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과 군 수뇌부의 허세와 허풍은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양치기 소년의 말처럼 곧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6월 26일 새벽 이승만은 도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전쟁 발발 사실을 알리고 맥아더와 통화를 요청했다. […]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결국 누구의 책임이오? 당신네가 좀 더 관심과 성의를 보였더라면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거요.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았소? 어서 한국을 구해주시오.”
--- pp.31~32
이 모두가 세상의 풍상을 모르고 자랐던 윤보선 후보의 아집이 빚어낸 결과일 것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바닥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그의 한계였다. […] 1961년 5·16 쿠데타가 날 무렵 나는 고교 1학년이었다. 5·16 이후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다닐 수 없어 휴학한 채 경향신문을 배달했는데 종로구 가회동과 삼청동, 화동 일부가 내 구역이었다. […] 안국동에 윤보선 대통령 자택이 있었다. 무려 250간의 대저택이었다.
--- p.58
장면 정권은 출범 즉시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우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했다. 문제는 재원이었다. 장면 정권은 10만 감군안을 기획했다. 하지만 군부와 미국의 반발을 불러와 유야무야됐다. 또 하나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통한 대일 청구권자금의 확보 방안이었다. 장면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청사진을 마련한 뒤 우선 국토건설단부터 출범시켰다. 이처럼 그 계획들이 하나하나 궤도 위에 오를 즈음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 p.82
“이처럼 당해야만 합니까?”
장면은 부드럽게 한마디 했다.
“이 사람아, 피를 흘리면서까지 정권을 유지하면 뭘 하겠나?”
장면 총리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유약한 인물이었다. 이른바 ‘신사’ 정치인의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한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라면 목숨 바쳐 헌정 질서를 수호하고, 때로는 강철 같은 강단으로 국민을 보호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 pp.84~85
지난 세기 숱한 조선 청년들이 서로 다른 복장으로 광막한 만주벌판을 누비면서 자기 나름의 꿈을 키웠다. 낙동강 옆 구미 임은동에서 자란 한 소년(허형식)은 괴나리봇짐을 지고 만주로 망명도생하여, 항일빨치산으로 백마를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면서 조국 광복을 꿈꾸었다. 임은동 건너 마을 금오산 산비탈 상모동에서 태어난 한 청년(박정희)은 긴 칼을 차고 이 만주벌판을 누비며 천하를 호령하려는 청운의 꿈을 키웠다. 또 평양 만경대에서 태어난 한 소년(김일성)도 만주벌판에서 대망을 꿈꾸었다. 어디 그들뿐이었으랴. 지난 세기 이 만주벌판을 누비던 모든 조선 청년들의 꿈이 하나로 모아졌더라면 조국 분단의 비극은 결코 오늘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p.107
박 대통령 시해사건을 수사 중이던 전두환 합수부장은 정승화 계엄 사령관을 미리 체포한 뒤, 최 대통령에게 그의 체포를 재가해달라고 요구했다. 박 대통령이 시해되던 그 순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현장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이유였다. […] “각하께서 재가해주시는 것만이 이 사태를 수습하는 길입니다.” 최 대통령은 그 말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아홉 시간 남짓 만에 재가해버렸다. 그때 그 재가의 결과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한 증언은 후일 끝내 거부했다. 시민들은 그런 영문도 모른 채 ‘서울의 봄’이라고 하면서, 새로운 민주정부 탄생에 잔뜩 기대를 모았다.
--- p.158
“각하가 합천 사람은 맞지만 고향을 위해 해놓은 건 아무것도 없심더. 이후락이 같은 빤질이는 대통령비서실장 노릇을 해도 지 고향에 공장을 수십 개도 더 만들어놓았다 아입니까? 대통령 박정희는 말할 것도 없고예. […] 우리 합천 사람들은 마이 섭섭해합니다. 영샘이도 거제에다 조선소를 몇 개나 들여놓았는데…… 이 합천 골째기도 삼성전자나 현대차 같은 공장 한두 개 유치했으면 여 땅값 많이 올랐을 긴데.” […] 택시기사는 혼잣말처럼 뱉었다. 그게 세상인심이다. 그래서 ‘염량세태’, ‘오동지 설한풍’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아마도 전두환 내외는 그런 세상인심 변화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 pp.167~168
나는 초등학교 시절 부산 ‘용두산공원’에 간 적이 있다. 당시 공원의 명칭은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를 딴 ‘우남공원’이었다. 4·19가 지난 몇 해 후 다시 그곳에 가자 그새 ‘용두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서울시민회관도 건립 시작 당시 이름은 ‘우남회관’이었다. 4·19 이후에 ‘서울시민회관’으로 명명되다가 ‘세종문화회관’이 됐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이나 아호는 함부로 붙이는 게 아니다. 사후 일백 년은 지나거나 바른 역사 평가가 내려진 다음에 붙이는 게 좋다. 나는 근현대사 역사답사 길에서 정부나 정권이 무너진 뒤 무참히 부서진 공덕비들을 숱하게 봤다.
