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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길가의 돌멩이였을 때

내가 길가의 돌멩이였을 때

b판시선-061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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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7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41쪽 | 210g | 124*194*20mm
ISBN13 9791192986067
ISBN10 1192986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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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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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나 상점에 가는 대신
전자상거래로 내가 물건을 살 때
그가 새벽부터 택배 운송을 하다가
자꾸만 놓치는 것은 밥때만이 아니다
아내의 생일을 놓치고
자녀의 졸업식을 놓치고
장모님 생신날 가족 모임을 놓치고
친한 친구 부친상 조문을 놓치고
아내가 신신당부한 정기 건강검진도 놓친다
가득 채운 택배상자들 주소를 확인하며
할당받은 물건들의 배송 시간을 놓칠까 봐
아파트 계단을 뛰어 오르내리다가
오늘 저녁 다시 밥때를 놓치고
허기를 채우려 트럭 운전을 하는 손으로
한 줄 김밥을 욱여넣는다
전염병 날로 창궐하는 어려운 때에
일감이 많아져 대박이 났다고들 말하지만
그는 등이 휜다, 허리가 휜다
아파트를 나와 물 한 모금 마시다가 바라본
스무 시의 초승달도 등이 휘어 있다
---「스무 시의 초승달」중에서

제주도 한라산 어느 중턱에
바람의 집은 숨어 있다
집주인인 고양이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바람만 아는 이 집을
어찌 알고 왔냐는 듯
웅크린 채 갸우뚱한다
고양이가 고용한 중년 여직원이
원두를 갈아 천천히 내려
주문한 커피를 내오는 동안
그대가 주인인가 물으려는데
고양이는 옆 탁자 위에 올라앉아
우리 주인은 바람이라며
입을 열어 크게 하품을 한다
---「바람의 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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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완 시인에게서는 밤에 겨운 이슬이 고인 돌샘에 얼굴을 씻는 아침 냄새가 난다. 때로 북방의 산등성에 혼자 삭풍을 견디는 갈매나무를 닮은 눈빛도 보이고, 그 손을 마주 잡으면 봄꽃을 움트게 할 온기가 닿아오기도 한다. 고적하나 쓸쓸하지 않으며, 맑으나 차갑지 않으니 시들도 그 주인을 닮았다. 시편마다 시인이 매만졌을 시어들이 지나온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허투루 흘러넘치지 않으며, 모자람도 없이 손에 잘 맞는 언어들에 손을 맞춘 느낌이다. 허완 시인은 세계와 하늘 사이에 놓인 언어들이 오가는 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시선은 때로 ‘당골 뒤쪽으로 난 좁은 흙 비탈길’이며, ‘지워지지 않은 마을의 고샅길 에움길’로 향하기도 하는데, 그의 시선은 그 길에서 만나는 외로운 존재들에 대한 애틋한 동행으로 이어진다.
- 이시백 (소설가)
시인은 반쯤 무너진 봉수대에 올라가 꺼져가는 시상에 불을 붙이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 안에 가엾은 나무를 축으로 움직이는 세계가 있고, 바람의 흉터가 새겨진 가로수가 있고, 길가의 돌멩이가 지지하고 있는 축대의 틈바구니가 있다. 우두커니를 보며 우두커니 생의 곡절을 관조하는 허완의 치열한 시선은 어린아이가 엄마의 얼굴을 찾아 울음을 터뜨리듯 시詩 혹은 ‘당신’을 갈구한다. 시여, ‘당신’이여, 돌아갈 집을 상실한 시인의 집이 되어, 본향이 되어 시인을 구원하여라.
- 조현설 (시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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