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께서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내십니까?”
서너 번 차를 삼킨 김판두가 입을 열었다. 용희는 긴 속눈썹을 내렸다가 올렸다.
“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 생각을 담으니 본질이 더욱 흐려지는 듯합니다. 하여 잡다한 생각을 비우는 중입니다.”
“생각을 비우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비워 내야 보이는 것들이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을 깨고 편견을 깨고, 치우치는 사심을 모두 지우고 나면 결국엔 진실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그녀는 그리 믿기로 했다.
“모두 비워 낸 뒤 마마께서는 무엇을 보고자 하십니까?”
“저는 제 눈에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자 합니다.”
용희는 찻잔을 내리며 답했고, 김판두는 딸아이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길쭉하게 뻗은 딸아이의 손가락이 어찌나 곱고 흰지,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제게만 보여주지 않으려고 세상이 기를 쓰며 감춘 것들. 단내 나는 아첨 뒤에 숨은 조선의 현실. 그러한 것들을 보려고 합니다, 아버지.”
그러고 보니 시간은 참 무섭게도 흐른다. 딸아이는 어느덧 조선의 세자빈이 되었다. 한 사내의 여인이 되었고, 모자람 없는 빈궁이 되었으며, 현명한 여인이 되어주었다.
---「81화 접점」중에서
조용히 못을 응시하던 용희는 허리를 수그려 작은 돌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집어 든 두 개의 자갈 중 하나를 못에 던졌다. 첨벙 소리를 내며 자갈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부유물이 올라 못이 탁해졌다가 잠잠해졌다. 용희는 자신의 손바닥에 남은 자갈 하나에 시선을 주었고, 신기형이 따라 빈궁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신기형이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대감, 지금 이 사람 손바닥 위에 남은 자갈돌 하나를 못으로 던질까요? 아니면 원래 있던 자리에 그냥 둘까요?”
신기형은 별 이상한 질문을 다 보겠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손바닥만 응시했다.
“마마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깟 돌 하나 어쩌지 못하시는 분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렇겠지요?”
용희는 신기형의 대꾸가 마음에 든다는 듯 빙그레 미소 그렸다.
이내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자갈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이내 그녀가 다음 말을 잇자 신기형은 눈꺼풀에 힘을 실었다.
빈궁이 심중에 품고 있는 뜻을 이제야 알겠다.
“장악중(掌握中).”
무엇을 어찌해도 손바닥 안.
“돌의 운명을 이 사람이 결정할 수 있으니 장악중입니다. 그렇지요?”
빈궁의 손바닥 위에 있는 자갈은, 바로 자신을 뜻하고 있었다.
“대감, 어찌 말씀이 없으십니까?”
또다시 보드라운 기운으로 돌을 그러쥔 용희가 태연하게 묻자 신기형은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치욕을 참지 못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습니다, 마마.”
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희는 자갈을 못으로 던졌다. 또다시 첨벙 소리를 내며 자갈이 사라지자 그녀는 개운하다는 듯 시원한 숨을 내쉬었다.
“던졌습니다. 원래의 자리에 두고 싶지가 않군요.”
“마마께서는 지금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것이옵니까?”
작은 돌 하나가 사라진들 세상이 바뀔 것도 아니요, 역사에 점 하나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못가 주변엔 자갈이 많고, 대체란 얼마든지 가능했다.
“인과응보.”
그대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81화 접점」중에서
잠에 빠진 것 같던 음성이 분명해지더니 완이 상체를 폈다. 어느새 온기로 물들었던 그녀의 어깨에 휑한 바람이 스쳤다. 용희는 대롱대롱 매달린 홍시를 바라보다가 머리에 꽂으며 완을 향해 해사한 웃음을 지었다.
“마음에 꼭 듭니다. 매일 하고 다닐게요.”
주상 전하께서 금두꺼비를 주셨다고 말해 볼까 하다가 관두기로 한다. 더 좋은 것을 해주겠다며 눈에 쌍심지를 켤지도 모르니까.
사랑받는 것이 벅차 그녀가 환히 웃으니 무심코 완의 입술이 이마로 내려왔다. 분명하고도 선명한 자국이 새겨지는 기운에 용희는 눈을 감았다. 목덜미엔 그의 두 손이, 머리 위론 달빛이. 입술이 더욱 내려왔다. 닿을 듯 닿지 않은 간격 사이로 서너 초를 흘려보낸 완이 입술을 열었다.
“한시도 내 곁에서 떠나지 마라.”
“네, 저하.”
“허하지 않을 것이니 등 돌리지도 말고.”
“네, 저하.”
입술을 포갰다. 틈을 주지 않을 것처럼 완벽하게 맞닿으니 숨쉬기도 힘든 침묵의 사위가 공간을 물들였다. 시야는 막히고 감각은 트이니 또 다른 따뜻함이 두 사람을 이롭게 했다.
‘단 한순간도, 내 곁을 떠나지 마라.’
‘네, 저하.’
---「86화 운명이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