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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촌6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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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7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15쪽 | 128*188*20mm
ISBN13 9791160871128
ISBN10 1160871124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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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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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가 간이 덜된 아이라고 했다. 심심하다 못해 맹맹해서 사람 구실을 못 할까 봐 조바심을 냈다. 맞춤하게 짠맛이 나야 제 것을 챙길 줄 아는데 나는 뭐든 줄줄 흘리고 다녔다. 감정마저 소금기가 빠져 울음보를 터트리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모두를 소금에 비유했다. 손끝이 야무진 친척 언니네 집을 다녀오면 매번 “아이고, 살림이 어찌나 짭질밧던지!” 감탄을 연발했다. 예쁘고 똑똑한 내 친구들을 만나면 간이 쫀득하다고 부러워했다. 웃음을 실실 흘리고 다니는 언덕 위에 사는 노총각을 밍밍한 싱건지 같다고 마땅치 않게 여겼다. 제한식을 하는 동안 나도 김칫국물 속에서 푹 익은 무처럼 힘을 잃고 말았다.
--- p.29

글쎄 골목길을 돌다가 모퉁이에 부딪쳤어. 얼마나 아픈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참느라 온몸을 뒤틀었지 뭐야. 무릎이 움푹 패 피가 나고 어깨도 아려서 주저앉아 울고 말았단다. 지나친 내 참을성에 대해 지독하다며 네가 자주 눈을 흘겼잖아. 그런데 이번엔 아니야. 산고만큼 참기 힘들었다니까. 하마터면 얼굴까지 다칠 뻔했어. 이 나이에 험하게 다치면 그건 치명적이잖아. 그래서 왈칵 무섬증이 들더라. 어린 날, 앞도 안 보고 달리다 건물 모퉁이에 부딪혀 얼굴에 상처가 났었거든. 아직도 희미하게 자국이 남아 있단 말이야. 그 쓰린 기억이 떠올라 종일 우울했어. 빨간약인 머큐로크롬 대신 연고를 덕지덕지 바르고 그래도 모른다며 옆지기에게 등 떠밀려 병원 가서 주사도 맞았단다.
--- p.38

넘실대는 붉덩물이 흐르고 아버지는 나를 안고 다리 위에서 무심히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편도선이 심하게 부어 전날 나는 입원을 했었다. 밤새 고열로 보채다 아침이 되자 열이 조금 떨어졌고 아버지는 나를 안고 병원 근처 강으로 갔다. 새벽까지 내린 비로 강물은 엄청 불어나 물살이 거셌다. 잠도 못 자고 찡얼대던 내가 순하게 강물을 보더라고 아버지는 자주 그 말을 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게 빼고 강물을 내려다보던 장면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다른 기억들은 다 지워지고 없는데 그날 아침은 너무 또렷해 하나하나 그려 낼 수도 있다. 특히 젊은 아버지의 표정은 더욱 그랬다.
--- p.48

아뇨. 이 이야긴 꼭 해 줘야겠네요. 열한 살이었어요. 새 원피스를 처음 입은 날이기도 했답니다. 평소 내 옷은 어른들의 헌 옷을 리폼하거나 양장점에서 얻어 온 자투리 천을 잇대어 만든 것이 전부였거든요. 따스한 봄날, 어머니는 무슨 마음이었는지 꽃무늬 옷감을 끊어 와서 원피스를 뚝딱 만들어 주었답니다. 새 옷을 입고 나비가 되어 골목길에서 훨훨 날고 있는데 커다란 개가 나타났지 뭐예요. 피할 사이도 없었어요. 그 개가 잽싸게 원피스 자락을 물고 늘어졌으니까요. 달아나려고 안간힘을 쓰다 돌부리에 걸려 무릎이랑 팔이 까져 피가 났지요. 마침 퇴근을 하던 아버지가 그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답니다. 그날 이후, 한동안 나풀거리는 치마는 입지 않았고 어머니 꽁무니만 따라다녔답니다. 당신의 개를 보니 어린 날의 공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 숨이 가빠오네요. 이 여름에 한기가 들고 속이 떨려 헉헉 숨이 차오릅니다.
--- p.69

