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남선녀처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커플.
조각처럼 빚어져 한번쯤은 뒤돌아서 볼 법한 남자와 단아한 모습과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선이 새하얀 얼굴과 어울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여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천생연분처럼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연인의 모습은 최고의 작품과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과는 달리 둘의 분위기는 주변의 추위를 잠식시킬 정도로 차가웠다. 냉정히 응수하고 있는 남자에게서 나오는 말에 추위에 발그레해진 뺨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여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말이야?”
“그만 끝내자.”
서슴없이 말하는 사내의 말은 시린 칼날과 같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말에 여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장난치고 너무 센데?”
“장난 아니야.”
차갑기 그지없는 음성은 결코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여자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르르 떨렸다. 어색하게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경직되었다.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저은 여자가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장난하는 거지?”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난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겠어.”
“헤어지자.”
“오빠!”
경악에 찬 여자의 음성. 하지만 사내는 여자의 그런 애처로움이 보이지 않는지 무표정만을 고수할 뿐이었다. 거짓말처럼 들리는 사내의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여자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다.”
“뭐가? 뭐가 여기까지야?”
“…….”
“왜 그래? 왜 갑자기? 나 할 말도 있단 말이야. 있지, 내가 오늘 오빠에게 소중한 선물을…….”
“나란 남자 잊어.”
잔인한 사내의 말을 애써 지우며 여자는 명랑하게 밝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곧 잊으라고 말하는 차갑고도 냉정한 말이 메아리치듯 울렸다.
“오빠라면 그래, 하고 잊을 수 있겠어?”
“어, 잊어.”
아무런 예고도 없었던 일방적인 통보였다. 연인들을 위한 날과 같았던 크리스마스이브.
설렘을 가슴에 담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행복해하는 날.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나누기에도 바쁜 그런 날, 그는 냉정하게도 잔인하게 자신의 연인을 내치고 있었다.
“왜?”
“…….”
그는 여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가냘픈 여자의 어깨까지 늘어뜨린 칠흑 같은 흑발은 하염없이 내리고 있는 눈으로 인해 송골송골 이슬이 맺혀 가고 있었다. 그녀의 까만 눈은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술렁이고 있었다. 이별을 통보한 사내에게서 무언가 일말의 감정이라도 읽으려는 듯 그녀의 눈동자는 쉬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캐럴은 싹 지워져 버릴 정도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재미없다. 이런 장난치지 마.”
“장난?”
너무나 차갑다. 인정하고 싶지 않는 살을 에는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여자를 아프게 만들었다.
“장난 아니란 거 알 텐데.”
“내게 왜 이러는 거야?”
“이서진!”
“나 놀리는 거지? 그런 거지?”
“…….”
“말해! 말해 봐!”
조곤조곤했던 말투는 이제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여자의 눈에 가득 담긴 상처가 아슬하고도 위태롭게 보였다.
“잘 지내라.”
잔인하고도 차가운 선물이었다. 설렘으로 가득했던 날은, 아름다울 거라 생각했던 날은 사라졌다. 그 대신 차가운 이별이, 잔인한 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차도건, 날 버리는 거야?”
“…….”
“이렇게 처참하게 버리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어?”
“이서진!”
이름 한 자 한 자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에 알고 있는 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언제나 봄날같이 따스하게 들려왔던 음성은 이토록 냉정한 음성이 아니었다.
“차가워. 언제나 내게 따뜻했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차도건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야.”
끝까지 모질게 내비쳐 지는 눈동자가 그녀의 동공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모두 꿈이고, 이것이 현실이라는 듯 여자의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일 년에 한 번뿐인 크리스마스. 그리고 일생에 가장 기억에 남을 선물을 가져왔다고 생각하고 있던 여자를 남자는 냉정히 외면했다.
“나란 사내, 네 기억에서 지워.”
잃었다. 사랑하는 연인의 연을 그는 끊어 내야 했다. 차도건은 이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게 되었다.
‘서진아.’
이서진이란 여인의 두 눈동자 깊숙이 자리 잡힌 상처에 그의 심장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놓아줘야 한다. 너무나 소중하기에 그녀를 버려야 한다.
‘사실은 이러고 싶지 않았어.’
그녀에게 끝까지 차가움을 가장한 채 또다시 상처를 주어야만 했다. 가슴이 아팠다. 뻐근하게 몰려오는 통증이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서진아, 메리크리스마스.’
