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모델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과 편견에 대한 항변, 의외로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있는 누드모델들의 역할, 그리고 내 육체를 마주보는 것이 나 자신에게 얼마나 실체적인 안정감과 위안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다. 몸 구석구석을 뚫어져라 집중해서 바라보고, 자각하는 일을 누구나 꼭 한 번은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도 컸다. 이 책은 나와 ‘누드모델 하영은’이 겪은 모든 여정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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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옷과 화장, 표정으로 애써 숨기고 한껏 꾸민 내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실체’가 궁금하다면 나의 벗은 몸을 봐야 한다. 그래서 ‘발가벗는 것’에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다.
민망함과 수치심은 찰나의 감정일 뿐이다. 진짜 어려운 건 꾸밈없이 나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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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누드모델이 됐어요?”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고 본능이며, 그 아름다움을 가장 직접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피사체가 바로 우리 몸이다. 아름다운 것에 매료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듯, 나의 몸을 통해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 또한 욕망의 한 갈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부끄럽고 수줍었지만, 지금은 내가 이 일을 정말 사랑하게 됐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 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냥요. 이 일이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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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의 사진작가 앞에서 알몸으로 우두커니 서있자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하필 ‘한탄’강 앞이었으니, 누드모델 데뷔 장소치고 이렇게 절묘한 이름을 가진 곳이 또 있을까 싶다. 같은 맨몸이라도 밀폐된 공간이 아닌 사방이 탁 트인 야외에 있는 것은 천양지차다. 바람, 햇빛, 공기, 소리, 거기에 더해 수많은 시선들이 필터링 하나 없이 고스란히 내 피부에 와닿았다. 내 몸에 존재하는 모든 감각이 처음으로 깨어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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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순수한 의도로 “고생하셨으니 밥이나 한 끼 하고 가세요”, “차 한잔하세요” 하며 호의를 베풀지만, 자연스러운 시작이 불편하게 끝나는 경우를 너무도 많이 봤다. 그런 일이 한두 번 발생하면 누드모델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이 쌓이고, 이는 악순환이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모든 직업인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를 지켜주는 건 일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태도 그리고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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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모델은 우선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몸과 마음에 깊게 각인된 상처를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얼떨결에 시작한 누드모델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난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토록 부끄러웠던 내 몸이 사진과 그림 속에서는 찬란하게 빛났다.
‘다음 작업도 하려면 다치지 말아야지’, ‘상처나면 안 되니까 조심해야지’ 이렇게 차근차근 몸을 아끼고 소중히 하는 법을 처음부터 익혀갔다.
--- p.124
어느 순간부터 ‘왜 하필 나한테만?’, ‘왜 누드모델한테만 그래?’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됐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더 큰 상처는 일과 상관없이 받았던 것들이었고, 누드모델을 하면서 얻은 마음의 내공이 오히려 그 위기를 버텨내게 했다. ‘괜찮아, 잘될 거야. 나는 떳떳하고 당당해’라며 그즈음 매일 스스로를 다잡았던 말들이 결국 현실이 됐을 때, 나는 한 뼘 더 성장해있었다.
--- p.164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자기 관리와 직업의식을 가지고 이 일에 임해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진짜 제대로 하는 ‘누드모델’이 무엇인지 보여줘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더욱 일에 매진했다.
비록 시작은 사소했을지라도, 지금 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누드모델이라고 자부한다. 이 이야기를 언젠가 한번쯤은 꼭 해보고 싶었다.
--- p.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