--- p.186
시간 맞춰 행사장인 서울시민회관 소강당으로 가자 전국에서 온 각계각층의 보통사람 100인들이 모여 있었다. […] “노태우입니다.” TV에서 보던 말투 그대로 의례적이고 익숙한 인사였다. 그날 노태우 대통령은 참석자 보통사람 100인과 악수를 나눈 뒤 다른 일정 때문이라면서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취임 100일 기념 ‘보통사람 100인과의 대화’는 별다른 대화도 없이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단지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사로 카메라 기자들의 플래시만 터진 채. 그날 참석자들은 모두가 ‘닭 쫓던 개’처럼 곧장 씁쓸한 표정으로 시민회관 소강당을 벗어났다.
--- p.196
1993년 2월 27일 첫 국무회의에서 김영삼은 솔선수범으로 재산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뒤를 이어 국무총리, 부총리, 감사원장 등 주요공직자 9만여 명의 재산등록을 의무화시켰다. […] 1993년 3월 4일, 김영삼은 과거 군사독재 정치의 대표적 상징물인 청와대 주변의 안가 철거 지시를 내렸다. […]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 초기 이러한 개혁 조치들로 국민들의 지지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무려 80퍼센트가 넘는 지지도를 보였다. […] 하지만 임기 말엔 시민들이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IMF 사태’를 맞았다. 그의 지지도는 한 자릿수인 9퍼센트로 추락했다. 그때 김영삼의 심정은 마치 높이 날던 갈매기가 땅바닥에 떨어진 기분, 혹은 열대지방에서 지내다가 극지방의 한파를 맞은 기분이었을 테다.
--- pp.230~231
1967년 6월 8일은 제7대 국회의원 선거일이었다. 김대중은 목포에서 재선을 노렸다. 그런데 불길한 소문이 돌았다. 정부 여당이 김대중을 낙선시키려 하는데, 그 맨 앞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와 내무부 간부를 청와대로 불러 지시했다고 한다.
“이번 선거에서 김대중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낙선시켜야 한다. 여당 후보 열 명이나 스무 명은 떨어져도 상관없다. 김대중만은 절대 당선시켜서는 안 된다.”
목포는 선거전에 돌입하기 전부터 가장 뜨거운 시선을 받았다. […] 김대중은 흡사 전쟁과 같은 선거를 치렀다. 개표 결과 김대중 후보가 6천여 표 차로 당선됐다. 관권에 대한 민권의 승리였다. 김대중은 목포 시민들에게 당선 인사를 했다.
“여러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앞으로 대통령에 도전하겠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세계의 김대중이 되겠습니다.”
--- pp.262~263
1980년 8월 14일 오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첫 번째 계엄 군법회의가 열렸다. 이 사건에 연루된 24명은 그날에야 비로소 한자리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9월 11일, ‘내란음모’ 혐의로 수감된 24명에 대해서 검찰 측의 구형이 있었다. 김대중에게는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죄로 사형이 구형됐다. 김대중은 최후 진술을 했다.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는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내 마지막 유언입니다.”
--- p.277
노무현은 종로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 나라 고질병의 하나인 지역주의를 극복하고자 말이 아닌 행동으로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그는 자기희생과 헌신을 통해 국가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로 다시 부산으로 갔다. 하지만 2000년 4월 13일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게 패했다.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1만 3천여 표 차이로 낙선했다. 그날 그는 쓰라린 마음을 다독이며 잠들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상상도 못 할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노무현의 홈페이지에 찾아와 밤새 울분에 찬 글을 소나기처럼 쏟아놓은 것이었다. […] ‘바보 노무현’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은 모임을 만들었다. 2000년 6월 6일, 대전대학교 앞 조그만 PC방에 60여 명이 모였다.
--- p.305
2005년 6월 1일, 서울시장 이명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통수문을 여세요.”
그 말이 떨어지자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 청계광장 배수로에는 막혔던 물이 콸콸 쏟아졌다. 맑은 시냇물이 서울 한복판을 가로질러 흘렀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이와 함께 대중교통 개편사업을 시행해 버스 중앙차로제, 교통카드 제도를 도입해 시민들의 대중교통 이용에 획기적인 편의와 성과를 이뤄냈다. 이로써 대중지지도도 치솟아 마침내 제17대 대통령에까지 당선됐다.
--- p.323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6일 뒤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로 참석했다. 그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로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지냈고, 전국의 학교를 돌면서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 30분쯤 잠결에 긴 전화벨이 울렸다. 단잠에서 깨어나 수화기를 받자 가라앉은 비서관의 음성이 들렸다. “어서 일어나 몸단장을 해주십시오.”
그 순간 박근혜는 서늘한 기운과 함께 5년 전의 악몽이 스쳤다.
--- pp.335~336
문 대통령은 재임 중 역대 다른 어느 정부보다 남북정상 간 만남을 자주 가져 판문점, 평양, 백두산 등지에서 이 나라 백성들에게 좋은 그림을 많이 보여줬다. 그러나 퇴임 전까지, 최소한 끊어진 금강산 길이나 개성공단 재가동, 또는 한반도 종전평화선언 가운데 한두 가지는 치적으로 남겼어야 했다. […] 백범이나 몽양을 보라! 그들은 분단을 막고자 분골쇄신하다가 비명에 가셨다. 그랬기에 후세가 그들을 흠모하는 것이다. 한두 번은 트럼프의 바짓가랑이라도 꽉 부여잡고서 그런 문제들의 물꼬를 텄어야 옳았다.
--- pp.353~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