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년, 왜 영어는 쌓이는 느낌이 없을까?」
‘왜 영어는 쌓이는 느낌이 없을까?’ 누구나 이런 의문을 한번은 던져 보았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뜻과 관계없이 오랜 기간 영어를 공부해야 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내신시험과 수능 영어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대학에 들어가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TOEIC, TOEFL, TEPS 등에 매달립니다. 하지만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까지 무려 14년 이상 영어를 공부하고 그사이 정말 엄청난 데이터가 꾸준하게 들어왔지만, 이상하게도 영어 실력은 늘 제자리를 맴돌고 일정 단계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독해는 되는데 문법이 약하다’라든지 ‘듣기는 되는데 영작이 안 된다’라든지 ‘말하기는 되는데 원서 읽기가 안 된다’ 등의 ‘문법/읽기/쓰기/듣기/말하기’가 전부 따로 노는 이상한 반쪽 영어로 끝이 납니다. 결국 영어는 우리 모두의 한(恨)이 되어 어느 순간 ‘왜 난 안되지?’ 하면서 그때부터 온갖 영어 공부법을 순례하게 됩니다. 제일 기초적인 생활영어나 문법책부터 다시 시작하기도 하고, 유튜브에서 500문장 따라 읽기도 해보고 넷플릭스에서 스크립트를 받아서 섀도잉(shadowing)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끈기 있게 끝까지 끌고 나가기가 벅차고 뭔가 헛도는 기분이 계속됩니다. 무엇보다 쌓이는 느낌, 공부가 늘고 있다는 느낌, 영어 데이터가 축적되고 있다는 느낌, 이것이 생기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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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과격한 영어의 진화: 발굽포유류, 물속으로 뛰어들다」
고래가 원래는 기린/사슴/소/하마에 가까웠던 네발 달린 육상동물이었다고 하면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실제 고래는 발굽이 짝수인 포유류, 즉, 우제목(偶蹄目)에 속합니다). 영어도 고래처럼 과격하게 진화했습니다. 5C에 시작된 고대영어는 이후 1,00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엄청난 환경적 변화와 도전을 겪습니다.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여러 이민족에게 영토를 뺏기고 심지어 노르만족의 식민지가 되면서 라틴어(고대 로마어), 스칸디나비아어(고대 노르웨이어), 노르만어(Norman French), 프랑스어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한 다양한 언어를 가진 이민족과 교역해야 하는 상업적 필요성이 영어의 언어적 변화를 강요했습니다. 고대영어 후기부터 시작되어 중세에 일반화된 음성변화뿐만 아니라 방언들의 충돌과 외래어의 영향으로 중세 후반부터 현대영어까지 이어졌던 발음상의 큰 변화(the Great Vowel Shift)까지 경험합니다. 그 결과 영어는 독일어와 같은 복잡한 굴절을 버리고 대신 말의 순서를 고정하고 전치사를 발달시키는 급격한 진화를 선택합니다. 발굽포유류에 속했던 동물이 육지를 버리고 과감하게 바다로 뛰어들어 전혀 다른 생물로 진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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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은 붙어있다(‘고양이에게’) vs 영어는 쪼개져 있다(‘to a cat’)」
‘고양이에게’라는 우리말을 굳이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고양이’와 ‘--에게’라는 2개의 형태소(뜻을 가진 가장 작은 말의 단위)가 결합했음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말을 배우는 외국인에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고양’이라는 경기도의 지역명이 떠오를 수도 있고(실제로 고양시의 마스코트는 ‘고양고양이’입니다), ‘이’는 ‘치아, 이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에’와 ‘--게’가 각각 조사로 쓰이기에 ‘에’와 ‘게’를 따로 분리해야 할지 아니면 ‘에게’를 하나로 보아야 할지가 헷갈립니다. 심지어 ‘이에게’를 조사 ‘이’와 조사 ‘에게’가 결합한 하나의 조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말처럼 여러 개의 형태소가 이미 결합되어 있는 언어를 종합어(綜合語, synthetic language)라고 합니다. 종합어를 배우려면 외국인들은 이미 결합된 말을 여러 개의 형태소로 나누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일이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발생합니다. 영어는 ‘위치어’이고 각각의 형태소(뜻을 가진 가장 작은 말의 단위)가 하나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형태소가 붙어있는 종합어와 대비하여 위치어를 다른 말로 분석어(分析語, analytic language) 혹은 각각의 어휘가 굴절하지 않고 자립적/고립적이기 때문에 고립어(孤立語, isolating language)라고 부릅니다. 우리말 ‘고양이에게’라는 말을 영어는 to a cat 혹은 at the cats 혹은 for cat 등으로 쓸 수 있습니다. 외국인이 ‘고양이에게’라는 우리말을 이해하려면 ‘고양이’와 ‘에게’를 나누어서 해석해야 하지만, 우리가 영어를 배우려면 오히려 (to a cat), (at the cats), (for cat)처럼 3개 혹은 2개의 단어를 하나의 뭉치로 결합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즉, 영어는 쪼개져 있기에 의미를 이해하려면 결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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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과 최적화: ‘유닛’으로 영문법을 하나로 꿰어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리 복잡한 영어 문장도 모두 안착시킬 수 있는 간결한 한 장의 설계도입니다. 이 영어 설계의 기반은 ‘위치’이고, 이 설계도에서 사용하는 영어 문장의 조립 단위가 ‘유닛(unit)’입니다. 즉, 영어는 정해진 위치에 따라 유닛들을 조립하는 언어이고, 이 설계 단위가 없다면 우리는 문법 개념들을 체계적으로 연결할 수 없습니다. 유닛은 현대언어학의 가장 강력한 이론들로 기존의 품사와 문장 5형식의 파편성을 극복하고 이를 일관성 있게 하나로 꿰뚫어 줄 바늘과 실입니다. 우리는 이 유닛들을 최적의 순서로 차례대로 결합하면서 영어라는 언어의 스토리를 완성할 것입니다. 이 문장 조립의 과정을 따라갈 때 비로소 우리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별개의 문법 에피소드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탄탄한 스토리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조립이 끝났을 때는 버려지는 부품이 하나도 없게 전체가 일맥상통(一脈相通)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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