헤어지자는 말 대신 꼭 하고 싶었던 말이 묻혔다. 그는 자신의 연인에게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선물을 선사해야만 했다. 행복한 연인들이 뜻 깊어 하는 날, 추운 날씨임에도 서로에게 가장 따뜻함을 느끼는 이날, 야멸치게 그의 소중한 파랑새에게 이별을 고해야 했다.
연인의 눈물에 이를 악물고 가슴에 깊게 새겨 담았다. 결코, 잊지 못할 연인에 대해 먹먹하게 자리 잡고 아파하는 심장을 묵인한 채 그는 끝까지 연인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에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렸다.
‘난 널 버린 게 아니야. 난 널 잃은 거야.’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은 목구멍에서 나오지 못한 채 가슴속에서 짓이겨지도록 말하고 있었다. 끝내 상처 받은 눈물 맺힌 눈동자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보란 듯이 이제 냉정하게 뒤돌아서야 했다.
“날 버리는 거야?”
뜨거운 눈물을 머금은 한마디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움직일 수도 뒤돌 수도 없는 가녀린 음성에 도건은 냉정하게 그리고 야멸치게 말했다.
“어.”
“진심이야?”
“어.”
“오빠가 말한 사랑이 결국 이런 거였어?”
“아마도.”
“날, 사랑하기는 해?”
마지막까지 뒤돌아서는 그 순간까지 그녀가 물었다. 사랑을 하냐고.
도건은 그녀의 절망 앞에서 말하고 싶었다. 너무나 널 사랑한다고, 그래서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어서 더 아프다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랑해. 너무 깊이. 잃을까 봐. 널 잃을까 봐 겁이 날 정도로.’
믿기지 않는다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잔인하게 말 한마디 내뱉는 게 이토록 힘들 줄은 몰랐다.
“내게 이러지 마.”
“잊어. 내가 말한 사랑을, 내가 보여준 마음을…….”
“잊을 수가 있어? 어떻게? 그게 쉬워?”
“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 어떻게!”
도건도 소리쳐 말하고 싶었다. 쉽게 말하다니? 한 번도 쉽게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랬다면 이렇게 가슴을 엘 듯 찾아오는 고통 따윈 느끼지 않을 테니까. 도건은 목구멍을 넘어서려는 말을 참아내며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여기까지인가 보다.”
도건은 굳어 버린 다리를 애써 움직이며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멀어져 갔다. 한 걸음 두 걸음 거리를 둘수록 당장 뒤돌아 울고 있는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 주고 싶었다. 흐릿해지는 시선 사이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연인들의 모습이 그의 망막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뜨겁게 타올랐던 가슴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 온기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아픔으로 인해, 사랑하는 연인을 버린 죗값을 치르기 위해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서진아, 어떻게 네게 말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을, 내 심장을!’
4년간 지속해 온 사랑이었다. 아직도 가슴속에서 피어나고 있는 사랑이고 뜨겁고 소중한 존재였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사랑을 함께할 수가 없었다. 함께하기엔 그는 나약하고 어렸다. 함께하기엔 그는 힘이 없었다.
‘서진아. 내가 못나서 그래. 나란 놈이 못나서 그런다.’
차도건이란 인물은 그들에겐 갓 알에서 부화한 햇병아리 수준이었다. 옥죄어 오는 통증이 그의 기도를 막히게 만들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산소와 같았던 그녀를 잃었다. 이제 다시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네가 보고 싶은데.’
굳은 결심은 되바라지게 그를 끈덕지게 가슴속에서 방망이질하고 있었다. 뒤돌아보지 마라. 그냥 앞만 보고 걸어라. 그것이 너의 길이라고 가슴을 누른 이성이 소리치고 있었다.
‘견뎌 내! 내가 선택한 일이야. 차도건 이제 와서 후회해? 무슨 자격으로? 억울한가?’
끝까지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는 순간 이성을 잃고 달려가 거짓말이었다고, 진심이 아니었다고, 자신의 마음은 언제나 같다고, 너와 행복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다고 말하고 보듬고 싶었다.
‘서진아!’
그는 자신의 파랑새를 미친 듯이 열렬하게 품에 안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처지가, 그의 족쇄가 그의 온몸을 비틀고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코 원치 않았던 자의가 아닌 타인으로 인한 이별.
‘서진아. 네 눈물, 네 아픔, 내가 다 가져가고 싶다.’
차도건은 이날 차가운 선물을 연인에게 선사했다. 그리고 자신의 연인을 잃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