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진심이야?”
“네! 대신 그냥은 안 돼요. 저도 조건이 있어요!”
생각해보니 코앞에서 반짝거리는 환한 얼굴을 들이대는 이 여자. 비장한 표정의 뽀시래기는 지난 3년간 알고 지내던 순하고 얌전한 어린양이 아니었다. 순간, 아찔한 생각이 정한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이런, 내가 자충수를 두었구나!
--- p.39
“민그린.”
삐이? 뚝.
귓가에 들어차는 굵직한 목소리. 정한이 부르는 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얽히고 헝클어지는 이명을 단숨에 밀어냈다.
“천천히. 숨 쉬어 봐.”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올라갔다. 그린은 고개를 들어 괴로운 눈으로 정한을 찾아냈다.
“그래. 나야.”
--- p.166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한편에 쌓이는 건 조급함이었다. 10년 전에도 그랬지만, 정한은 지금도 그린을 철없는 소리나 하는 꼬맹이로 대하는 것 같았으니까.
“빨리 출근하고 싶다.”
중얼거리던 그린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 p.278
“그렇게 뽀뽀가 좋아?”
“아니, 아니! 뽀뽀가 아니라 오빠가 좋다니까요!”
정한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무얼 해도, 무얼 보고 들어도, 하루 종일 무감했던 심장이 가을밤 귀뚜라미처럼 지속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혹 나도 모르는 부정맥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이 젊은 나이에 심방세동, 뭐 이런 심각한 질환이 찾아온 건 아닐까. 잔물결이 멀리서 반짝거리다 커다란 파도로 변해 덮치듯. 정한의 가슴속은 환희의 물결로 온통 덮여 버렸다.
--- p.326
“힘들면 하지 마. 좋은 사람 그딴 거 하지 마.”
뚝뚝한 표정만큼이나 무심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내가 할게. 내가 민그린한테 평생 좋은 사람 해 줄 테니까 앞으로도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 --- p.376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이. 서로에 대한 마음도 확인한 사이.
나만 이렇게 애가 타고. 나만 이렇게 몸이 다는 거냐고. 그렇지만 할 수 없었다.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했으니까. 김정한이 훨씬 더 많이 좋아하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
니 영원히 질 수밖에.
--- p.412
“아무것도 안 한다니까 아주 신났지. 그냥?”
자극적인 으르렁 소리에 달달 떨리는 입술이 톡 반만 벌어졌다. 간신히 쥐어짠 공기가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잘못했어요.”
“뭐가.”
“못 먹는 감 찔러나 본…… 아니! 잠깐 미쳤었나 봐요.”
--- p.437
완벽하고 빈틈없이 흘러가던 인생이라고 자신했는데, 갑자기 톡 끼어든 뽀시래기 하나가 멀쩡하게 제 길 잘 가던 삶 하나를 파괴할 정도의 영향력을 미칠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는데. 어느새 민그린이라는 파도는 거대한 해일처럼 김정한을 온통 적시고 삼켜버리고 말았다.
순간, 통증처럼 밀려드는 감정에 정한은 눈을 감아버렸다.
……사랑이었다.
--- p.467
2권
“오빠 추워요? 손이 너무 차요.”
걱정스럽게 묻는 다정한 목소리가 위로처럼 귓가에 녹아들었다. 정한은 부드럽고 따스한 몸을 껴안고 익숙한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마치 그린이 산소 호흡기라도 되는 것처럼. 그제야 미친 듯 뛰던 심장이 제 박동을 찾기 시작했다.
--- p.56
“얼마나 여유가 넘치면 딴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나른해진 목소리가 보드라운 입술을 촉촉하게 베어 물었다.
“기껏 참은 보람도 없게.”
질척하게 입술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산뜻한 녹차 향기가 겹쳐질수록 진해졌다. 그제야 그린은 제가 아쉬웠던 게 아니라 정한이 참은 거라는 걸 깨달았다.
--- p.64
“꽃이 너무 예쁘게 폈다. 너무 좋아요.”
원래도 말수가 없지만 정한의 입에선 더 이상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양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채, 정한도 애틋한 눈빛으로 그린을 바라보았다.
내 마음에도 네가 너무 예쁘게 피어 있다. 꽃처럼 예쁘게. 아니, 꽃보다 예쁘게.
--- p.69
“상당히 각별한 사이, 맞습니다.”
이어서 정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감히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참고로, 여자 친구 아니고 와이프.”
순간, 회의장 안이 단체 패닉에 빠져버렸다.
--- pp.181~182
나는 이제 네가 없으면 안 되는데. 너는 이제 살아가는 이유를 넘어 내 목숨이 되어버렸는데. 갑자기 그린이 훌쩍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단순히 막막하고 두렵기만 한 게 아니었다. 앞으로 그린이 없는 하루하루를 생각하니 그 짧은 순간에도 제 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는 절망감이 느껴졌다.
--- p.200
만지기는커녕 보기도 아깝다는 듯 오목조목 예쁜 눈, 코, 입, 품 아래 펼쳐진 머리칼 하나하나를 쓸어내리듯 바라보던 순간, 커다란 눈으로 올려다보던 그린이 가느다란 손목을 뻗었다. 천천히 따라가던 작은 손이 정한의 뺨 위로 포근하게 안착했다.
“오빠랑 결혼한 거,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확신에 찬 목소리에 정한의 동공이 커다랗게 열렸다.
--- p.212
어떻게 너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기다렸다는 듯 해주는 걸까. 그 작은 몸에서, 그 작은 얼굴로, 그 작은 입술을 움직여어떻게 그렇게 강인하게 나를 붙잡아주는 걸까. 멎을 듯한 표
정으로 절절하게 내려다보던 정한의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사랑해.”
--- p.212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왜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진심 어린 사과의 말.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꼭 전해야 하는지. 그게 얼마나 큰 울림을,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주는지.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서로를 치유해 주는 일이었다. 남은 나날들을 살아가기 위해 소중한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었다.
--- p.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