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바둑 두는 사람 중 묘한 수법을 전하는 사람을 일컬어, ‘서천령 수법(西川令手法)’이라 말한다. 한 늙은 상번 군사(上番軍士)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매우 좋은 말을 끌고 와서는 서천령을 알현하고 말했다.
“어르신께서 바둑을 잘 두신다고 들었습니다. 소인이 바둑 두는 법을 조금 알고 있어서, 감히 어르신과 상대하여 바둑을 두어 그 기묘한 비결을 감상하고자 청하옵니다.”
--- p.584
『동야휘집 완역본 제2책』
상서(尙書) 김씨(金氏) 한 분은 김구(金構) 상공(相公)의 조선(祖先)이다. 상서는 사람을 알아보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보니 한 총각이 있는데, 남루한 옷을 입고 몸이 말라 병든 것 같았지만, 그 형상과 골격이 빼어나고 기이했다. 그래서 집으로 데리고 와서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사고무친(四顧無親)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 저잣거리에서 걸식을 하고 있으며, 제 자신의 성명도 알지 못하고 나이는 금년 십칠 세입니다.”
--- p.107
함영구(咸永龜)는 가평(加平) 향교에서 글공부하는 선비이다. 나이 어려 아직 장가들기 전이었는데,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대충 통달했다. 어떤 일로 관동(關東) 지역을 가게 되어 야윈 말을 타고는 어린 종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가는 길에 비를 만나 옷이 다 젖었다. 반나절이나 더 가서 어떤 산 아래에 이르니, 문득 종이 말 앞에서 사망했다. 선비는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고 종의 시체를 끌어다가 벼랑 옆에 두고는 솔가지를 꺾어 덮었다. 그리고 홀로 눈물을 머금으며 말에 올라 다시 나아갔다. 몇 리쯤 갔을 때 말 또한 땅에 넘어져 죽고 말았다. 앞길은 묘연하고 비 또한 그치지 않으니, 단신으로 걸어간다면 도달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처지에, 다만 길에 앉아 슬피 울 따름이었다.
--- p.218
어리석은 숙부(叔父), 곧 치숙(癡叔)이라 불리는 유씨(柳氏)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숙부이다. 사람됨이 어리석고 우둔한 것이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 같아서 집안에서 치숙, 즉 ‘어리석은 숙부’라 불렸다. 그는 술을 즐겼지만 집이 가난해 술을 빚을 수 없었는데 이에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자, 여러 학동들이 간혹 술항아리와 찬합을 가지고 와 대접했다.
과거 시험 관련 문예(文藝)를 스스로 일삼아 연마하지 않았지만, 곧 머릿속에 외고 있었다. 매양 향시(鄕試) 때가 되면 과거 문장의 여러 문체를 암송하고는, 학동들에게 그 규식(規式)대로 모방하여 제작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학동들이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면 시제(詩題)의 의미가 반드시 미리 익혔던 것과 유사한 것을 만나게 되어, 모두 급제를 했다.
--- p.357
이징옥〈李澄玉; ?~단종1(1453)〉은 양산(梁山)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장정 만 명으로도 당하지 못하는 용기가 있었고, 그 형 이징석〈李澄石; ?~세조7(1461)〉 역시 힘이 매우 세었다. 그 모친이 일 년여 동안이나 학질(?疾)을 앓으면서 살아 있는 산돼지를 보면 마음속 병이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했더니, 두 아들은 곧 산돼지를 잡으러 떠났다. 이때 징석은 나이 십팔 세였고, 징옥은 십삼 세였다. 징석이 바로 그날 한 마리의 산돼지를 활로 쏘아 잡아 돌아오니, 모친이 보고서 매우 기뻐했는데, 징옥은 수일이 지나서야 돌아오면서 빈손으로 대문을 들어섰다.
--- p.531
『동야휘집 완역본 제3책』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김씨(金氏)는 영조(英祖) 때의 이름난 무인(武人)이다. 일찍이 임금이 활쏘기 시험장에 납시었을 때 별군직(別軍職)으로 호위를 맡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제주 목사 자리가 비어 있었다. 장막 뒤에서 여러 동료들과 농담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만약에 제주 목사가 된다면 곧 마땅히 만고 제일(萬古第一)의 치적을 이루고,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재물도 모을 수 있다.”
이 말에 여러 동료들이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말이라고 하면서 웃었는데, 마침 막사 안에서 임금이 그 말을 듣고, 누가 이 말을 했느냐고 물었다.
