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에 관심을 가진 분들 대부분이 신비체험을 원하고, 이 책은 바로 그 신비체험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반갑고 흥미로운 책이 될 것이다. 무엇을 신비체험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분들의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겠지만.
이 분야에 평생을 걸어온 역자는 독자들과의 관계에서 적당히 포기할 시점에 이르렀고, 이제는 작업을 함에 있어서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번역자가 마땅히 지켜야 하는 직업적인 충실도를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역자가 하는 작업 자체에 만족할 뿐, 그 성과물이 세상에 나온 뒤에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이 강의는 본래 힌디어로 행해진 것이다. 본 한국어판 번역서는 레블출판사(The Rebel Publishing House)에서 출간한 영문판 In Search of The Miraculous를 기본으로 삼았으며, 또 하나의 영문판인 The Mystic Experience(Dolly Diddee 영역, Motilal Banarasidass 출판사 발행)를 참고했다. 또한 영역본에서 뜻이 명확하지 않거나 두 영역본이 많은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인도인 친구들의 힘을 빌려 힌디어 원전인 Jin Khoja Tin Payinya를 상당 부분 참고했다. 이 쉽지 않은 작업에 도움을 아끼지 않은 여러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춘천 소양강변에서
손 민 규 ---「역자서문」
신은 인격체a person가 아니라 에너지이다. 그리고 에너지는 개인을 고려하지 않는다. 에너지는 개인 각자에게 공평하게 작용한다.
예를 들어, 강둑에 서 있는 나무는 강으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더 크고 강하게 자라난다. 그러나 강 속에 빠진 나무는 거센 물결에 떠내려가면서 파괴된다. 사실 강은 이 두 그루의 나무와 아무 상관도 없다. 강은 둑에 서 있는 나무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데에도 관심이 없고, 떠내려가는 나무를 파괴하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 강은 그저 흐를 뿐이다. 강은 흐르는 에너지이다. 강은 인격체가 아니다.
우리는 항상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 신에 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은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한다. 우리는 신이 친절하고 자비롭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이 항상 축복을 준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기대와 욕망을 신에게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기대와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모든 책임이 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을 인격체로 보기 때문이다. 에너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할 수 없다. 에너지를 다루면서 그 에너지를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꿈속을 헤매는 것이다.
에너지를 에너지로 다루면 그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 중력을 예로 들어보자. 그대가 땅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은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력이 특별히 그대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걷지 않아도 중력은 끊임없이 작용한다. 그대가 걷지 않으면 중력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중력은 그대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그대가 사라진 다음에도 있을 것이다.
잘못 걷다가 넘어지면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이 또한 중력의 작용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누군가 고발할 수는 없다. 책임을 질 사람이 없다. 중력은 에너지의 흐름이다. 중력을 다루고자 한다면 그 작용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중력은 자신의 법칙을 따를 뿐 그대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신의 에너지는 각 개인을 고려해서 작용하지 않는다. 사실, ‘신의 에너지’라는 말은 적당치 않다. ‘신은 에너지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신은 그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는다. 신이라는 에너지는 고유의 영원한 법칙을 가지며, 이 법칙에 따른다. 이 영원한 법칙이 종교이다. 종교란 신이라는 에너지가 행동하는 법칙을 의미한다. 그대가 이해와 분별력을 갖고 이 에너지와 일치되게 행동하면 이 에너지는 은총이 된다. 이것은 에너지 자체에서 비롯되는 일이 아니라 그대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그대의 행동이 에너지를 은총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정반대로 행동한다면, 에너지의 법칙과 상반되게 행동한다면 이 에너지는 은총과 거리가 멀다. 신이 은총을 거두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대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것은 오류이다. 신은 인격체가 아니라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기도와 예배는 아무 의미도 없다. 신에게 무엇인가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신성한 에너지가 축복과 은총을 가져다주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 영적인 수행이 의미를 갖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기도는 무의미하다. 명상은 의미가 있지만 예배는 무의미하다. 이 차이점을 분명하게 이해하라.
앞으로 도래할 몇 십년간은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이제 소수의 영적인 사람들만으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강력한 영성靈性,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규모의 영적인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질주의라는 수렁에서 이 세상을 구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앞으로 도래하는 시기는 인간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다가오는 50년 동안이 결정적인 시기로 작용할 것이다.
종교가 살아남거나 아니면 종교에 반대되는 모든 것이 살아남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이 50년이 붓다, 마하비라, 크리슈나, 예수, 모하메드, 라마Rama 등의
선각자들이 일구어놓은 일을 결정할 것이다. 천칭 저울로 비교한다면, 이 빛나는 존재들은 우리 쪽에 있고, 다른 쪽에는 비정상적인 정치가들, 유물론자들, 그리고 망상과 무지에 찬 사람들이 있다.
우리 쪽에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들 쪽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이 투쟁이 곧 절정에 이를 것이다. 그대도 알고 있듯이, 우리 쪽에는 소수의 사람들 밖에 없다. 지금 상태로는 별로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적인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간단하고도 자연스러우며 쉬운 길이 발견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소수의 사람들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대에는 단 한 사람이 깨닫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 시점에서 소수의 사람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대규모의 영적인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런 운동만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