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 나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의 궁정동에 있는 큰 식당에서 결혼식 주례를 하고 있었다. 주례를 마친 뒤, 교회 여신도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는데 총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이상하다 싶어 총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까이 가보니 학생들이 경무대 쪽으로 가다가 총을 맞고 밀려나오고 있었다. (…) 들것에 실린 학생들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무언가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에게서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쏟아지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었다. (…) 나는 여러날을 4·19혁명의 현장에서 받은 충격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나 자신이 엉터리 목사로 살아왔다는 것을 거듭 뉘우치고 진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아가 ‘값싼 복음’을 파는 목회를 청산하고 칼 바르트의 말처럼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일에 나를 바치기로 맹세했다. --- '본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의 영적인 구원과 사회적 구원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는 사람의 영혼이 가난과 억눌림,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이웃들을 못 본 체하면서, 사회적 불의를 모른 척하면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어떻게 살아 있는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세상의 권력은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과 교회를 박해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런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지 않았나 생각한다.
박형규 목사님은 ‘그냥 목사’와는 다른 삶을 보여주셨다. 교회 밖 세상을 위하여 ‘사서 고생한’ 성직자였다. 그러기에 박해의 표적이 되어 고난을 겪으셨고, 그런 현장에서 나는 목사님을 만났다. 구치소 접견실에서, 감옥 안에서, 중부경찰서 옆 노상예배에서, 시국기도모임에서, 의연하게 고행의 길을 앞서가는 그분의 올곧은 믿음에 나는 감동했다. 나는 변호사이면서 많은 피고인들로부터 감화를 받았다. 그 첫번째 ‘피고인’이 바로 박형규 목사님이었다. 한승헌(변호사, 前 감사원장)
독재와 특권의 암흑시대 한복판에서 소외된 여성, 노동자, 빈민 그리고 청년학생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준 박형규 목사님. 이 나라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불굴의 삶을 살았음에도 빛나는 도자기가 아닌 투박한 ‘질그릇’을 자처하고, 늘 ‘나는 모자란 평범한 인간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참 신앙인. 이 책은 그 어른의 생생한 육성이며, 암흑의 시대를 헤쳐오신 십자가 고난의 기록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너,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경종입니다. 심상정(진보신당 공동대표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