많은 것을 포기한 N포 세대, 그들에겐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 쉬지 않고 뛰어 보지만, 모든 상황이 불리하다. 톱니바퀴가 제대로 맞물리지 않아 헛돌기만 한다. 그 바람에 화가 끓어올라 아침부터 공원으로 나온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불 속에서 끙끙대지 않은 것이. 지하 게임방에서 시간을 죽이지 않은 것도. 어둡고 습한 골목을 서성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동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햇빛 내리는 공원이니까. 흔들리는 바구니그네에 몸을 맡긴 채 허물을 벗고 성충이 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 p.92

점촌6길은 옛 동네의 모습이 얼마쯤 남아 있다. 도시 속 시골이다. 살짝 굽이진 골목을 들어가면 낡은 기와집이 나온다. 담도 울도 없는 집 앞에 넓은 텃밭이 있다. 저녁 무렵, 흙담을 두른 통나무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따뜻하다. 홀로 사는 할머니가 쉬었다 가라고 의자를 권한다. 마을 앞에는 ‘점촌’이란 표지석이 우람하다. 자연부락을 이루며 살았던 흔적이다. 그 뒤로 새마을기가 펄럭이는 점촌노인정이 옹골진 세월을 품고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러니 점촌6길, 당호로는 최고가 아닌가.
--- p.96

토란은 껍질을 까는 일부터 만만하지 않다. 잘못하여 피부에 닿으면 가렵고 부풀기도 한다. 가느다란 팔에 의지해 큰 칼로 무를 삐지고 소고기의 등심 부분을 결대로 찢었을 것이다. 버섯이며 파도 다듬고 들깨를 곱게 갈아 면포로 맑은 물을 짜내느라 온 힘을 다하는 모습이 자꾸 어른거린다. 제 덩치만 한 솥에 넘치도록 국을 끓이느라 40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사시랑이 같은 몸으로 종일 불 앞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환장하게 맛이 난다. 어머니가 끓여준 국에 비길 바가 아니다. 큰딸이 되어 어머니를 닮지 않은 나의 누추함을 반성하느라 숟가락을 들어 올리는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반성 지수가 쑥쑥 올라 500을 넘기고 있다.
--- p.102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바로 애호박전이었다. 지금이야 채소나 과일이 철도 없이 나지만 예전에는 애호박전을 먹으려면 유월은 지나야 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유월 유두 무렵에야 제맛이 난다. 어린 호박이 나올 때쯤 나는 매일 시장으로 나가봐야 했다. 그러다 진초록 호박잎으로 살포시 감싼 어른 주먹만 한 호박이 선을 보인 날, 아버지의 얼굴은 하회탈처럼 변하셨다. 좀체 감정을 드러낼 줄 모르는 아버지는 눈가에 주름을 모아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햇것이라 가격이 만만치 않아 한 개만 달랑 사 왔다. 나뿐만 아니라 동생들도 호박요리는 먹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향해 살짝 눈을 흘기곤 했다.
--- p.111

가을에 수확하여 땅속에 묻어두고 겨우내 꺼내 먹는 무는 다양하게 변주되어 입맛을 돋웁니다. 특히 생선조림에 빠질 수 없지요. 냄비 바닥에서 제대로 양념을 품은 무는 생선보다 훨씬 구미가 당깁니다. 푹 물러야 젓가락이 자주 갑니다.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먹는 토란국에는 섬벅섬벅 썰어 넣은 무에 들깨향이 깃들어야 고소함을 느낄 수 있지요. 가을볕에 잘 말린 무말랭이는 도시락 반찬으론 그만입니다. 고춧잎이 들어간 촉촉한 무말랭이무침은 친구들에게도 인기였지요. 혹시 무밥을 아시나요. 뜨끈한 무밥을 양념장에 비벼 생선 한 토막 올려 먹으면 그거야말로 건강한 밥상이지요.
--- p.117

