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이지만, 시대나 장소도 포함한 의미에서 다른 세계가 무수히 많다고 치면, 그중에 우연히 내가 사는 세계와 카야가 사는 세계에서 같은 언어체계가 성립되었기에 겹쳐졌다고 생각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 이런 말이 있어. ‘세상은 언어에서 태어난다’라는 말.”
--- p.56
보통 생물의 몸에 이런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그런데 나는 분명히 느꼈다. 심장이 딱 한 차례 강하게,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온 중에 가장 강하게 고동쳤고 다음 순간 평상시로 돌아갔다. 또다시 찾아온 이 신기한 감각이 대체 뭔가 불안해지는 반면, 머릿속에 너무 창작적인 해석이 떠올랐다. 나와 치카가 마음의 손을 붙잡았다고, 심장이 고동으로 알려준 것이다. 전부 내 상상에 불과할지 모르나 아까 순간적인 고동이 내 안에 있는 진실의 농도를 높였다.
--- p.136
“어디에 있든 내 안에 변하지 않는 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거랑 사고방식과 생활, 취향은 다르니까. 카야의 세계에 내가 있어도 외모나 목소리가 전혀 달라서 바로 나인 줄 모를 수도 있어. 그렇지 않을까 싶어. 카야가 내 세계에 있어도 그렇고.”
--- p.140
사람은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 조각이 목에 걸린 기분이었지만 금방 넘어갈 테니 무시했다.
“고마워.”
말로 표현할 생각은 없었는데 또 입에서 흘러나왔다.
“치카가 있어 줘서 다행이야. 정신 차릴게.”
진짜 마음은 분명 질량을 동반한다. 입술이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와 상대의 눈앞으로 굴러간다. 지금까지 살면서 품어본 적 없는 생각이라면 더욱더 무게가 늘어난다. 누군가가 그저 있어 주는, 단순히 그것에 행복을 느낀 적은 없었다. 처음으로 그런 하찮은 일이 기뻤다.
--- p.213
“어쩔 수 없이 역시 슬프다. 그러니까 나는 이기적이지만, 치카를 향한 이 마음을 잊지 않을게. 아무리 희미해지고 번지고 언젠가 만나지 못해도, 설령 죽어서 영혼만 남더라도, 내 마음속에 있는 이 기분을 절대로 잊지 않을래. 그걸 허락해주면 좋겠어.”
--- p.263
“나는 인생에 돌풍이 분다고 생각해. 다른 말로 바꿔도 좋아. 절정기나 최고의 추억이나. 인생이란, 돌풍을 맛보고 돌풍이 떠난 후에 텅 빈 채로 그 맛을 되새기면서 여생을 보내는 거야. 너는 아직 돌풍이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보였어. 그래서 나는 부러웠고 그 점에 한해서는 지금도 같은 생각이야.”
--- p.384
이어서 혹시 내 안의 본심을 전하지 않은 나는 속죄해야 하는지 생각했고, 그럴 리 없다고 일축했다. 남이 생각이나 행동을 전부 보여주지 않았다고 분노하는 건 너무 제멋대로이고 심지어 공격하는 건 분명한 월권행위니까. 그러나 나는 한때 그런 제멋대로인 월권행위를 한 적 있다.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그렇게 상처를 준 적이 있다.
--- p.413
“그러니까 지금은 그런 내 마음과 소중한 것에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어야 해. 그러고 싶어.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지금을 쌓아 올리는 수밖에 없어. 그걸 반복했을 때, 치카를 좋아했던 자신이 분명히 있었다는 지금이 생겨. 음악에 영향을 받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지금이 생겨.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 p.428