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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엄마에게 한숨을 선물했을까

문학의전당 시인선-362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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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7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25*204*20mm
ISBN13 9791158965983
ISBN10 1158965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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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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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침 뱉고
누워서 침을 뱉어 보고
누워서 자기 얼굴에 침을 뱉고
침을 뱉으니 얼굴에 침이 떨어지고
누워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앞으로 뒤로
침 뱉는 짓을 자꾸만 하고
자꾸만 누워서 침을 뱉는 자는
자기 침은 맑은 수정 같은 물이고
더러운 침이 절대 아니고 이렇게 맑은 침은 널리
인류를 위해 공중으로 전파되는 것이라 하고
콧등에서부터 침이 딱지처럼 쌓이고
코끼리 등껍질보다 두꺼운 둑이 생기고
입술은 누런 거품을 물고
코는 피노키오보다 긴 코가 되었고
누워서 뱉는 침은 얼굴로 떨어지지 않고
내 침을 받아내는 개미부대가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고 믿느니라
---「누워서 침 뱉기」중에서

돌담 사이로 애기똥풀이 노란 웃음을 쏟아내고
간장 된장 고추장 항아리 뚜껑을 열고
햇빛을 담뿍 받아내던 어느 날
암탉의 비밀 둥지가 털렸다
주인 몰래 풀숲에서 품고 있던 알들
동네 꼬마 녀석들의 숨바꼭질에
달걀 열 개는 뽀빠이 과자와 맞바꾸어졌다
뒤뚱뒤뚱 따르는 노랑이들의 엄마가 되고픈
암탉의 울음소리는
개구쟁이들의 입안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병아리가 되지 못한 알들은
어떤 집 장손의 밥그릇 속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맨드라미 봉숭아가 두서없이 피어나고
난쟁이 채송화가 장독대를 둘레 치는 사이
어린 오이 가지는 우리들의 싱그러운 간식이 되곤 했다
바람은 개구쟁이 발소리에 어린 가지를
보라색 이파리 뒤로 숨기고
초가지붕 깊숙이 눌러앉은 여왕벌을 향하여
일벌들은 부지런히 꿀을 물어 나른다
여왕벌을 향한 벌들의 짝사랑은
처마 끝에서 한여름 뙤약볕을 달군다
사랑은 멀고 노역은 길다
---「뒤란 풍경」중에서

현관에서 만난 신발들
밖에서 무얼 하고 왔을까
뒷굽이 비스듬하게 낡은 아빠 구두
엄마의 빨간 뾰족구두
아들 딸 운동화
돌아온 가족들의 분신
가족들을 집으로 인도한 충견 같은 신발들
무사히 돌아온 신발들끼리
하루의 행방을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첫아이를 가진 후 예쁜 신발부터 샀다
앙증맞고 예쁜 신발을 마주하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생각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바둑이와 같이 뒹구는 토방 위의 신발들
이부자리 하나로 싸우던 오 남매
윗목에서 못 본 척 구멍 난 양말을 깁던 엄마
시린 달빛 아래 초가지붕의 하얀 박꽃이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신발」중에서

툇마루의 멍멍이 킁킁킁 콧구멍만 벌름벌름
고샅을 망보는 밤
창호지를 타고 내려온 달빛이
윗목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이는 어머니를
측은한 듯 내려다보고 있다
들녘에서는
낮에 있었던 논의 물꼬 싸움은 다 잊은 듯
개구리 울음소리 요란하고
뒷산의 아카시아 꽃향기는
어린아이의 마음속을 파고든다
외양간의 게으른 황소야
커다란 눈만 멀뚱멀뚱 모르는 척하지 마라
찰방대는 논에서의 어른들의 물꼬 싸움
푸르름이 넘실대는 들판에서
너도 보지 않았느냐
허풍쟁이 개구리, 배불뚝이 맹꽁이야
밥풀때기 닮은 꽃향기야
울 엄마 울리지 말아라
호롱불이 아른아른
넘어가는 책장엔 방울방울 눈물방울 얼룩진다
---「어느 여름밤」중에서

낡은 칫솔이 이 빠진 접시에 기댄 채
마당 한쪽 우물가에서 졸고 있다
검은 얼룩들이 판화처럼 깔려 있다
엄마의 머리를 까맣게 물들인 것이 틀림없는데
누가 엄마에게 한숨을 선물했을까
하얀 머리카락이 보인다
아침 거울 속에서 은밀하게 그 숫자를 불리고 있다
내 마음의 하얀 공허가 머리를 뚫고 나오는 것 같다
사람의 머리 색깔이 변하는 것은
과일의 색깔이 변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인생은 영글어 맛 들어가는데
머리는 퇴색의 길을 놓치지 않는다
마음만은 푸른 색깔 그대로이면 얼마나 좋을까
자연의 순리대로 살고픈 마음과
앞서가는 젊은 걸음을 늦추고 싶은 마음이 교차된다
잘 익은 수박 한 조각을 베어 물며
수박처럼 달게 익어갈 나의 생을 응원한다
---「흰머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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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수묵화다. 지나간 풍경과 사람살이가 금방 일어난 일처럼 너무나 선명하게 눈앞에 다가온다. 성인이 되어서도 티 하나 없이 불러보는 순수한 감성의 노래들, 투명하다. 곱다. 때 묻은 흔적이 없다. 순수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정겨운 사람과 사물들의 이름을 부르며 확대되는 시인의 큰마음이 근사하게 다가온다. 외연 확장에 무리가 없는 것이 쉽게, 즐겁게, 모두의 추억을 한데 묶어서 툭툭 던져준다. 좋은 시, 훌륭한 시는 동심에서 우러나온다는 동심론을 부정하지 못한다. 시인은 살아온 시간에서, 자연환경에서 그윽한 물소리를 들으며, 외양간 황소의 멀뚱멀뚱한 눈동자에서 어머니의 애달픈 눈물을 읽어낸다. 그리고 존재의 근원에 접근하는 그리움의 처소를 정확하게 묘사해낸다. 추억의 뒤안길에 묻혀 있는 언어들을 흙 하나 묻히지 않고 끌어낸다. 이러한 시인의 마력은 독자들을 위로하며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 배두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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