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가까워지는 손길, 그에 따라 좁혀지는 마음의 거리. 허진호 감독은 배우들의 눈짓 하나, 몸짓 하나에 우리를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멜로 맛집 허진호의 명작 〈호우시절〉.
--- p.4, 「호우시절: 정우성은 몇 살까지 멜로가 가능할까」중에서
살인과도 같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잘못이나 루이처럼 자신의 죽음을 말할 수 있는 그 누가 당신에게 있는가. 피가 섞였든 섞이지 않았든 그가 당신의 진정한 가족이다.
--- p.5, 「단지 세상의 끝: 세계적 명배우들이 자비에 돌란을 만났을 때」중에서
본 적 없는 영화의 시작, 그것만으로도 뇌가 띵한데 도대체 무슨 장면인지, 이 장면의 목적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다. 흔히 주인공들의 대사와 표정으로 그 불안감을 전하는데,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으로 불안감을 공유한다. 마치 영화를 보는 내가 누군가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생활을 침범당하는 느낌이 생생하다.
--- p.6, 「히든: 새로움에 한 방 맞고 싶다면 이 영화!」중에서
영화 속에서 제르망이 클로드에게 아라비안나이트 왕 얘기를 한다. 얘기가 재미없으면 가차 없이 지은이를 죽였다는 왕. 마치 프랑수아 오종은 그런 왕국에 사는 재담꾼처럼 다채로운 색감의 이야기보따리를 우리 앞에 하나씩 펼쳐 보인다. 천재가 들려주는 천일야화다.
--- p.10, 「인 더 하우스: 〈인 더 하우스〉, ‘(다음 편에 계속)’」중에서
유전자에 의해 인간의 사회적 운명이 결정된다는 신선한 공상과 이를 극복해내는 존재를 주인공으로 세운 〈가타카〉. 놀라운 데뷔작을 선보인 앤드류 니콜 감독은 이후 짐 캐리가 주연한 〈트루먼 쇼〉의 각본, 톰 행크스의 〈터미널〉 원안과 기획을 통해 세상 어딘가에 홀로 유배된 사람의 외로움, 그렇게 만든 사회를 비판적으로 그렸다.
--- p.12, 「가타카: 이미 삶은 결정됐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중에서
삶은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지만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역설적으로, 죽음이 있다는 것은 거기에 삶이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지 않은 존재에게 죽음은 없다. ‘죽음이 무엇인가?’에 관한 사유는 ‘삶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가닿는다. 명감독들의 전성기 시절 영화도 좋아하지만, 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의 작품들을 사랑하는 이유다.
--- p.17,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거장의 유작」중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의 눈빛, 그 눈빛의 교감을 잊을 수 없다. 지금 어떤 이유로든, 우리 사회가 금지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에게 묵언으로 전하는 깊은 울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 하나만 좋아도 영원히 사랑스럽다.
--- p.22, 「더 프롬: 금지된 사랑」중에서
김보라 감독은 그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누구를’ 잃어버린 것인지에 주목한다. 그것도 여러 사람, 여러 경우를 통해서가 아니라 은희가 영지 선생님을 잃는다는 것의 어떤 의미인지를 통해 고통을 짐작하게 한다. 감히 비극의 당사자들에게 그 슬픔을 공감한다는 따위의 얕은 선언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뼈가 저리게 아프다. 잊고 있던 어른의 태도, 잊을 수 없고 잊지 말아야 하는 그날.
--- p.26, 「벌새: 또 다른 1월 1일의 선택」중에서
평범한 나, 특별할 것 없는 오늘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게 될 것이고, 영화와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맛볼 것이다.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 영화가 이뤄낼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순간을 〈소울〉이 해냈다. 조 가드너를 연기한 제이미 폭스의 목소리를 듣노라니 그가 불세출의 가수, ‘영혼의 음성’을 지닌 레이 찰스를 연기한 영화 〈레이〉(2004)가 보고 싶어졌다. 한 영화가 또 다른 영화를 부르는 일, 좋은 영화가 부리는 마법이다.
