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은 가방을 들고 발걸음 가볍게 쌩하니 집으로 돌아왔다. 집 가까운 곳에서 사진 일을 배우면서 알바를 할 수 있다는 데 마음이 놓였다. 기준 시급을 지급하지만, 전문적 일을 배우다 보면 더 나은데 취직할 길이 열릴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무무사에 관심이 많고 흥미가 생겼다. 사장님도 뭔가 신기한 사연이 있는 것 같고, 사진작가가 입을 법한 주머니가 많은 조끼 옷차림이며 긴 머리를 올려 묶은 헤어스타일이 독특하다. 게다가 태도나 행동이 경쾌하고 멋지다. 수경은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배시시 미소를 지으면서 꿈나라로 갔다. 입으로는 무무사, 무무사를 중얼거리면서 모로 누워 뒤척였다.
--- p.44
서용정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서용정의 손톱에는 자그만 하트가 그려진 네일아트가 돋보였다. 헤어나 얼굴 화장도 공들여서 했고, 옷차림도 신경 써서 하얀 셔츠를 단정하게 입었다. “정말 소원을 들어주나요? 여기서 소원을 들어준다면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어요.”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 이야기가 저에게 당기는 흥미로운 이야기라면 가능하죠. 말씀해보세요.” 서용정은 머리를 하나로 모아서 곱창 밴드로 묶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가련하게 남편한테 버림받은 여자 이야기라면 흥미를 끌라나요? 그 이야기와 제가 두고 간 샤넬 백이 관련이 있어요. 그리고 2천만 원을 다 써야 해요. 그 이유도 말씀드릴게요.”
--- p.50쪽
“나중에 상처받을까 걱정도 돼요.” 연주는 진지하게 말했다. “배우자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유족은 애도의 기간을 갖는다고 보통 심리학자들이 말하죠. 그때는 엉뚱한 짓을 하거나, 잠을 너무나 많이 자거나 해도 지켜봐야 된다고 해요. 너무 심하지 않다면 말이죠. 그 애도 기간이 끝나야 슬픔을 이겨내고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온다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수경 씨. 이혼도 가족을 잃는 아픔이죠.”
--- p.60~61
연주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헤어진 과정을 자세히 말해주세요. 전후 과정과 현재의 상황을 비교해봐야 사진을 찍더라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죠.” “제가 판교에 있는 게임회사 다니면서 너무 바빴거든요. 프로그래머로 일했는데, 여친이 톡을 보내도 바빠 놓쳐요. 나중에 답을 보내야지 하다가도 혹시 여친이 자는 것 같아서 혹은 피곤할까 답을 잘 안 했어요. 그러다 사이가 멀어지고, 영화를 봐도 어색하고, 더 이상 둘만의 대화가 사라진 거죠. 항상 연애하는 내내 겁이 났어요.이렇게 말하면 여친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저렇게 행동하면 화가 나지 않을까 가늠하다 연애가 6개월 만에 끝났어요. 그리고 다시는 그때처럼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실연의 상처를 입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파파라라 캐릭터를 알고 가상세계에서 파파라라만 생각하고 살았어요. 일하고 파파라라 캐릭터 굿즈를 모으고 애니메이션 보고 게임하고 그게 낙입니다.”
--- p.79
임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이런 관계가 연인보다 더 오래가기도 하죠. 일시적이 아닌,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요.” 수경이 마음이 편해져 환하게 웃었다. “남사친 이런 단어로 정의하고 싶지 않아요. 단지 나이와 성별, 학연, 지연을 다 떠나서 그냥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도 있는 거죠.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관계요.” “여기 무무사처럼요? 수경 님, 처음 이곳에 사연을 남기러 방문했을 때 왜인지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공간에서 주는 느낌이 좋았어요. 그런 곳을 방문하면 그 회사는 오래 다니고, 동료들도 좋고 그렇더라구요. 카페도 내 아지트 같은 곳이 있구요. 무무사가 주는 좋은 기운, 그런 느낌?”
--- p.115~116
수경은 안심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향했다. 무무사의 불빛이 누군가의 어두운 밤 같은 마음에 빛이 들게 해서,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면 그것보다 더 기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한 걸음. 아주 한 걸음. 그걸 나올 수 있는 용기와 에너지는 홀로는 얻기 힘들다. 누군가 도움을 줄 때 그 길고 긴 터널 같은 어려운 상황들을 조금이나마 헤쳐나가서 불행에서 벗어나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