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후로 수년간 그녀를 따라다녔던 별명은 이거였다. ‘ 뱀파이어 워너비.’ 마치 스스로 원해서 이런 생활 방식을 선택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아무리 제약이 있을지언정 심장이 뛰는 정상적인 사내 녀석이라면 어떻게 줄리엣 같은 아이를 차버릴 수가 있었을까? 헨리는 매일 아침마다 집으로 돌아가 관 속에서 잠을 자야 하는 여자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고 말했다. p.14-15
“난 그냥 네가 피임약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랬어.” 엄마가 말했다. “ 이런 물건은 딸이 옷장 깊숙이 숨겨놓은 걸 엄마가 우연히 발견하는 게 정상 아니야? 그러고는 어린 줄만 알았던 내 딸이 벌써 이렇게 컸구나 하면서 눈물 흘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엄마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상투적이네.” 나는 지금도 엄마가 그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정말 피임약을 복용하길 바랐던 건지 아닌지. 어쨌든 나는 그 약을 속옷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늘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지구상에서 피임약을 먹을 일이 생길 최후의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p.20-21
줄리엣은 언제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겠노라고 말했다. 우리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날 때처럼 어두운 거실 한편에 놓인 침대에 누운 채, 또는 멸균 처리된 병실에서 정맥 주사 바늘을 꽂은 채, 또는 머리맡에 짤막한 메모를 남기고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은 채 발견되고 싶지는 않다고. 그러나 이건 죽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 그 자체였다. 지붕에서 몸을 날린 순간, 줄리엣은 소용돌이치는 별자리가 되었다. --- p.24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XP를 가지고 있다고 의심된 경우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아빠는 유전학자다. 그에게는 XP를 앓는 사촌이 있었다. XP는 의학 용어로는 색소성 건피증, 햇빛에 치명적인 알레르기를 뜻한다. 그래서 부모님은 태아 검사를 했고 그 결과는, 야호! 정상이었다. 이윽고 아기가 태어났는데, 근데 이게 웬 날벼락, 나는 XP를 가지고 있었다. 검사 결과가 언제나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 아빠는 우리를 떠났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많은 아빠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는 네 살 이후로 아빠를 본 적이 없다. 나에게 아빠란 근사한 손 글씨로 쓴 몇 통의 편지들로, 그의 죄책감을 반영하는 두툼한 돈뭉치로 존재했다. --- p.30
그날 밤 줄리엣으로 인해 우리는 무언의 믿음 속에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바로 우리가 주간형 인간들을 능가했다는 믿음이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똑똑하고 유머 감각도 뛰어나다는 믿음. 지난번 줄리엣이 내 눈앞에서 별자리를 어지럽게 그리며 기치 피자점 위를 빙글 돌았을 때 나는 어느 때보다도 그 믿음이 진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소화전만한 머리를 달고 다니는 운동광들조차도 파쿠르를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파쿠르는 어려웠다. 아니, 어려운 것 이상이었다. 그걸 하려면 유연하고 강인한 신체와 창의적이고 용감한 정신이 있어야 했다. --- p.58-59
여드레째 되는 날, 나는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줄리엣과 로브는 왜 내 전화나 문자에 답하지 않는 걸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이해하는 두 사람 없이 이 여름을, 아니 어쩌면 내 남은 평생을 보내야 하는 걸까? 그날 밤, 나는 심지어 잠을 청해보려고 했다. 한낮의 아이언 하버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들을 자장가 삼아 잠들다가 갑자기 밤에 자려니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줄리엣과 로브도 그들 나름대로 내가 겪는 이런 상태를 겪고 있으며 둘 다 나를 그리워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날 밤 본 것에 대해 말하기 두려워 침묵하는 것이라는 믿음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날 아침, 이제는 우는 것이 마치 내 일처럼 느껴졌다. --- p.77
그가 말했다. “너한테서 마시멜로 맛이 나.” “방금 전에 아이스크림을 먹었거든.” “우리 벽 타러 가지 않을래? 나 밧줄이랑 장비도 가져왔어. 내 생각에 어쩌면 우리…….” “아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럼 네가 하고 싶은 게 뭔데?”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로브가 말했다. “난 살아 있다는 걸 느끼고 싶어.” 내가 말했다. 줄리엣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누구나 죽어. 하지만 누구나 다 진정한 삶을 사는 건 아니야. 나는 엄마의 침실을 흘끗 돌아보았다. 창문 안이 어두웠다. “지금, 여기서.” 로브가 망설였다. “앨리, 그럼 우리……?” “나는,” 나는 그가 못 다한 말을 대신 끝맺었다. “너와 함께야. 평생토록. 언제까지나.” --- p.241-242
나는 기억력이 남아 있는 한 오늘을 두고두고 추억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사랑을 나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안녕을 진심으로 바라고, 그에게 내가 가진 제일 좋은 것들과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들을 주고 싶은, 가장 순수한 마음에서 솟아나는 감정이었다. 나는 오로지 부드럽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p.286-287
퍼즐 조각들이 들어맞기 시작했다. 모두가 꼭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줄리엣은 테이버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애원을 했다. 그다음엔 매수하려고도 했다. 마침내 그는 협박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날 밤 다리 위에서 줄리엣이 했던 마지막 말들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줄리엣은 개럿에게 그가 가장 원하는 것, 그녀 자신을 내어준 것이었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대가로. 그리고 줄리엣이 지키려던 건 바로 나였다. --- p.360-361
어쩌면 줄리엣은 나를 위해서 그녀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나는 그 대가로 나의 단짝 친구, 나의 심장인 줄리엣에게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과연 나는 그녀를 위해 복수할 수 있을까? 설령 내가 그저 뒤에 숨어서 그럭저럭 괜찮은 체하며 살아가고 싶다 한들, 이미 진정한 삶을 살지 않고 죽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 불빛이 희롱하듯 활 모양을 그리며 휙 지나갔다. 테이버가 전쟁을 원하는 거라면, 그래, 좋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