--- p.29, 「소울: 어른이 울고 나오는 애니메이션」중에서
순수는 사라지고 자극이 성행하는 시대, 작은 영화는 살아남기 어렵고 대작 영화에 투자가 몰리는 상황에서 제2의 이정향 감독이 쓴 청순 낭만의 시나리오가 관객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순수 멜로를 보고 자란 덕은 나이 들수록 체감된다. 다행인 건 다양한 OTT에 감성이 맑아지는 멜로들이 숱하게 많다는 것이다. 예쁜 척하지 않고 캐릭터와 작품에 몰두해서 더 아름다운 심은하도 실컷 볼 수 있다.
--- p.31, 「미술관 옆 동물원: 심은하 옆 이성재, 이제 이런 영화는 없다!」중에서
“그녀와 키스했을 때 나는 태어났다. 그녀가 떠났을 때 나는 죽었다. 그녀와 함께한 몇 주 동안 나는 산 것이다”. 딕슨이 시나리오의 어디엔가 넣고 싶어 한 문장이다. 글은 예언의 마력을 부린다. 나와 키스했을 때 그제야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표현, 이보다 낭만적 고백이 있을까.
--- p.35, 「고독한 영혼: 20세기 할리우드 최고 배우의 ‘고독한 영혼’」중에서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1960)는 11년 간격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화녀〉(1971)와 〈화녀′82〉
(1982)가 세상에 나왔고, 1990년대 ‘악녀’라는 제목으로 제작이 예고됐던 영화는 감독의 작고로 볼 수 없었다. 한 명의 감독이 같은 영화를 시대상 변화에 맞춰 스스로 리메이크하는 풍경은 흔치 않다.
--- p.37, 「화녀: 윤여정의 〈화녀〉 그리고 〈충녀〉… 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였던 그때」중에서
직접 확인해보면 더욱 재미있을 이 다층적이고 심층적인 영화의 시나리오를 카스텔라 역의 배우 장 피에르 바크리와 마니 역의 배우 아네스 자우이가 함께 썼고, 아네스 자우이가 연출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연인이고 그보다 오래인 25년간 동료였다. 작가로 시작해 배우까지 영역을 넓힌 장 피에르 바크리는 2021년 1월 18일, 향년 69세로 별세했다. 작가와 감독이 작품 안에 들어와 있는 영화, 영화 속 연극을 숨기고 있는 영화 〈타인의 취향〉이 당신의 취향에 꼭 맞기를!
--- p.41, 「타인의 취향: ‘타인의 취향’이 사랑과 인생을 바꿀까요」중에서
가끔은 흠잡기 힘든 영화를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머리가 맑아지고 감성이 돋고 눈이 좋아진다. 요즘 흔히 보이는 대형 기획 영화들이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왜 돈을 쏟아붓고도 엉성한 결과물로 마무리되는지 헤아려진다.
--- p.45,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송강호·배두나·신하균, 예술장인들의 초심」중에서
아지노 소스케 선생이 카이에게 한 제안, 만화에는 있고 영화에는 없는 ‘슈헤이와 카이의 협연’을 볼 수 없어 아쉽다. “피아노는 혼자 치는 거야!” 어린 카이가 말하듯 인생은 결국 스스로 책임져야 하지만, 삶을 달관한 어른 아지노가 바란 것처럼 인생은 끝없는 협연이다. 지금 누군가와의 협연이 불협화음이라면, 우선 영화 〈피아노의 숲〉을 즐겨보자. 한결 오늘이 수월해질 것이다.
--- p.50, 「피아노의 숲: 익숙한 영화가 새삼 낯설어질 때」중에서
마지막 한 장면으로 잠파노의 못난 행동들은 파도에 쓸려가고 뒤늦은 깨달음에 뼈아픈 후회의 나날을 보내왔을 남자가 보인다. 그 회한의 통곡으로 젤소미나의 순수함은 영원으로 살아온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게 안소니 퀸의 힘이고 명배우의 존재 이유다.
--- p.51, 「길: 잊을 수 없는 그 이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