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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사랑

문득,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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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14쪽 | 125*200*20mm
ISBN13 9791192828183
ISBN10 1192828186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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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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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었던 빗장 풀고 한걸음 내디뎠다

아침 해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자
지난밤 뒤척거리던 파도 사이로
훅, 비릿한 바람이 뒤따라 들어섰다
해변에 늘어선 횟집과 횟집 사이
이방인처럼 내걸린 옷가지와 짭조름한 수건
겨울바람보다 더 시린 고단함이 박제되어 있다
난파선 같은 삶 속에서도 일상이 꼿꼿하다는 것은
어디서든 살아내고 있다는 흔적
해풍이 드나들어 부스럭거리는 몸에는
검은 갯골이 혈관처럼 퍼져 있고
굵은 밧줄에 묶인 배들은 바다를 향해 있다
---「거룩한 일상」중에서

안개 자욱한 거리를 걷다가
봄비를 맞고 떨어진 무심한 꽃잎 속에서
당신을 보고 뒷걸음쳤지
처음인 듯 나를 뒤흔들고
숨죽였던 육체를 깨웠지
무거운 슬픔으로 짓눌린 시간들은
손끝에 스민 달콤함을 거절하지 못한 채
스러져가는 저 꽃잎처럼
휘발된 하루와 사랑을 시작하고
---「4월의 무심천에서」중에서

가을비는 소나기처럼 세차지도 못하고
암사내처럼 쭈뼛거린다

단풍에 지쳐 구멍 뚫린 뼈들은
낡아진 코트 자락의 주름처럼 상처로 가득하고

스스로 헐벗어가는 나무는
화려한 도시의 쓸쓸한 배경이 되어간다

깊은 생채기들은 문 앞에서 서성이다
사라지는 계절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가난한 11월에 대한」중에서

가려진 잔가지들 사이로
가쁜 호흡 내뱉으며
담담히 견디던 너의 몸에서
단물이 차오르는
그 순간을 기억하는 일은
행복이다

한때는 연초록으로
나무를 꿈꾸었다가
아쉬움을 두른 채
기울어가는 저 노을처럼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점차 조급함을 내보이는 일은
반가움이다
---「가을나무」중에서

꽃바람 가득 품은 초록
온몸으로 스며든 후에도
여전히 너를 잊지 못해
일평생 키 작은 보랏빛
---「제비꽃」중에서

하늘은 침묵을 깨고, 봄비는 내리고, 온 산야를 충동질하고, 꽃봉오리 수줍게 흔들고, 꽃은 피어오르고, 사랑은 시작되고,
---「문득, 사랑」중에서

폭염을 머리에 이고
실가지를 늘어뜨린 채
담장을 타고 올라
그리움으로 물들어버린


더 가깝게 네 숨결 느끼고 싶어
멈춰 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손 내밀면
차마 떠나지 못하고 바람결 따라
툭, 툭, 꽃으로 눈물을 대신하는

---「능소화 연가」중에서

온종일 사선과 직선을 그어대던
긴 비 그치자
다급하게 쏟아져 내리는 태양
서서히 드러나는 너의 실체는
매섭게 다가와
일순간 세상을 정지시키고
열대야 속에서
철들지 못해 배를 비비던
매미들은 진저리 친다
너의 침묵 앞에
나무와 나무 사이의 텅 빈 시간은
진초록 숲으로 법석거리는데
느닷없이 다가선 너는
서성거리며 흔들리는 나를 향해
설익은 미소를 보낸다
---「8월에게」중에서

스토로브 잣나무 숲

임도를 벗어나
잡목 사이 작은 바위 끝자락
냉큼 올라앉아
낮게 포진하며
세계를 열어가는 초록의 무리들

볕뉘로 떨어지는 한 줌 햇살에 기대어
분주하게 전진하는 너의 부르튼 손
미세한 통증에도 나는 말이 많다

스토로브 잣나무 숲
바위틈에 기대어 가느다란 손목으로
저 경계 너머의 생을 향해 오르는
거침없는 너의 강인함이 눈물겹다
---「우리는 그를 담쟁이라 부른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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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열림’을 가능케 하는 미래적 시간으로서의 ‘사랑’. 모든 슬픔과 모든 견딤과 모든 떨림은 바로 이 미래적 시간을 향한 시적 지향을 위해 준비된 감정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이 사랑은 다만 사랑인 것이면서, 단지 사랑이라 말하기엔 넘쳐흐르는 감정이다. 모든 것의 시작을 위해 예비된 시원으로서의 풍경, 바로 그것이 이 시집이 당신에게 전달하는 ‘사랑’의 모든 것이니 말이다.
- 임지훈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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