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합천군 가야산에는 해인사라는 큰절이 있습니다. 여러 스님들이 함께 배우며 머무는 큰절이어서 총림 (총림(叢林): 강원(講院)·선원(禪院)·율원(律院)을 갖춘 종합 도량. 가장 높은 어른을 방장(方丈)이라 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총림은 많은 스님들이 모인 곳을 나무가 우거진 수풀에 비유한 말입니다. 큰절에 딸린 조그만 절을 암자라고 하는데, 해인사에는 여러 개의 암자가 산속 이곳저곳에 박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백련암입니다. 가야산 중턱에 하얀 연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앉아 있는 백련암은 사백여 년 전에 지은 작은 암자입니다. 이 암자에 가려면 해인사에서 가파른 고갯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힘든 오르막길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사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 암자를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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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은 입고, 먹고, 머무는 것들에 욕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맑고 바르게 깨우치려고 수행할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스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스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는 해가 뜨는지 달이 뜨는지 그런 것은 모르고 산다. 배가 고프면 밥 한 숟갈 뜨고, 피곤하면 자는 것이 내 하루의 일이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대답처럼 아무 때나 자고, 먹고,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항상 밥 10시 이후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2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마다 부처님 앞에 나아가 108번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보기에 젊은 스님들은 잠을 너무 많이 자는 것 같았습니다. 스님은 젊은 스님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곡괭이로 방바닥을 콱 내리찍었습니다. 그러자 한 스님이 불평했습니다.
“스님, 무슨 이유로 곡괭이로 저희의 방을 찍는 것입니까?”
성철 스님은 큰 소리로 나무랐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잠만 자면 언제 공부해?”
그리고는 젊은 스님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옷은 떨어진 것을 모아 몸을 가릴 정도면 된다. 세상 사람과 같이 잘 먹고, 잘 입으려면 집을 떠나서 출가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음식은 영양 부족이 안 될 정도면 되고, 머무는 곳은 바람과 비를 가려 병이 안 날 정도면 된다. 조금이라도 사치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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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이 머무는 백련암은 전혀 화려하지 않습니다. 무슨 치장이나 장식을 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출가 (출가(出家): ① 집을 떠나감. 출문(出門). ② 세속의 집을 떠나 불문(佛門)에 듦. 출세(出世).) 하고부터 큰 절에 머물지 않고 토굴이나 조그만 암자를 찾아다닌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스님이 큰절에 머물지 않는 것은 사람이 북적이는 곳 보 다 조용한 데 있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스님의 생활 방식 때문에 스님이 머물렀던 백련암은 단청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옛날 건물의 벽이나 기둥, 천장 같은 데에 연꽃이나 구름무늬 같은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을 단청이라고 합니다. 단청은 빨간색과 파란색을 주로 사용하므로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습기나 바람, 벌레들로부터 건물을 보존할 수 있어서 나무로 된 절에는 대부분 단청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신도들이 스님의 허락만 떨어지면 단청을 할 생각으로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왜 단청을 안 하십니까?”
“단청한 집에 살기 싫어서 그렇다.”
“치장이나 장식을 싫어하시는 스님의 뜻은 알겠으나, 단청을 하셔야 합니다. 단청을 해야 집이 오래갑니다.”
“20년을 살 집이 10년밖에 안 간다 해도, 나는 단청 안 하고 10년 가는 집에서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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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겨울, 법정 스님이 중앙일보 이은윤 기자와 함께 백련암을 찾아 성철 스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때 법정 스님은 성철 스님의 뜻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여쭈었습니다.
“스님을 뵈려면 누구나 부처님께 삼천 번 절을 올려야 된다고 합니다. 일반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그 까닭을 말씀해 주십시오.”
“흔히 삼천 번 절을 하라고 하면 나를 보기 위해서 하라고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승려라면 부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어느 점으로 보든지 내가 무엇을 가지고 부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와 봐야 아무 이득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 기회를 이용해서 부처님께 절을 하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삼천 번 절을 시키는데,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절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삼천 번 절하고 나면 그 뒤부터는 자연히 절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성철 스님은 이처럼 부처님 앞에 나아가 드리는 절을 신앙 의식이자 생활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스님 자신도 하루가 시작되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108번 절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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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봄, 성철 스님은 경상북도 문경 운달산에 있는 김룡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신라시대 운달 스님이 지은 절입니다. 이 절에서 성철 스님은 신도들을 위해 처음 법회를 열었습니다. ‘운달산 법회’라고 불리는 이 유명한 법회는 일반 불교 신자들도 불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기틀이 되었습니다. 성철 스님은 과학 서적과 자료를 읽고 공부하여 그동안 불교보다 한 걸음 앞선 불교 이론을 전개했습니다. 스님의 풍부한 학식에 학자들도 놀랐습니다. 불교를 2천 년 전의 교훈으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스님은 첨단 물리학인 상대성이론, 변증법, 최면술, 심령과학 등의 예를 들어 불교 교리를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불교의 근본 원리인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상대성이론의 등가 원리로 설명했습니다. 상대성 원리로 얘기해도 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면 다시 물과 얼음에 비유하여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면 물이 얼어 얼음이 된다고 해서 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 듯, 얼음이 녹아 물이 된다고 해서 얼음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얼음이 물로 나타나고,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은 언제나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이치를 설명했습니다. 스님이 심령과학 얘기를 할 때는 더욱 재밌습니다. 여러 가지 윤회와 사실들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죽이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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