--- p.216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인조7(1629)~숙종15(1689)〉 부인 나씨(羅氏)는 명촌(明村) 나양좌〈羅良佐; 인조16(1638)~숙종36(1710)〉의 누이이다.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어서 사위를 가리기 위해 셋째 아들 김창흡〈金昌翕; 효종4(1653)~경종2(1722)〉을 시켜 민씨(閔氏) 집안 여러 아들들을 살펴보고 오라고 했다. 김창흡이 돌아와 말하기를, 민씨 집안 아들들은 하나같이 기개가 모자라고 또한 얼굴이 헌칠하지 않으니, 가히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이 말에 나씨 부인은 큰 집안 자손들이 어찌 그러하냐고 의아해했다.
--- p.385
어리석은 숙부(叔父), 곧 치숙(癡叔)이라 불리는 유씨(柳氏)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숙부이다. 사람됨이 어리석고 우둔한 것이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 같아서 집안에서 치숙, 즉 ‘어리석은 숙부’라 불렸다. 그는 술을 즐겼지만 집이 가난해 술을 빚을 수 없었는데 이에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자, 여러 학동들이 간혹 술항아리와 찬합을 가지고 와 대접했다.
과거 시험 관련 문예(文藝)를 스스로 일삼아 연마하지 않았지만, 곧 머릿속에 외고 있었다. 매양 향시(鄕試) 때가 되면 과거 문장의 여러 문체를 암송하고는, 학동들에게 그 규식(規式)대로 모방하여 제작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학동들이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면 시제(詩題)의 의미가 반드시 미리 익혔던 것과 유사한 것을 만나게 되어, 모두 급제를 했다.
--- p.357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중종12(1517)~선조17(1584)〉 부친은 음관(蔭官)으로 영광(靈光) 군수가 되었는데 정치를 잘하여, 백성들이 왜 이제야 왔느냐는 내모지요(來暮之謠)를 부르며 그를 칭송했다. 어떤 일로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영광에 도착하기 하루 전, 쉬어갈 역참(驛站)이 조금 먼 곳에 있는 까닭에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미처 역참에 도착하기 전에 사람과 말이 모두 지쳤으므로, 군수는 따르는 아전에게 마을 민가를 찾아 아침밥을 짓도록 명했다. 아전이 자리를 말아 안고 헐떡이며 길가 한 집으로 들어갔다. 때는 마침 농사철이라 모두 농기구를 들고 들에 나가고 마을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열 살 먹은 여자아이가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 p.548
『동야휘집 완역본 제4책』
첨지(僉知) 유씨(劉氏)는 고성(高城) 사람이다. 그는 집이 삼일호(三日湖) 포구에 있어서 물고기를 잡거나 해초를 채집하는 일을 하였는데, 어릴 적에 작은 배에 올라 물고기를 잡는 동안 배가 큰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갑자기 거대한 한 물체를 만났는데, 그 물체는 매우 커서 산악 같았으며, 파도 사이에 버티고 서더니 입을 벌려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 입의 크기가 성문(城門)만 하고 빨아들이는 기운은 질풍과 같아서, 배와 함께 파도를 둘둘 말아 몰아서 입속으로 삼키는 것이었다. 유 첨지가 그 물체의 배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 살펴보니 어둡고 깜깜하여 아득하게 먼 동굴 속 같았다. 또한 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찌는 듯 더운 열기에 잠시도 견디기 어려웠다. 정신을 수습하여 사방을 더듬어 보았는데 온통 벽으로 막혀 있었다.
--- p.209
차은식(車殷軾)은 영변(寧邊) 사람이다. 활을 쏘아 짐승 사냥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아서, 하루는 묘향산에 들어갔다. 짐승을 쫓아 산길을 얼마나 멀리 달려갔는지를 계산하지 못하고 돌아 헤매어 산속 깊은 곳에 이르렀다. 겹겹이 높은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하는 진퇴유곡의 지경이 되고 말았다. 조금 지나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길 또한 캄캄하게 어두워져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 수가 없어 근심과 걱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 p.381
판서를 역임한 이익보〈李益輔; 숙종34(1708)~영조43(1767)〉는 한 친구인 재상과 나이도 동갑이며 한동네에 살았고, 어려서는 함께 글방에 다녔으며 자라서는 과거 공부를 같이하였다. 성균관 생원이 된 것과 과거 급제에 이르기까지 동년(同年) 아닌 것이 없었으며, 예문관(藝文館)에도 함께 선입되어 들어갔다. 지위와 문벌이며 사람들의 신망과 문필 학식, 풍채에 이르기까지 서로 우열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매사에 서로 경쟁하여 굽히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홍문관(弘文館)에서 함께 당직하며 서로 내기를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어른이 되어서까지 사사건건 모두가 비등하여, 도무지 우열을 결정지을 수가 없었네. 남원(南原)에 한 기생이 있어서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일색이라 하니, 이 기생을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승자가 되기로 하세.”
--- p.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