망성리(望星里)를 아세요? 이름 그대로 별을 바라보는 동네입니다. 북쪽으로 낮은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남으로는 멀리 우뚝한 봉우리의 문수산이 보이는 아늑한 곳이지요. 굽이굽이 흐르는 태화강 중류를 끼고 있는 오래된 마을이라 무수한 설화가 탄생된 곳이기도 합니다. 한때, 이곳 감나무골에 터를 잡을까 하여 기웃대기도 했습니다. 하늘의 별을 공짜로 보는 것은 아무에게나 허락이 되지 않더군요. 일의 상황이 이리저리 얽혀 단념 아닌 단념을 했습니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가까운 아파트 동네로 이사를 왔습니다. 집을 나서면 별이 아니라 망성리 그 동네가 잘 보인답니다.
--- p.131

박물관과 달리 바깥세상은 사람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마구 내달리고 있습니다. 무한궤도를 달리는 과학 문명으로 인해 ‘재앙’이 올 것이라고 설왕설래가 한창입니다. 아슬아슬한 곡예를 보는 듯하여 괜히 나까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답니다. 사실 이런 재앙을 막아 주는 것이 바로 도깨비의 역할이 아닐까요. 크고 튼튼한 뿔에서 나오는 힘과 쑥 들린 들창코의 위력으로 말입니다. 자로 잰 듯 가르고 자르며 사는 숨 막힌 세상에 그의 해학적인 모습은 뻣뻣하게 굳은 내 얼굴과 몸을 부드럽게 이완시켜 줍니다. 마음이 느슨해져 그의 들창코를 만져봅니다. 희룽희룽 버릇없이 굴다가 도깨비방망이가 ‘퍽’ 어깨를 내려칠지도 몰라 화들짝 물러섭니다.
--- p.150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는 일은 허망하다. 백발의 노파가 된 자야 앞에 나타난 옛사랑은 젊은 날의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 남자는 왜 그렇게 젊고 뜨거운지 말이다. 객석은 숙연하다 못해 웅숭깊은 심해처럼 고요하다. “후회 없습니다. 돈 천억이 그의 시 한 줄만 못하니까요.” 그렇다면 흰 슈트를 입은 저 남자의 시는 천억이 아니라 천억의 수십 배가 될 테니까. 나타샤에게 거꾸로 가는 시계를 선물하고 싶다. 무대 위엔 고작 세 명의 배우만 등장한다. 무대장치도 거의 없다. 별다른 소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피아노 반주뿐이다. 나타샤와 백구두의 셰프는 애절한 눈빛과 몸짓으로 노래하고 화답한다.
--- p.177

동물들에게 꼬리는 존재의 증명입니다. 꼬리가 긴 놈, 짧은 놈, 두툼한 놈에다 얄따란 꼬리를 가진 놈도 있습니다. 게다가 동그랗게 말고 다니거나 슬쩍 숨기기도 합니다. 동물에게 꼬리가 없다면 볼썽사납겠지요. 두 발로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들에겐 거추장스러울 뿐인데 왜 꼬리에 연연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붙어 있지도 않은 꼬리 때문에 시시비비를 만들고 온갖 말들이 오가는 게 우습기조차 합니다. 욕심이라는 것이 무한대인 사람들에겐 꼬리뼈만 남은 것에 대한 진한 아쉬움일 수도 있겠네요.
--- p.198

저울 눈금이 적정선을 지났는데도 아저씨는 계속 토마토를 올렸다. 나는 그만해도 된다고 손사래까지 치며 말렸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럼 필요 없는 저울은 왜 사용하느냐고 의아한 얼굴을 하자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 장만한 거라 그냥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전자저울이 일원 단위까지 계산해 주는 시대에 앉은뱅이저울을 쓰는 것은 그만의 장사 방식이었다. 옆구리의 초록색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저울은 예순을 훌쩍 넘긴 늙수그레한 아저씨의 신념을 말해 주고 있었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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