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정신분석에서는 어떤 질환의 존재를 의심케 하는 징후가 있다 하더라도, 바로 그 질환에 대한 진단을 내릴 수 없다. 환각에는 ‘주체의 구조라는 점에서는, 어떤 진단학적 가치도 없다’(E71)고 라캉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환각의 존재를 바로 정신병(혹은 통합실조증)이라는 진단으로 연결시킬 수는 없다. 증상이 어떤 구조 안에서 표현되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주체가 드러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내지 않는 한, 라캉파에서는 진단을 내릴 수 없다. 결국 라캉파 정신분석에서, 분석 주체의 이야기 속에서 관찰되어야 하는 것은, 진단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知)가 아니라, 주체와 관계하는 지인 것이다.
『정신과 진단 면접 매뉴얼』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 순서가 정해져 있다. ‘최근 1개월 동안, 하루 중 대부분을 우울하게 느끼거나 침체되어 있었다고 느끼며, 그것이 며칠간 지속된 적이 있습니까?’ ‘언제나 즐거움을 주었던 것들이 더 이상 흥미나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구조화 면접을 추천하는 정신과 의사는 이와 같은 자잘한 질문 항목을 이어가게 되면, ‘이야기가 잘 진행되었다’는 인상을 환자에게 주기 때문에 구조화된 면접은 ‘정확한 진단’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의사-환자 관계’의 구축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이 농담이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고객과의 좋은 관계’라는 접객 행위를 목적으로 신중하게 매뉴얼화된 맥도날드 방식이, 정신분석이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현대 정신의학의 기본적인 태도는 ‘보이는 것만 보려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현대 정신의학은 무의식(의 주체)에 대하여 ‘억압이라는 의미에서도 전혀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라캉이 이러한 ‘억압이라는 의미에서도...’라는 표현을 ‘배제Verwerfung’와 관련시켰듯이, 우리는 현대 정신의학에 대하여 ‘무의식의 배제’라는 진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신경증 환자에게 행하는 자유연상이나 해석 같은 분석 기법도 정신병자를 위기에 빠뜨릴 위험성이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정신병 발병 전의 환자에게 신경증 환자와 동일한 방식으로 자유연상을 요청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발병으로 이끌 위험성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말을 하는 것prendre la parole’, 즉 자신의 언어로 주체 정립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요청에 대응할 수 없을 때 바로 발병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강박신경증 환자에게 발은 이미 발이면서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 것이 되었고, 그 의미의 과잉으로 인해 그는 양말을 신을 수 없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스키조프레니 환자에서는 양말의 망과 여성기 모두 ‘구멍’이라는, 즉 ‘구멍은 구멍이다(그러므로 같은 것이다)’라는 냉소적인 명제만으로 증상이 형성되어 있다. 즉, 강박신경증 환자에게는 사물로서의 형태학적 유사성에 의해 발과 남성 생식기가 동일시되는 반면, 스키조프레니 환자에게는 양말 그물망의 ‘구멍’과 여성 생식기의 ‘구멍’이라는 단어의 동일성만으로 그물망이 여성 생식기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곤혹감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현상으로 주체 앞에 여러 번 나타난다. 그리고 한동안 그는 이 현상을 가공할 수도, 통합할 수도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것은 이 현상의 핵심에 있는 수수께끼 같은 의미작용은 상징화 체계에 한 번도 진입한 적이 없는 의미작용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작용으로 회귀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이 현상을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고,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를 라캉은 정신병적 현상은 ‘변증법적 구성’에 이르지 못한다, 혹은 정신병적 현상에는 ‘변증법의 정지arret dans la dialectique’가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주체가 곤혹이라는 정신병적 현상을 믿게 되어 그것을 수정할 수 없는 것은 그 수정을 가능하게 하는 대립항(변증법의 ‘정’에 대한 ‘반’)이 처음부터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금지와 침범을 둘러싼 라캉의 논의는 조르주 바타유가 『에로티시즘』(1957)에서 전개한 논의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타유는 인간의 에로티시즘의 궁극적인 의미는 ‘융합’이라고 생각했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어의 세계에 진입할 때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형태로 잃어버린 ‘물’과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이 에로티시즘이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과의 융합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은 그 금지를 불안 속에서 침범하여 배덕(背德)적인 쾌감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침범을 한다고 해서 금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침범의 존재가 금지를 완성시킨다고 바타유는 지적한다.
과학은 르네상스 이후 탄생한 ‘모든 것은 이성적이다(모든 사물의 인과관계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라는 신념에 따라 이성적인 것의 외부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인으로서의 중력이 중력 자체의 원인, 그 원인의 원인...... 으로 무한히 후퇴할 수밖에 없듯이, 과학이 상정하는 인과관계의 ‘원인’에는 항상 어떤 균열이 있다(S11, 24). 이러한 균열로서의 원인은 상징화할 수 없는 것으로서 현실계에 위치한다. 그러나 ‘과학은 원인으로서의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E874) 즉 과학은 ‘물’의 존재를 애초에 고려하지 않으며, 설령 ‘물’이 주체를 공격하는 일이 있더라도 ‘물’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태도를 과학의 ‘물의 배제’라고 부른다.
라캉에게 있어서 프로이트의 발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증상이 의미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증상은 의미의 측면만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주체의 최초의 체험에 위치하는 성적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라캉이 말하는 ‘성적 현실’은 ‘아이가 몸 위에서 처음 발견하는 성적 현실’, 즉 자체성애를 말한다. 즉 라캉은, 증상의 해석은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성애의 첫 단계에 있는 자체성애를- 즉, 각 주체마다 고유한 향락의 모드를 ─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새로운 정신분석의 패러다임은 어딘가 자폐증 환자의 모습과 닮지 않았을까?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논의한 것과 같은 정신분석의 종결에 도달한 인물의 모습은 다른 누구와도 닮지 않은 기발한 방법을 가지고, 트라우마적인 라랑그과 잘 지내는 자폐증 환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지는 않을까? 다만 그 경우의 자폐증이란 불안과 당혹이 지배하는 자폐증의 원초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규범적인 타자(규칙이나 법)를 강제로 강요당해 공황에 빠져 있는 자폐증 환자의 모습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다양한 대상이나 지식을 자유롭게 - 그러나 그들 자신의 논리에 따라 - 조합하고, 자신만의 대타자를 발명하고, 그것을 통해 타자와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자폐증 환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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