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밤, 죽은 피아니스트들의 이야기들이 허공에 솟았다 떨어진다. 젖은 하늘이 무거워지도록 별빛은 너무 먼 빛일까. 검붉은 꽃잎이 떨어지듯 달밤에 연서를 품은 말이 달리듯 닿지 못한 입술의 살에 마른 피가 맺히듯 가슴을 밟는 것은 건반 위에 쓴 그의 시들, 어두운 꿈길의 새벽을 지나 아침이 올 때까지 밤마다 마른 잎 같은 몸을 덮어준다. 녹턴을 사랑한 누군가도 이른 나이에 그를 따라 떠났지, 오늘 밤은 누구의 심장을 그의 제단에 올릴까.
---「쇼팽을 듣는 밤」중에서
개구리 같은 소녀가, 18, 저만의 시니피에를 던지고 간다. 난 두꺼비가 되어 잠시 소나기를 맞는다. 재잘거리는 그 애의 실핏줄에 푸른 맥이 흐른다. 개구리를 파충류로 알고 있던 소녀는 시는 개소리 같다고 불평한다. 아직 꺼내지도 못한 말들의 알쏭달쏭한 기호들이 독해를 기다리고 있다.
꿈속에서 필생의 합을 겨루는 그녀의 칼집엔 늘 내 칼이 꽂혀있다. 그녀는 연금술사처럼 언어의 칼을 벼리고 있다. 온전히 합을 이루지 못한 다면의 기호들이 푸른 잎으로 떨어진다. 시간을 거꾸로 갈 수 없는, 좀처럼 승부를 내지 못하는 나는, 새벽마다 날이 선 채 이슬에 젖어 돌아온다.
이미지로 말을 걸 수 있다고 믿는 그는 점점 독수리가 되어 간다. 아마도 그는 전생에 산정에 올라 추상抽象을 짓는 화인이었을 것이다. 드론에 실린 그의 눈으로, 나는 형상의 기호를 해석해 본다. 점은 선을 이루고 면은 공간의 프레임을 만든다. 때론 어설픈 말보다 한 컷의 눈이 불립문자를 이룬다 해도.
---「기호의 기하학」중에서
네 날랜 몸놀림이 떨림을 줄 때
난 진공의 울림 공간에 있다
리듬을 타고 춤의 살을 빚는 넌
가장 빛나는 색으로 선을 쪼개어
표적 모를 화살을 쏜다
무수히 반복했을 동선의 조각들은
몸이 기억하는 흐름을 따라
몽환의 바다, 떠도는 물고기처럼 유영한다
나의 돛대는 부러지지는 않겠으나
휘어질 대로 휘어져 버린 기둥은
커다란 활이 되어 푸르러진다
허공에 박힌 화살엔
온몸을 새겨넣은 도도滔滔한 무늬
해독을 기다리는 염염焰焰한 문자들
난 분절된 소리의 말들을 붙잡아
빈 퍼즐을 맞춰보지만
무대는 이미 끝나고
뇌리를 파고드는, 귀를 막고 싶은
젊은 무녀의 검은 웃음소리
---「무녀舞女, 오디세이」중에서
사슴이 장대에 오르듯
광대가 줄을 타듯
너의 무대는 수직의 기둥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폴에 물구나무를 서고
바람에 검은 머리채를 날린다
검객이 풀잎의 살을 가르듯
온몸으로 그려내는 역동의 곡선들
겹겹의 꽃이 피고 진다
얼마나 멍든 시간을
저 미완의 극점에서 보냈을까
폴은 새로운 깃발처럼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는 지금 위험한 곡예로
무형의 입구를 향해 몸을 던진다
무대 위의 폴은 그녀를 안고
하늘이라도 오를 듯
전신을 바르르 떤다
그녀는 이제 한 마리 새인 양
허공의 물고기가 되어 춤을 춘다
너는 폴이 사랑하는 여자인가
그녀는 폴에 미친 폴미녀, 무대 위엔
누군가의 심장이 뒹굴고 있다
---「폴 타는 여자」중에서
늘 시차를 안고 살아야 하는
넌 어느 별에서 왔을까
끊어질 듯 이어지는 너의 메시지는
새벽을 건너온 지친 목소리로
무겁게 쓰러지고 만다
아마 처음으로 내게 건너온
너의 메시지는 박하향 나는
캔디맛 같은 것
잠시 스쳐 간 손길이라도
한때는 굳게 다짐했던 약속도
이제는 네가 멀어져 갈수록
허공에 사라지는 별빛이 되겠지
너는 이제 명왕성에 간다는 것일까
그곳은 너무 멀고도 추운 곳
적막한 흑암의 공간을 비행하듯
네 앞에 놓인 삶의 궤도는
또 어찌 그리 아득할 것인지
산다는 것이 따스한 빛과 물이 있는
저만의 숲길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눈과 얼음의 길을 지나
우리는 어느 먼 별에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지금은 함께 갈 수 없다 해도
시간과 공간이 휘어버린 그런
행성 하나쯤 있다면
---「명왕성 소녀」중에서
두둥, 소년은 북을 치며 때론 춤도 추며 신명을 타고 광대의 길을 나아간다. 두두둥, 역마처럼 바람의 깃을 잡고 제 안의 심장을 두들기는 장단을 따라 떠도는 제 몸의 길을 찾는다. 그곳이 어디든 가슴 뛰게 하는 무대라면 초원을 달리는 말처럼 너는 그렇게 달려가야 하지 않겠느냐. 두두둥 두두둥, 사는 것이 쓰디쓴 밥벌이가 된다 해도 눈물 젖은 빵의 맛을 알아갈 때가 있는 법, 그것이 저녁놀에 물든 구름을 안고 바람의 아들로 사는 것이라 해도 그 길이 몇 번의 생을 건너온 환생이라 해도 홀로 견뎌야 할 업이라면, 둥둥 두두둥, 쿵, 언젠가는 온몸을 울려 하늘의 끝에 닿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북 치는 소년」중에서
연들이 푸른 잎 사이로 저마다 꽃등을 매달고
너른 잎마다 물방울 가부좌를 틀고 있다
햇빛경전을 외는 비구니들일까
한 줌의 먼 바람에도
맑은 향기를 본다 했지
난 산문山門에 든 여인처럼 합장한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공양은, 연꽃 공양이 으뜸이라는데
수면에 미처 오르지도 못하고
폭우에 잠긴 저 어린 꽃봉오리는 어찌하나
아무래도 이번 생은 성불하기 어려운 게다
그 손목 붙잡아 끌어올리고 싶어지는
물속의 수련 한 송이
---「수련水蓮의 수련修鍊」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