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만 한 네가 내게로 왔다. 앙다문 입술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황색의 꽃잎으로 내 발아래 있다. 오후의 소낙비처럼 휑한 눈꺼풀에 이슬이 맺혔다. 겨울비가 추적였고 네가 주먹을 후려치는 순간, 백 개의 가시가 내 가슴에 박혔다. 네가 쏟아 낸 각혈처럼 물보라 치는 태풍들이 제 기세를 낮추는 관조觀照의. 봄, 사계를 맨바닥에서 꽃인 듯, 가시인 듯, 백 년의 세월을 붙잡고 있다. 죽어 사는 이와 살아 죽은 이의 차이가 있을까 저만큼 봄날은 감각도 없이 찾아든다. 굉음을 동행하고.
---「손바닥선인장」중에서
발자국 따라 굽이굽이 녹산로의 숲길 따라 걷는다 사월의 뇌관은 빙하기의 기압과 맞붙어 병풍으로 둘러싸여 있네 길 따라 가시리 풍차의 동쪽 마을 막막한 능선을 떠안고 동남쪽 저, 깊은 한라의 심연에 닿았네 아른대는 수평선 뒤로 하고 먼 지평선에 붙은 봄날의 사진, 갤러리 김영감은 보이질 않네
비경은 바람 부는 탐방 길에 몰려있네 맨발의 평원 큰 바람개비 장엄한 풍광 빙글빙글 돌아가는 지친 발걸음 네모난 의자에 앉아있네 인생사진 없는 나는 순례자, 오메기떡 청귤 에이드 이주민의 정착지에서 보드라운 속살을 내보이는 유도화는 지고 누군가 꺾어놓은 가지에 붉은 바람의 생채기가 아물어가네
잠시 머물다 가는 갑마장 길 조랑말과 꽃잎을 맞으며 노랑 물결 따라 걷는 탐라의 여행자 전망대 왼쪽으로 파란 손수건을 흔들다가 울퉁불퉁 어느 모살밭*꼼지락거리는 꽃무릇도 부활초를 켜는,
* 모살밭 : 모래밭, 제주의 방언
---「제주 가시리」중에서
작은 어촌마을
칠 벗겨진 나무대문 사이로 돌하르방 내외가 우묵하다
담벼락을 차지한 담쟁이덩굴이 돌확 위에도 뿌리를 내렸다
좁다란 통로와 앞마당 가득 새파란 오가피 잎잎이
가시를 감추고 알싸한 향기로 날아든다
업무지원 가는 길, 잠시 들러가는 독거노인의 집
안부를 묻기 위해 인기척 없는 방문을 살피다가
화답 없는 노크 소리처럼 무표정한
노인을 만나곤 한다
나를 버리고 내 것을 내어주고
허기진 피붙이의 표적이 되어버린 것인가
웃음을 되찾은 날의 고요는 어떤 마음의 연장선이었을까
주름진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은 햇살은
저 구불한 노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까
많은 오늘을 만나고
어떤 균열, 그 갈라진 틈새에서 내 피붙이는 믿음을 회복할까
위엄 있게 때론 능숙하게
저, 속임수를 따라가는 봄볕의 고요를 묻는다
---「고요를 묻다」중에서
화산섬에 새봄이 도착했다
노인복지관 앞,
막 도착한 목련이 환하다
십 년이 지나는 동안
이곳이 나의 터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삶은 역마라는 걸 알게 되고
인연을 맺은 지금도 또한 습濕하다
문득, 꽃은 그때 핀다
주변을 마다한 채,
저 출렁이는 햇살을 따라가면
죽은 나무에 하나둘 등불이 걸리는 걸 볼 수 있다
바람은 또 일어서고 기어이
꽃은 내빼는 것인가
이사 올 때 옮겨온 나무
관절 마디가 토해내는 우두둑 소리
절룩이는 발가락의 통증을 체득한다
외상의 계급에 따라
새로 쓴, 연서戀書가 찌릿하게 아파 오는 날,
너도, 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손 흔들고 떠나간다
한 잎 두 잎 목련꽃이 손을 흔든다
저 꽃 마당 나서면
어머니, 아버지,
내 손을 꽉 잡은 남편의 손길을 만날 수 있을까
꽃잎의 눈시울이 붉다
벌써 세 번의 봄이 진 치고 있다
---「개화기」중에서
돛배 타고 물길 따라 먼바다로 떠나고 싶은
나는 전생의 잠녀였을까
어쩌자고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자맥질하는 이승의 바다
얼마나 숨을 삼켜야만 물 밖으로 오를 수 있을까
짓누르는 수압
나의 부력은 점점 무거워지고
스티로폼에 의지한 테왁은 둥둥 떠내려간다
거센 돌풍을 헤치며 알몸뚱이로 떠가는 날들
버둥대는 돌풍이 되고 더러는 순한 훈풍이 되고
안개에 묻힌 난파선처럼 고립이 되고
헝클어진 물살 너머 잔잔한 남쪽 바다에 닿고서야
참았던 숨비소리를 내뱉는다
짠 물에 부르튼 맨발로
---「나의 부력」중에서
저, 빈 풍경 끝
코발트 바다의 햇살마저
비통함이 흐르는 유배지 월령 포구 말이 없네
백년초 가시면류관을 쓰고 바라보네
뭇사람의 손길 닿지 않아
가시마다 제 안의 멍울을 푸르게 받들고 있네
잎새 없는 향기를 가시로 피우고
선인仙人의 반열에서 한 땀 한 땀 묵언 중이네
사계의 바늘 그림자 어둠 속 깊이
백 년 동안 바람을 들이네
죽어서도 빛을 들이네
고통 없이 피는 꽃 어디 있을까
가시가 영광이 되었네
---「가시 꽃」중에서
저, 유채꽃 향기는 초록에 매몰된 상처
가끔 흘리는 눈물이 비리다
벼랑 끝 새벽을 잡아당기는 불꽃,
한발 봄빛들이 빨라졌다
맨땅을 헤집는 불새들 날아오르고
피 멍든 줄기 마디마디에 맥박이 뛴다
파랑과 노랑의 완벽한 조화
무거워진 바람에 비틀거려도
저만의 몸짓으로 수북한 봄볕을 삼키는 것이다
유배지에 첫발을 디뎠을 때,
설렘의 막막함을 안고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
적막한 세상 흩뿌리는 인연의 밤들
이역만리 소식은 끊어지고
점차 굵어지는 해풍에 온몸을 내어주면 그뿐,
쉬 지치지 않는 나는 푸른 심장을 달았다
무너지지 않는 하늘처럼
단단한 돌바닥에 발 시린 생명의 집,
마땅히 제 숙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이다
거센 빗줄기를 맞으며 울다 웃는 꽃의 목숨들
길바닥은 맨도롱하다*
저 피고 지는 사람들 속에서 어쩌다 가슴을 베었는가
서서히 놓아버린 기억처럼
잇몸 없는 터전에서 아예 눌러앉자던 약속
와락, 울어도 좋을 봄밤이 흘러간다
* 맨도롱하다 : 따뜻하다는 제주방언
---「이 봄밤의 향기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